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3화>
123. 이미 약속했습니다.
천무백은 연화루와 흑심방의 그간 상황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도 세웠다.
흑회의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면 곧장 움직이기로 했다.
이후 표국에 돌아와선 가족과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그간의 사정은 잘 들었다. 강호에서의 사정도 놀랍지만, 표국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제갈세가의 여식을 구하다니. 정말 장하다. 내 아들!”
천문경은 기껍게 말했다.
“표국에 의뢰를 해 왔기에, 했을 따름입니다.”
“유하에게도 들었지만, 쉬운 의뢰는 아니었을 텐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것 아니겠느냐. 이로써 우리 표국은 호북성에 진출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아무래도 제갈세가가 편의를 봐줄 터이니.”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의뢰하고 계약해서 이행한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갈세가와 청성표국은 제법 깊은 연을 맺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제갈설아도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큰 은혜를 입었다고.
은원을 잊지 않는 강호의 생리상, 청성표국은 큰 기회를 얻은 셈이다.
저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천문경이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만간 호북으로 표행이 하나 잡혀서 갈 예정인데, 가는 김에 제갈세가에 들리는 건 어떻겠느냐?”
“……?”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연을 맺었으니 인사 정도야 오갈 수 있지요.”
천무백이 그리 답하자 천문경의 표정이 다소 환해졌다. 곁에 있던 천유하의 눈도 초롱초롱 빛났다.
“그치? 이왕이면 그래도 안면이 터 있는 사람이 가는 게 좋겠구나”
“저요?”
“그래. 제갈세가의 여식을 구하면서, 제법 시간을 오랫동안 같이 했다고 들었는데.”
천문경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억지로 참고 말을 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내상을 치료하느라 좀 같이 있었죠.”
어째 천문경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유하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표행 가는 김에, 인사도 하고, 연을 이어 가는 것도 썩 괜찮은 생각 같은데. 물론 가기 전에 네가 먼저 몸은 괜찮은지 안부도 물을 겸 서찰을 보내는 건 어떻고?”
“서찰이요?”
“그래. 제갈설아에게 서찰을 보내 곧 찾아뵙겠다는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게 어떻겠느냐?”
천문경의 시선에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은 굳이 이 시점에서 제갈세가로 향하고 싶지 않았다. 곧 있을 흑회에 참여해야 하니, 그쪽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물론 천문경의 의도는 이해했다. 제갈세가를 직접 방문해 이번에 맺은 연을 확실하고 깊게 수면 위로 끌어내자는 것 아닌가.
하나 그거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수가기문도를 설치하러 사람들을 보내올 테니까.
수가기문도를 취급하는 사람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일 터. 책임자로 적어도 대공자인 제갈서후가 직접 오리라. 그도 아니면 실무자인 제갈세가의 장로들이 올 수도 있다.
제갈세가가 직접 이쪽에 먼저 방문하는 일이다. 어쩌면 이 방향이 표국에서 찾아가는 것보다 세간에서는 더 크게 쳐주리라.
천무백은 사양하며 말했다.
“이미 약속했습니다.”
“뭐?”
천유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천문경을 바라봤다. 천문경 역시 입을 벌린 채 천무백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천무백은 묘한 반응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오기로 약속했다고요.”
“······.”
“허.”
천유하는 침묵했고, 천문경은 짧게 헛웃음을 내보였다.
천유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동생이······ 다 컸구나.”
천무백이 그 중얼거림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그제야 천무백은 서로 말하는 바가 틀림을 깨닫고 오해를 정정해 줬다.
“수가기문도를 설치하는 일이니, 책임자급으론 아마 대공자인 제갈서후가 직접 올 확률이 높습니다. 그도 아니면 세가의 장로들이겠지요. 그들이 온다고 저에게 약속했으니, 우리가 먼저 제갈세가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 그러느냐.”
순간 천문경의 얼굴에 스치는 아쉬운 기색을 천무백이 놓칠 리가 없었다.
천무백은 슬쩍 천유하도 흘깃 바라봤다.
어째 이 부녀들이 무슨 생각으로 은근히 제갈세가행을 권했는지 알 만했다.
‘그런 오해를 할 만하지.’
오해를 사는 건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하다.
‘남녀가 한곳에 며칠을 머물렀으니까.’
