소설리스트

검신재생-124화 (124/318)

<검신재생 124화>

124. 어떻게 알아요?

천무백이 먼저 밖에 나가고, 제갈설아가 조금 뒤늦게 따라 나갔다. 제갈설아가 나오길 기다리던 시녀 유아가 곧장 등 뒤에 바짝 따라붙어, 멀리 걸어가는 천무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저분이 바로 우리 아가씨 마음을 훔친 천룡검협인가요?”

“쉿!”

제갈설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유아야!”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확 낮춘 제갈설아의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옆에서 같이 커온 유아는 샐쭉하게 웃었다.

“하남에 도착할 때부터 화장까지 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셔 놓곤…….”

“그, 그야 제갈세가의 대표로 왔으니까! 좋은 모습 보여줘야지.”

“흐음. 그래요오? 호북 후기지수들 모임 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신 것 같은데.”

“……너 진짜.”

“괜찮아요, 아가씨. 지금 진짜 아름다워요. 내가 남자라면 안 반하고 못 배길걸?”

“으응?”

“더구나 천룡검협은 이제 열여덟이라면서요? 아휴. 그럼 끝났지. 이미 설레는 중일걸요?”

제갈설아가 올해 스물이었고, 유아는 그보다 많은 스물셋이었다.

‘귀여우셔라.’

누가 봐도 신경 쓰는 모양새였다.

하남까진 올 땐 노숙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치장은 하지도 않았다. 제대로 씻기도 어려운데 무슨 화장이랴. 한데 표국에 가까워지자마자 반드시 객잔을 찾아 씻고 치장하는 모습에서 들뜬 기색까지 느껴졌으니, 비단 유아만 느끼겠는가. 같이 온 제갈세가 사람들은 다 눈치챘으리라.

“봐요. 표사들이나 쟁자수들도 다 아가씨 얼굴을 흘깃흘깃 훔쳐보고 있잖아요.”

“으음. 그래도, 그런 거 아니니까. 유아, 너 조용히 해!”

“봐요. 저기 천룡검협 옆에 있는 몸종도 아가씨 얼굴 보고 넋을 놓고 있잖아요.”

그때 먼저 나갔던 천무백이 몸종과 표사들 몇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제갈설아는 유아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코에 갖다 댔다.

천무백이 말했다.

“자. 우선 이미 지어진 건물부터 확인합시다.”

“네. 알겠어요.”

제갈설아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반응했다. 제갈세가의 학자, 장인들의 대표와 함께 천무백의 안내대로 움직였다.

* * *

제갈설아는 묘한 시선으로 천무백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유아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아의 말대로 표국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듯이 놀라는 모습이 자주 기척에 느껴졌다.

한데.

‘저치는 쳐다도 안 보는데?’

천무백은 앞서 걸어가며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못내 그게 계속 신경 쓰이던 제갈설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머릿속에 전음이 파고들었다.

‘천룡검협이 빙공의 고수였습니까?’

호위로 따라붙은 중년무사였다.

‘빙공 고수라고요?’

‘강력한 극음지기가 느껴집니다. 한데 천룡검협이 빙공을 쓴다는 소문은 접하지도 못했는데…….’

그 말에 제갈설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중년의 호위무사를 바라봤다.

자신도 명성 있는 후기지수라지만, 천무백의 잘 갈무리한 내력을 쉬이 느끼지 못했다.

묘하게 차가운 내력이 언뜻 느껴졌지만,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세했다.

즉슨 자신이 올려다보기도 힘든 경지란 사실.

한데 중년무사는 그걸 꿰뚫어 봤다.

과연 할아버지가 직접 붙여 준 무사였다.

‘아마 저번에 극음지기를 흡수해서 그럴 거예요.’

‘듣긴 했습니다만…….’

중년 무사는 쉬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잘 갈무리된 극음지기입니다. 극음지기를 흡수하기도 전에도 분명 내력이 있어서 충돌이 일어났을 텐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습니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극음지기를 다뤄 온 듯한 느낌입니다. 빙공의 고수처럼요.’

중년무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천무백에게서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천세섬도(千歲纖刀)의 말씀이시니, 그럼 천 공자가 빙공을 익힌 건 확실하겠네요.’

‘한데 극음지기뿐 아닙니다. 무언가 더 있는데, 그 이상은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천세섬도 무용.

무용은 제갈설아의 호위를 맡아 따라왔지만, 한편으론 천무백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왔다. 태상가주 제갈선의 명에 따라서. 무용은 평범한 절정의 무사처럼 내력을 잘 숨겼고, 일부러 존재감을 옅게 지웠다.

하여 누구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천무백만을 제외하고.

