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22화 (122/318)

<검신재생 122화>

122. 아직 한창때다.

“언제부터였냐.”

“언제부터긴. 주군이 연화루 오기 전부터 난 총관이었고 설영이랑 아는 사이였소.”

“그때부터 정을 맺었다고?”

천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능허는 크흠하고 헛기침했다.

천무백이 빙글빙글 웃는데 어째, 능글맞았다.

“뭐, 안면은 그때부터 텄고. 그전에 흑심방에서 등초가 나 죽이겠다고 습격했을 때, 내가 설영이 욕보이려던 거 구해 줬잖소.”

천무백은 기억을 가다듬었다. 흑심방의 등초란 놈이 연화루를 탐내 능허를 습격했었다.

그때 등초는 능허 앞에서 기녀 몇을 욕보이려고 했었는데, 그때 기녀가 바로 설영이었다.

“은혜를 갚으라고 몰아세운 건 아니지?”

“아니, 날 뭘로 보고 그런 섭한 말씀하십니까.”

“흑도잖냐.”

“내 흑도여도 은혜 갚으란 핑계로 색욕 채울 쓰레긴 아닙니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능허를 바라보는 설영이의 눈빛엔 따뜻함이 어려있었다. 설영도 마음이 있다는 얘기겠지.

그러고 보니 자신이 표국으로 천유하, 천문경과 서찰을 주고받을 때.

능허도 같이 서찰을 주고받았었다. 그땐 그냥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갑다, 하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설영과 연락을 계속했던 듯 보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연서까지 주고받았냐?”

“크흠흠.”

능허는 어색한지 그저 헛기침만 내뱉을 따름이었다.

능글맞은 목소리가 마치 천무백이 놀리는 모양새여서 능허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능글맞게 꼬치꼬치 캐묻는 꼴이 마치 어린애 연애사에 관심 있는 아저씨 꼴 같지 않은가.

겉으로 보이는 건 정반대인데 말이다.

능허가 다소 입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레 말했다.

“여하튼, 어째 무슨 일로 오셨소. 주군. 요 며칠간 연락도 없던데.”

“연화루 장사 잘되는지 보려고.”

“그야 설영이가 잘 정리해서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까?”

“루주는 넌데. 일을 떠넘기냐?”

“흠흠. 설영이가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하더라고요.”

“그럴 바엔 그냥 네가 총관하고, 설영이 루주시켜라.”

“뭐, 그러셔도 되고요.”

너무 순순히 양보하자 오히려 천무백이 놀랐다. 마치 상관없다는 태도 아닌가.

천무백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 능허 아니지. 인피면구 벗어, 이 새끼야.”

“아니, 설영이 일 잘하는 거 맞습니다. 어차피 설영이가 루주하나, 내가 루주하나……”

천무백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노후자금으로 삼겠다는 연화루 루주자리가 아닌가. 그걸 저리 쉽게 말하는 걸 보니, 짐작되는게 있었다.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쭈, 혼인까지 생각하고 있냐?”

“나도 늦기 전에 가야 하지 않겠소. 근데 뭐, 조금 그렇소.”

눈치를 보던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한테도 대거리하며 뻔뻔스럽게 굴던 놈이, 뭔가 기가 죽은 모습 아닌가.

“나도 좋아하고, 얘도 날 좋아하는 거 같은데. 은근슬쩍 함께 살잔 얘기를 꺼내면 뭐……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라고요.”

“……으음.”

차마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푸념이었다.

남의 연애사를 구경하는 건 꽤 흥미진진한 얘기지만, 이런 심각한 고민은 천하의 천무백도 어려웠으니까.

천무백은 팔짱을 껴고 잠깐 일전의 설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이 감정을 가지면, 알게 모르게 주위에 기파를 내뿜기 마련이다.

경천혼공과 상단전을 통해 극도로 확장된 천무백의 초감각은 그 기파를 읽어냈다.

‘호감을 가진 게 분명한데.’