무인들이 비교적 개방적인 삶을 산다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무인들이나 그렇다.
일반적인 무가도 아닌, 오대세가로 정립된 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은 명가인 제갈세가는 다르다.
그런 제갈세가의 하나뿐인 여식과 단둘이 며칠을 같이 있지 않았는가.
물론 치료를 위해서였지만, 그거야 둘의 사정일 뿐이고.
당시 검왕곡에 있던 표사들과 제갈세가의 추적대 사이에 알음알음 얘기가 돌았으니, 천문경과 천유하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만했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으니, 너무 신경 안 썼으면 합니다. 이미 제갈세가와는 충분한 연을 맺었습니다. 수가기문도를 설치한다는 사실만으로 사실 동맹 관계란 얘기니까요.”
천무백의 어조에 담긴 단호함을 느꼈을까. 천문경은 아쉬운 기색을 내보일지언정, 더는 뭐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하긴. 제갈세가의 여식이 뭐가 대수겠느냐. 듣기론 자기가 예쁜 건 알아서 콧대가 얼마나 높다는지…….”
그렇다고 곧장 뒷말하는 천문경의 모습에 천무백은 황당한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하나 이 저녁 자리가 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천무백은 부녀의 묘한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인사드려요, 제갈세가의 제갈설아입니다.”
“……어, 반갑습니다. 소저. 청성표국의 국주 천문경입니다.”
“하남 표국의 거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거인이라니, 소저가 보잘것없는 명성의 늙은이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구려. 과연, 소문대로 호북제일미군요. 이 늙은이의 눈이 환해지는 기분이외다.”
천무백은 뒷말했던 천문경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콧대 높다고 욕한 적은 언제고?’
제갈설아는 표국 사람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과연 명가의 자제다 싶을 정도로 기품이 있었기에 곳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천문경과 달리 비교적 냉철한 천유하도 제갈설아를 보며 따뜻한 미소까지 지어 줬으니 오죽하겠는가.
부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던 제갈설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천무백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천 공자님.”
“호북에서 여까지 거리가 있을 터인데, 빨리 오셨구려?”
“세가에 돌아가자마자 곧장 출발했으니까요.”
“곧장? 음기는 다 빼냈소?”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셔서 금방 치료를 마쳤어요.”
제갈세가의 태상가주가 도와줬단 사실에 천무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 강호의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직접 치료했으면 몸에 남은 극음지기를 다 빼내는 건 일도 아니리라.
어쨌거나 천무백은 그녀가 왔단 사실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런 의아함을 느꼈을까.
제갈설아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약속했으니, 지키러 왔어요.”
순간, 천문경과 천유하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꽂혔다.
그 의미심장한 시선에 천무백은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제갈세가에서 청성표국에 도착한 사람들의 숫자는 오십 명이 조금 안 됐다.
서른 정도는 학자와 깐깐한 얼굴의 장인들이었다.
아마 수가기문도를 설치하는 핵심 인력들이리라.
스무 명은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은 일류의 무사였고, 그들 중 다섯 정도는 절정에 도달해 보였다. 특히 한명의 중년무사는 천무백의 시선을 훔칠 정도로 기도가 대단했다. 천무백의 시선을 끈 건, 그 기도를 온전히 숨기고 평범한 무사처럼 보인단 사실이다.
‘흥미롭군.’
천무백은 그를 보고 감탄했다. 후기지수가 아니라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른 자다. 거기에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도 훌륭했다.
‘비밀리에 데리고 온 호위인가? 하긴. 칠면염라에게 납치를 당했으니, 그냥 보낼 리가 없지.’
스무명에 불과했지만, 당장 그들이 움직여도 하남에서 대적할만한 문파가 없을 정도였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고르신 무사들이죠.”
“태상가주께서 걱정 많이 하시는 모양인데. 왜 직접 오셨소?”
“그야 제갈세가 최고의 진법가가 저니까요.”
“허어…….”
“물론 최고는 할아버지시죠. 근데 할아버지가 움직이면 강호 곳곳이 난리가 나니까요.”
제갈설아의 웃음기 어린 말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오라버니가 책임자로 오실 줄 알았소.”
“으음.”
제갈설아가 다소 멋쩍게 웃었다.
