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21화 (121/318)

<검신재생 121화>

121. 장가 갈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작금의 청성표국이 무서운 성장을 이루는데 지리적 요건이 큰 도움이 됐다.

서쪽으론 산서성, 섬서성에 맞닿았고, 북쪽으론 하북, 산동성과 닿았다. 동쪽으로는 강소성과 안휘성에 닿았고, 남쪽으론 호북성으로 향했다.

하남제일표국.

현재 청성표국을 일컫는 단어였다.

청성표국이 위치한 원양현은 하남에서도 비교적 북쪽에 치우쳐 있고, 애당초 큰 대읍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청성표국이 개봉이나 정주로 이전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거대해진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장원을 넓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원양현의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당장 청성표국이 이전해 버리면, 원양현은 지금의 성장 동력을 잃고 바닥으로 처박힐 게 분명했다. 알게 모르게 원양현의 경제는 청성표국에 큰 영향을 받았다. 관리들은 전전긍긍하며 청성표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때 표국 사람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사랑받는다는 막내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관부는 행동을 개시했다.

펄럭!

“…….”

천무백은 할 말을 잃었다.

원양현에 들어서는 순간 펄럭이며 나부끼는 깃발을 보라.

아니, 정확히는 깃발에 적힌 문구를.

의협지사(義俠志士) 천공(天公)

협객귀환(俠客歸還)

“이 무슨······.”

깃발 하나면 모를까. 무슨 고위직 관리가 행차하는 것도 아니고, 황족이 행차하는 것도 아닐 터인데.

나부끼는 깃발에는 저것들과 같은 낯 뜨거운 문구들이 한가득하였다.

그게 누구를 가리키겠는가.

바로 천무백이다.

천무백은 단언컨대 숱한 전생을 거듭해오며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머리가 아찔했다.

“이런 게 수치심이라는 것이구나······.”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극음지기를 다스리라는 것도 아니고, 허 참.”

세상에.

공개적으로 저런 문구들이라니.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며 천유하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하신 거죠?”

천유하가 살포시 웃었다.

“아마 관리들이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저런 것 같은데. 아버지가 팔불출이란 건 익히 알려져 있으니까.”

“관부에서요?”

천무백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짐작이 갔다.

이런 건 오히려 좋지 않을 텐데. 뭐 대단한 위세라고. 이렇게 대놓고 거창한 환영식을 벌이는데,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아버지는 내심 흐뭇해하고 있을걸?”

“······.”

천유하의 예측은 정확했다.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천문경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우리 아들!”

청성표국의 국주, 하남 표국업계의 거인(巨人) 천문경.

그러나 지금은 영락없는 아들바보로 유명한 팔불출의 모습이다.

“혹시 오면서 봤느냐? 아니, 글쎄. 우리 아들의 강호에서 활약한 거 다 감명 깊었다고. 응? 관리들이나 여기 제법 한가락 한다는 부호들이 이렇게 환영식을······.”

역시나.

이걸 내심 자랑스러워한 거구나.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표국 밖에 나가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집이 좋긴 좋구나.”

천무백은 한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떠들썩한 환영식에 밖에 돌아다니기만 해도 원양현 사람이라면 얼굴을 다 알아볼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단전의 극음지기였다.

“요놈을 어찌하면 좋을까.”

한 사람의 몸에 상반된 두 가지의 기운이 공존한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두 가지 기운이 공존한다고? 그러면 죽는 것밖에 더 있는가.

그나마 경천혼공이 정종무학을 집대성한 상단전의 심법이기에 이 정도였으니, 다른 내공심법이었으면 충돌은 자명한 일이리라.

“경천혼공의 기운에 선기가 덧씌워지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지도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주화입마에 빠지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위기였다.

때마침 선근경의 구절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선기가 같이 흐르지 못했다면 큰 내상을 입는 건 각오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둘의 공존은 가능하나, 동시에 사용하려면?’

선근경의 선기.

그게 바로 정답이었다.

‘하지만······.’

천무백은 가부좌를 튼 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외워 이젠 각인이 된 선근경의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경천혼공의 기운에 선기가 덧씌워졌다.

딱 그것뿐이었다.

‘선기만을 따로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가 없다.’

하물며 어떻게 발생하는지 일련의 과정마저 쉬이 이해가 되지 않는 노릇이다.

이 극음지기와 경천혼공을 동시에 다스리려면 선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 건 확실하다.

다만 천무백의 의지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우니, 지금으로선 활용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선기를 다룰 방법도 찾아봐야겠어.’

뭐, 중원에 널린 게 도학이고, 도문도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러고 보니 선근경뿐만 아니라 전진 성물이 더 있었지.’

전진의 오성물.

천무백의 종리홍에게 들었던 다섯 개의 성물을 떠올렸다.

‘생각해 봐야겠군.’

지금까진 큰 관심이 없었지만, 선근경과 같이 성물이라 불리는 것이니, 무언가 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하나 당장 오성물을 찾을 수 없으니 천무백은 생각을 달리했다.

‘둘의 충돌이 일으키지 않게 따로따로 운용해야 한다는 건데.’

일단 동시에 사용하는 건 쉽지 않다. 두 가지 기운을 다루는 집중력을 동시에 활용하면서 선근경을 같이 외워야 하니, 한 번 기운을 쓸 때마다 세 가지의 일을 같이하는 일이니까.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그게 쉽겠는가.

차선으론 상단전은 경천혼공으로 운용하고, 하단전은 새로운 심법으로 극음지기를 운용하는 방법이다.

이리하면 두 기운은 공존하되 동시에 쓸 수는 없다. 가령 왼손으로 경천혼공의 기운을 쓰고, 오른손으로 극음지기를 쓸 수 없단 얘기다.