‘제갈가의 내공이 아니군. 식객인가? 흐음. 이만한 식객을 호위로 쓸 정도라. 제갈세가의 위세가 과거보다 더하군.’

천무백은 온전히 무용의 전력을 파악했다.

‘절정에서도 최상. 어쩌면 입신지경에 가까운 고수.’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상념이 빠르게 스쳤다.

‘경천혼공만 사용해서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는 있다. 다만 본인도 꽤 심한 내상을 각오해야 한다.

‘빙백신공을 써서 극음지기만 쓰면?’

글쎄. 이건 확실치 않다.

아직 천무백은 빙공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으니까.

‘적어도 경합이지. 이긴다고 볼 수는 없다.’

하면.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면?’

선기를 이용해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한다면?

물론 몸에 엄청난 무리다. 머리가 곤죽이 될 정도로 혹사당해야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아주 잠깐이나마 세 가지 힘을 동시에 쓸 수 있었다.

‘오십 합 이내 필승.’

압도적인 승리를 자신했다.

물론 실제로 붙어보면 다른 양상이 나오겠지만, 크게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두개의 기운을 동시에 다룰 수 있게, 선기를 다룰 방법을 알아내야 해.’

선기란 게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다.

무당이나 화산의 도사들도, 수십 년 도를 닦아 아주 간신히 선기를 느끼는 것에 그친다.

무공이나 내공심법처럼 딱 정립되어 선기를 느끼고 얻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천무백은 한 가지 확신했다.

‘선근경을 비롯한 다섯 개의 성물.’

이미 선근경의 구절을 헤아리고, 분석하고 끊임없이 외워 미약한 선기나마 얻게 됐다.

‘해야 할 일이 생겼군.’

나머지 네 개의 성물.

그것들을 찾아야 한다.

* * *

“이쪽에는 적을 참살하기보단 끌어들이는 기관진식이 있으면 좋겠소.”

“어째서죠?”

예상외로 수가기문도를 설치하는 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고 갈등에 부딪혔다.

수가기문도는 형식이 완전히 정립된 기관진식이다.

설치되는 장소에 따라 변형이 있어도, 큰 변화는 없다.

한데 천무백의 요구에 제갈설아뿐 아니라 학자들과 장인들도 반발했다.

“여기에 적을 끌어들이게 되면 다음 기관에서 반드시 죽여야 해요. 여기까지 들어온 적이라면, 강력한 고수라는 얘기니까요.”

“맞소. 그러니까 끌어들여야지.”

“네?”

제갈설아가 납득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순간만큼은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의도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았다.

“수가기문도는 적으로부터 세가를 보호하는 데 있어요. 여기에 적을 끌어들이면, 적은 단숨에 본진으로 향하는 길을 얻어 낼 수 있어요.”

“아니, 끌어들여서 곧장 죽이면 되오.”

“그럴 바엔 차라리 원래대로 여기에 확실한 함정을 파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파고든 적이라면, 웬만한 기관은 발동되기도 전에 무작정 박살 낼 것이오.”

“그렇긴 하겠지만…….”

제갈설아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까지 들어올 만한 적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입신지경은 돼야 여기까지 돌파할 수 있으니까.

천무백의 말도 맞는 얘기다. 여기까지 돌파한 고수라면, 웬만한 기관진식으로 막을 수 없다.

“끌어들여서 단숨에 죽이는 거요.”

“그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여기까지 돌파해온 고수를 어떻게 단숨에 죽이죠? 그런 엄청난 고수를 단숨에 죽이려면 절명시킬 엄청난 독이라던지…… 어?”

중얼거리던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무백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망막에 담겼다.

“독이죠? 그렇죠?”

제갈설아의 큰 눈이 반짝였다.

솔직히 천무백은 제갈설아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이래서 유전이 좋아. 똑똑하기는 똑똑하군.’

지식과 지혜는 다른 법이다.

제갈설아는 스무 살의 나이답지 않게 방대하고도 해박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수가기문도와 관련하여 천무백과 충돌하고 갈등을 빚는 면모만 봐도 그렇다.

여기까지는 천무백에게 그리 특출 난 게 아니었다.

진짜 감탄을 터뜨린 부분은 지혜였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분석하고 추론해 내는 능력을 갖췄다.

“와! 이제 알겠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변형을 요구한 것이었어죠? 상대의 내공을 축차 소모시키는 거예요. 사실 수가기문도를 어느 정도 돌파할 사람이라면, 어떤 기관도 확실하게 막지 못해요. 다만 내공과 체력을 소모한 뒤에, 이쯤에서 독을 쓰면? 맙소사. 확실해요. 끝낼 수 있어요.”

제갈설아가 혼자 잔뜩 신이나 중얼거렸다.