오히려 너무 노골적이었다. 능허를 바라보는 설영의 눈빛에는 따뜻함마저 어리지 않았던가. 그건 진득한 애정임이 분명했다.

한데 혼인 얘기를 하면 얼굴이 굳는다니…….

‘비혼주의자인가.’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골치 아픈 일이로구나, 하고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허 참. 내가 이런 얘기를 무슨 주군한테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십쇼.”

능허가 뻘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천무백도 굳이 더 파고들진 않았다. 능허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겠지. 천무백은 능허의 바람대로 이야기 주제를 바꿨다.

“설영이가 보내준 보고서는 다 확인했다. 일 잘하는 거 맞더라.”

연화루에 대해선 설영이한테 이미 여러 내용을 들었다.

결과는 흡족하였다.

연화루는 이제 하남제일청루란 명성을 확실히 굳혔다. 비단 하남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명소가 됐다.

천무백은 연화루를 긴급 시에 자금을 유용할 자금줄 겸, 하남성의 정보망을 장악하게끔 의도했는데, 다행히 의도대로 잘되었다.

“화웅이도 불렀다.”

“그 곰탱이 자식 말이오?”

“그래. 흑심방에 관해서도 얘기해야지.”

“끙. 좀 있으면 저녁 장사 시작인데, 최상층은 비워놓아야겠구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간 상황 좀 정리하자는 거지.”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웅이 연화루에 도착했다.

“인사드립니다, 주군. 화웅입니다.”

묵직한 저음.

화웅은 변한 게 없었다. 듬직한 인상 그대로였다. 천무백은 진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흑도의 인물이라기보단 담백한 무사다웠으니까.

화웅은 천무백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곤 능허를 바라봤다.

“…….”

“뭐, 이 곰탱이 자식아. 방주한테 이제 인사 올리냐?”

화웅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이오, 능 방주.”

“흐흐. 퍽 예의를 갖췄구나.”

“일전엔 별거 없어 보이더니, 이제 방주라 부를만한 자격을 갖춘 것 같소. 주군과 함께 다니며 깨달음이 있었나 보오.”

화웅은 능허의 변한 기도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전에는 화웅 자신이 방주가 되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능허보다 강하다고 자부했다. 한데 이제는 화웅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능허는 화웅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흐흐흐. 그래, 이놈아. 흑심방주는 나니까, 홀라당 먹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소. 주군이 능 방주를 방주로 세웠는데, 내가 어찌 내 뜻대로 하오리까.”

천무백은 솔직히 말해 능허보단 화웅이 방주감이라고 여겨졌다.

진중했고 신중했으며 매사에 침착했다. 듬직한 인상도 있었고, 천무백과 연이 깊지도 않은데 충성심을 갖췄다.

하긴, 그러니까 능허가 없는 사이에도 방주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잘 이끌었겠지.

천무백은 손뼉을 가볍게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 화웅. 흑심방엔 별일 없고?”

“그간 있었던 일과 보고해야 할 내용들, 여기 서류로 작성해왔습니다.”

그뿐만 아니었다. 화웅은 꼭 필요한 내용은 직접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중 천무백의 신경을 건드는 내용이 있었다.

“태룡방에서 접근했다고?”

“예.”

순간 천무백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당장 떠오른 건 중경의 적룡방이었다.

“흑심방 뒤에 내가 있다는 게 알려진 눈치였나?”

“그건 아닙니다.”

화웅의 화법은 꽤 담백했다. 가령 ‘~같습니다’ 같은 추측은 아예 내놓지 않았다.

“태룡방의 접근은 성장하는 흑도방파를 휘하에 거둬들이려는 목적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그래?”

“예. 상납금을 받치되, 자기네 동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고?”

“적어도 주군께서 흑심방의 뒤에 있단 사실은 저 멀리 있는 태룡방이 알아차리진 못했을 겁니다. 알아차렸다면, 흑심방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놈들 있다는 건데, 그 점은 제가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흐음.”

화웅이 그리 확신하니 천무백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게 언제까지 비밀이 지켜질 리는 없음은 천무백도 잘 알았다.