“할아버지하고 아버지한테 엄청나게 혼났거든요.”
“하기야.”
“다 저 때문이죠. 제가 납치당하는 바람에……. 거기에.”
순간 제갈설아가 째려보듯 천무백을 쳐다봤다.
원래 눈꼬리가 올라간 인상이기에, 언뜻 보기에 째려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천무백은 묘하게 장난기 섞인 눈빛을 읽었다.
“댁 때문에 근신을 처분받았어요.”
“나 때문에?”
“세상에. 그 누가 그 상황에서 수가기문도를 요구해요?”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하긴, 자신이 그 상황을 이용한 건 맞지 않는가.
원래라면 절대로 수가기문도를 내주겠단 약속을 그리 쉽게 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그런 결정을 오라버니 혼자 내렸다고 크게 경을 쳤지만, 할아버지가 그래도 근신하라는 말 한마디로 끝냈어요. 절 구했다고 했으니까요. 특히, 칠면염라라는 말에 할아버지께서 놀란 눈치시더라고요.”
“그럴 만할 거요.”
태상가주 제갈선은 천하십대고수이면서, 어쩌면 현재 강호중원에서 두 번째로 강호에 해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물론 나고.’
그런 양반이니 단순히 칠면염라의 악명만 기억할 리가 없다. 실제로 정마대전 한가운데에 있던 양반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갈서후를 근신징계로 처리했을 거다. 칠면염라에게 잡혀 갔으면 무사히 구할 수 없으니까. 한데 그걸 수가기문도 하나를 내주고 해냈으니, 제갈선은 오히려 제갈서후가 상황에 맞게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칭찬까지 했단다.
“할아버지가 만나고 싶어 해요.”
“나를 말이오?”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칠면염라를 때려 눕혔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때려눕히긴…… 그냥 제 혼자 천명이 다해 죽은 거요.”
제갈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뭔가 의미심장하게 뒷말을 흐리는 모습에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래 협객의 풍모를 풍기는 사람이라더니, 칠면염라를 처리한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군요.”
세간에서는 천룡검협이 제갈세가의 여식을 구했단 소문은 퍼졌지만, 비인색귀로부터 구했단 얘기뿐이었다.
천무백이 굳이 칠면염라임을 밝히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것이 제갈설아의 입장에선 퍽 놀라운 일이었다.
천마신교의 인물이었던 칠면염라를 처리했단 소문이 퍼지면, 그만한 명성을 또 얻을 텐데.
과연, 명성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협객의 풍모가 아닌가.
“…….”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었으니까.
그로서 칠면염라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의 약점을 노려 몰락을 가속한 것뿐이지 않은가. 전성기 시절의 칠면염라였으면, 지금 천무백으로선 생사결을 벌였겠지만 말이다.
하나 천무백의 반응에 제갈설아는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여간, 일 시작합시다.”
천무백은 잡담을 끝내고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엑? 지금 당장이요?”
“약속 지키러 왔다고 하지 않았소.”
“…….”
“내가 했던 약속은 수가기문도 설치인데?”
제갈설아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가 안내하겠소.”
“천공자께서 직접이요?”
천무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천무백이 가만히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장원도 넓히고, 창고를 비롯해 건물을 몇 개 더 세워야 하는데, 천무백의 뜻대로 모두 정지된 상태다.
수가기문도를 설치하고 그것에 맞게 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하니 천무백은 어느 지점에 어떤 부분을 설치하면 좋은지 연구했고, 그걸 직접 따라다니며 논의해야 했다.
더구나 무려 제갈세가의 여식이다.
태상가주가 끔찍이도 아끼는 손녀.
당연히 표국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봐줘야 한다. 천문경은 국주고, 천유하도 부국주이니 바쁘다.
천무백이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갑시다. 내가 당연히 소저 곁에 있어야 하니까.”
“당연…… 히요?”
“그렇소. 일이 끝날 때까지 내곁에 있어야 하오.”
물론 그 뒤에 ‘같이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하는 뒷말이 있었지만, 제갈설아는 그 얘기를 듣진 못했다. 앞선 내용을 듣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푹 숙였으니까.
고개를 숙여 드러난 뒷목이 빨겠다.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프오? 일은 나중에 할까?”
“아, 아니에요. 지, 지금부터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