‘일단 극음지기를 다스리는 게 먼저니.’

천무백은 머릿속을 뒤졌다.

빙공에 해박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의 장대한 머릿속 비고에는 꽤 쓸 만한 심법이 존재했다.

아니, 누군가 그 이름을 들었다면 ‘쓸만하다’라는 평가에 기함했으리라.

‘빙백신공(氷白神功)’

저 멀리. 새외의 신비문파.

북해빙궁의 내공심법의 구결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 * *

“점박아, 출타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요, 도련님.”

천무백은 쪼르르 달려오는 점박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모두가 반갑게 맞아줬지만, 점박이 이 녀석은 아주 엉엉 울고 난리였었다. 극음지기 때문에 창백한 피부를 보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얼마나 절절매던지.

“어?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셨습니다? 아픈 거 다 낳으셨습니까요?”

“아픈 거 아니라니까. 내공 문제였다.”

“아하, 뭐 그래도 이게 훨씬 좋아 보입니다. 차가워 보이는 도련님보단 이렇게 얼굴에 혈색도 있고 응? 좀 귀여운 면모가 있어야······.”

“시끄럽다. 어서 가자.”

“네네. 어디로 가십니까요?”

점박이의 말이 길어지자 천무백은 일축했다.

“연화루.”

천무백이 연화루로 향하는 이유는 여러 개였다.

우선 서류로 본 연화루의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요량이었고, 둘째로는 능허를 대신해 흑심방을 이끌던 화웅과의 만남도 잡혔다.

흑심방은 철저하게 천무백의 지휘에만 따른다. 흑심방이 천무백의 밑에 있음은 천유하와 천문경만 알았다. 급한 순간에 천유하도 흑심방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지만, 겉으론 드러내진 않았다.

철저하게 비밀에 숨겼다. 표국이 괜히 흑도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하면, 좋은 소문이 날 리가 없으니까.

“도련님, 이제 계속 표국에 머무르실 겁니까요?”

“왜 그러느냐?”

“명성도 얻었고, 했으니까 말이지요. 도련님도 이제 슬슬 혼약을 생각할 나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얼씨구. 내 아버지와 누님도 말하지 않는 혼약 얘기를 네가 꺼내는구나.”

“그야 혼인을 해야 위험한 강호로 안 가고 머무르지 않겠습니까요.”

점박이가 헤헤 웃었다.

본능적으로 점박이는 알았다. 천무백이 곧 다시 강호로 나서리라는 사실을.

천무백은 그런 점박이의 마음을 느꼈기에 그저 웃어 보였다.

“너부터 장가가면 생각해보마.”

“네에? 아휴, 제가 무슨. 아휴, 아닙니다요. 전 도련님 몸종으로 평생 있을 겁니다요.”

천무백은 곰곰이 생각했다. 생긴 것도 나름 말짱했고, 이젠 절름발이도 아니고 하니. 천무백이 강호에 나가면 외로움을 탈법하니, 장가를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뭐, 차차 생각하고.’

천무백은 이내 연화루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천무백을 알아본 일석, 이석, 삼석 삼형제가 후다닥 뛰쳐 나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너희한테 형님이란 소리 들으니까 내가 흑도놈 같잖냐.”

일전에 능허가 흑심방의 등초에게 습격당했을 때, 거둬들였던 세 명이었다.

천무백의 타박에 다소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뭐라······.”

“그냥 공자라고 불러라.”

“알겠습니다, 공자님.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능허 있지? 안내해.”

순간 돌 삼형제는 멈칫했다. 곧장 뛰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뭐야? 능허 없어?”

“아뇨, 있는데요. 그것이······.”

“어딨어? 최상층?”

“네, 네. 그, 그런데요. 그게······ 아 그게 참.”

돌 삼형제의 첫째인 일석이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천무백이 거침없이 계단을 올랐다.

“능허야. 뭐하고 있니?”

공력을 실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루주가 머무르는 최상층의 방.

천무백이 소리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반쯤만 열렸다.

그 반쯤 열린 사이로 능허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한데 표정이 묘했다. 다급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워 보이기도 했다. 슬쩍 보아하니 문뒤로 가린 상반신은 벗어젖혔고,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뭐 해? 너?”

“주, 주군 오셨습니까요.”

“대낮인데 자고 있던 건 아닐 테고. 내 눈치 슬슬 보는 게, 너 뭐 하냐?”

“거······ 그게.”

그때였다.

반쯤 열렸던 문이 열리면서, 다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여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능허를 대신해 연화루를 운영하던 기녀, 설영이었다.

설영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해왔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

천무백은 침묵한 채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상반신을 벗어젖힌 능허와 얼굴에 홍조를 띤 설영.

천무백은 순간 맥이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허. 대낮부터······.”

능허는 뻘쭘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거, 연락도 없이. 그간 회포를 풀라고 편히 쉬라면서, 왜 불쑥 찾아옵니까.”

“내가 운영하는 기루 찾아오는데 연락도 해야 하냐. 능허야, 그리고 대낮이다.”

“으흠, 흠.”

설영은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능허가 아쉬운 듯 그 뒷모습을 보다 천무백의 눈치를 보곤 급히 표정을 달리했다.

그 광경이 퍽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길 따름이라, 천무백은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너 한번 갔다 온 적 있냐?”

“네? 아뇨. 무슨 소립니까.”

“그 나이 먹고 혼인 한번 안 올렸어?”

“어, 그렇게 어린 얼굴로 그런 말 하면 제 기분이 묘해집니다.”

능허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제 아들뻘인 놈에게 저런 소리를 듣는 건, 천무백하고 친해졌다고 해도 퍽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나 천무백이 그런 능허의 심정을 고려해 줄 리가 없었다.

천무백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허어. 점박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장가갈 놈들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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