다만 꽤 오랫동안은 숨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오문이야 일단은 천무백의 손에 있으니 정보 제공을 안 할 테고, 개방도 태룡방이 혈귀곡과 연관성이 발견됐으니 억만금을 준다 해도 정보를 주지 않으리라.

두 정보단체가 천무백에 대한 비밀을 숨긴다면, 태룡방이 흑심방과 천무백의 관계를 알아채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하면…….

“태룡방이 뭘 요구하던가?”

“조만간 중원 흑도들이 모이는 흑회(黑會)가 열린답니다. 그때 참가하라고 하더군요.”

“흑회라……. 원래 그런 게 자주 있었나?”

화웅이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직속 흑도방파를 모아서 잔치를 벌이는 행사는 있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흑회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고 각지의 흑도방파를 모은 건 처음입니다.”

천무백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흑도의 큰 세력, 태룡방.

얼마나 큰 세력인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태룡방이 다들 모이라고 하면, 흑도들은 모일 수밖에 없던 터.

한데 그 꼬라지가 마치…….

“무슨 흑도연맹이라도 결성하려는 건가.”

천무백의 중얼거림에 화웅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맞아?”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론 그런 얘기가 암암리에 돌고 있습니다.”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어째 시간이 공교롭다. 천무백이 적룡방을 쓰러뜨린 직후다. 원래라면 태룡방 같은 흑도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리라. 하나 백모쌍귀 중 동생인 십성이 태룡방에서 왔다고 했으니…….

혈귀곡과의 연관은 부정 못 한다.

‘어떤 관계일지는 유추가 아직 안 되는데.’

혈사문처럼 하위조직이거나.

아니면 협력관계나.

둘 중 어떤 것이라도 골치 아픈 상황이다.

천무백은 화웅에게 말했다.

“방주를 초대했더냐?”

“네.”

순간 듣고 있던 능허가 천무백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창백하게 질렸다.

능허의 표정을 본 천무백이 감탄했다.

“이야. 능허. 눈치 빠르네. 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주군…….”

“뭐, 너 방주잖아.”

“아니…… 저보고 그 용담호혈로 가란 말입니까?”

“용담호혈은 무슨, 흑도 놈들한테.”

“아니, 잠깐만. 어폐가 있습니다.”

“뭐가?”

순간 능허는 뭔가 큰 발견을 해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독안사 능허가 천룡검협과 같이 다닌다는 얘기는 이미 강호에 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제가 흑심방주 자격으로 흑회에 참가하면, 태룡방에서 아! 흑심방은 천룡검협과 관련이 있구나! 하고 손뼉을 치지 않겠습니까?”

천무백은 침묵했다. 그야말로 통렬한 일침이었다. 능허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크으. 아쉽네요. 내가 방주니까 꼭 가고 싶었는데, 별 수 있습니까. 여기 화웅이 놈, 방주인 척하고 보내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흑심방도 이놈이 이끌었으니까 방주라고 해도 사람들 다 믿을 겁니다.”

능허는 턱을 추켜올리며 천무백을 쳐다봤다. 드디어 그 천무백을 화술로서 이겼단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천무백도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천무백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네?”

뭔가 어감이 묘했다.

“네가 그리도 가고 싶어 한다면, 가야지 뭐.

“네?”

“대충 인피면구로 꾸미면 된다. 저번에 수룡채 잠입할 때 분장한 정도로만 해도, 충분해. 애꾸인거 감추고, 팔 하나 짤린 거 위장하면 못 알아봐.”

“……!”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따라갈 테니까. 대충 정체 숨기고.”

능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오히려 천무백이 같이 간다는 말에 능허는 숨이 막혀왔다.

지금껏 천무백하고 같이 움직여서, 피를 안 본 적이 있었나.

하나 거부는 거부하는 게 천무백인 법이다.

꼼짝 못 하고 천무백의 뜻을 따라야함을 깨달은 능허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놈의 인생이 말년에 꼬이는구나.”

“아직 한창때다, 능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