그러자 처음 떨떠름한 기색이었던 학자들과 장인들의 얼굴도 묘하게 바뀌었다. 이내 그럴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독이란 걸 떠올린다고 해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나아가 더 나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차라리 이전에 있던 기관도 수정하는 게 좋겠어요.”

“수정이요?”

“네. 여기서 독에 당하려면 철저하게 상대의 내공을 소모해야 해요. 웬만한 고수는 독을 내공으로 몰아내니까요. 그러면 그런 방향으로 기관진식을 수정하면…….”

“과연, 좋은 생각이오. 다만, 그럴 필요는 없소.”

“네? 어째서죠?”

제갈설아의 건의는 천무백으로서도 합당하고 받아들일 만했다.

다만 그 건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독이 있었으니까.

“장강만독과 석독을 쓸 것이오.”

“장강만독! 그 장강의 장어가 뿜어내는 독이요? 그거라면 엄청난 극독이죠. 한데 그것만으로는…….”

“장강만독은 간단히 식사 전에 먹는 만두 같은 거고. 진짜는 이 석독이지.”

“석독이요?”

제갈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로서도 석독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 독이었으니까.

천무백이 싱긋 웃으며 당준파에게서 강탈해낸 석독의 위력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제갈설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세상에, 그런 독이 있다니. 이 정도라면 사천당가의 비전 독과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하면 어떻소? 장강만독과 석독을 여기 기관에 이용하면?”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제갈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요. 이 정도면, 앞에 있는 기관을 변경하는 것보단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훨씬 나아요.”

“그럼 내 생각대로 하는 거 어떻겠소?”

“음.”

제갈설아는 순간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천 공자가 얘기하는 걸 보니, 마치 수가기문도를 아주 잘 아는 듯한 느낌인데요.”

“……그야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대략 개념만 파악하고 있는 바요.”

“그것만 해도 엄청 대단한데……, 마치 수가기문도에 한 번 들어왔던 것처럼 상세하게 알고 계시는데요?”

천무백은 침묵했다.

제갈설아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약간은 장난기 어린 시선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다고 천무백은 내심 느꼈지만, 아무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요?”

단도직입적인 직언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내가 수가기문도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게 아닌데.”

제갈설아는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그러면 이게 다 천공자의 직관력이라는 건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무언가 여러 복잡한 감정이 언뜻 느껴졌다.

상대에게 놀람과 경탄, 그리고 경외에 가까운 감정부터.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직관력에 대한 질투일지도.

하나 제갈설아는 이내 표정을 고쳤다.

“괜히 천룡검협이 아니시네요. 우리 제갈세가에서 나중에 공부 한번 해 보시는 거 어때요?”

“공부 말이오?”

“천하제일의 군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천공자라면. 그만한 무력에 군사의 자질이라니. 와. 생각만 해도 대단한데요.”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반쯤은 진담이었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외인에게 제갈세가 내부에서 공부를 시켜줍니까?”

“아니요. 외인은 안 되죠. 제갈세가의 핏줄과 가족이 되지 않는 한…… 힉! 오해하지 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무슨 오해요?”

“아니, 아무튼 하지 마요.”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하자 제갈설아는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휘휘 저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표출했다. 천무백이 멀뚱히 바라보자, 제갈설아는 황급히 이야기 화제를 돌렸다.

“수가기문도를 삼 할 이상 파괴했던 유일한 인물을 아세요?”

“200년 전, 사파의 절대자 혈천마괴 말이오?”

강호 역사상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닌가.

“세상엔 그리 알려졌지만, 사실 그게 진실은 아니에요.”

그 순간 천무백의 눈꼬리가 묘하게 떨렸다. 하나 당황한 채 이야기를 돌리던 제갈설아는 그 변화를 감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당시 혈천마괴를 쫓아 같이 들어온 정체불명의 고수가 또 있었거든요. 혈천마괴는 제갈세가를 공격한게 아니라, 살려고 보호를 요청하러 제갈세가에 들어온 거였어요.”

“…….”

“사실 그 고수가 다 부순 거예요. 혈천마괴 때려잡겠다고.”

“…….”

“삼 할? 아니에요. 사실은 그 이상이에요. 더 자세한 건 비밀이지만……. 혈천마괴가 아니라 그 이름 모를 고수한테 말이죠. 어휴. 그 사람 때문에 제갈세가가 오십 년 동안 강호에 모습을 못 드러냈으니…… 어? 왜 그래요? 표정이 좀 떨떠름한데?”

“그냥…… 강호의 놀라운 비사를 들어 그렇소.”

“그쵸? 놀랍죠? 대체 그 고수가 누구였을까요. 그런 무력이라면 역사에 이름이 남을 텐데.”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자신만이 유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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