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0화>
120. 약속 지키시오.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되지. 암, 안 되지.”
곽천후의 물음에 능허의 그리 대답했다.
하나 상황이 상황이니 대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제갈설아의 실종에 이어 천무백의 행방도 묘연하다.
혹여 습격당했을 때 협곡 밑으로 떨어진 거 아니냐는 의문도 생겼지만…….
“떨어질 양반이 아니지.”
능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진성단에서 미로가 무너질 때도 태연자약하던 양반이다. 그의 무위를 생각하면 허무하게 떨어질 리가 없었다.
“하면…….”
“비인색귀한테 잡혀갔다는 건데.”
“그게 말이 더 안 되잖아?”
능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열흘 전 있었던 습격.
숙영지를 덮친 검기의 주인은 아마 비인색귀일 확률이 높았다.
직후 천무백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비인색귀가 납치했을 가능성도 부정하지 못한다. 하나 그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그 양반이 납치당한다고?”
“비인색귀는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거야?”
“근데 단순 색귀라고 치기엔, 강하긴 했잖아?”
곽천후의 말에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숙영지를 덮쳤던 검기.
그저 악적으로 생각한 색귀의 수준이 아니다. 당장 여기 능허도, 곽천후도, 저기 벌게진 얼굴로 추적대를 지휘하는 제갈서후도.
그 누구도 뽐내지 못할 경지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능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양반이 납치당했다는 게 난 믿기지 않아.”
여기서 천유하와 허성을 제외하면 천무백과 가장 오래 지낸 사람이 바로 능허다.
아니, 각성 직후의 일을 떠올리면 능허만큼 천무백에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 능허가 느끼기엔 천무백은 그 대단한 천마가 와도 납치당할 양반이 아니다.
“어찌 됐든 여기 검왕곡에서 습격 직후 실종된 건 맞다.”
곽천후는 표정을 굳혔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제갈세가의 추적대와 그들이 고용한 무사들이 검왕곡에 바글댔다. 뿐이랴. 소식을 들은 천유하 역시 할 수 있는 건 모두 동원했다.
“반드시 찾는다.”
곽천후가 굳은 결의가 어린 얼굴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아니…… 뭐 나도 동감이긴 한데.”
능허는 그런 곽천후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 자식이 언제부터 그 양반을 그렇게 따랐다고.’
저 결의를 보라.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결심까지 느껴진다.
능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검왕곡까지 직접 행차해 표사들을 지휘하는 천유하가 보였다.
“쯧쯧.”
거, 이래서 젊은 게 좋구나.
능허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곽천후를 따라 곧장 움직였다.
“안개를 피하시오!”
“안개를 만나면 절정 이하는 모두 몸을 뒤로 빼시오!”
추적에 동원된 이들이 하나같이 그리 외쳤다.
천무백이 일전에 당부했듯, 검왕곡 곳곳엔 안개가 출현했다.
천무백의 경고는 이유가 있었다. 안개에 발을 들어선 순간 마치 미로에 빠진 듯 길을 잃게 됐다.
“무언가 진법 같은 건 아닙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방향감각이 상실되고, 그러다 보니 인지 능력까지 떨어지는 것이지요.”
제갈서후가 그리 말했다.
하여 절정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개를 피해야만 했다.
절정 고수도 혼자 들어가선 안 됐다.
적어도 2인 1조로 움직여야 누구 하나가 방향을 못 잡아도, 나머지 한 명이 도움을 줄 수 있던 터.
능허는 곽천후와 같이 안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 한 치 앞이 분간이 안 되는구만.”
능허가 그리 툴툴댔다. 하나 그의 눈초리는 날카롭게 안개를 꿰뚫어 훑었다.
“어?”
그때였다.
왼쪽을 향해 나아가던 곽천후가 멈칫했다. 안개 속에서 아른거리는 인영.
스릉!
곽천후와 능허가 동시에 검을 뽑았다.
이쪽으로 들어온 추적대는 곽천후와 능허 둘이다.
즉슨, 저 인영은 추적대가 아니었다.
‘극한의 음기다.’
곽천후의 눈이 부릅떠졌다. 능허 역시 음기를 느낀 듯 곽천후와 눈이 마주쳤다.
둘의 전음이 순식간에 오갔다.
‘그 양반은 아니야. 오히려 이렇게 기척조차 안 느껴질 터.’
‘두 명이다.’
‘한 명은 빙공의 고수인 거 같은데?’
‘빙공이라…… 추적대에 빙공을 쓰는 사람 있었나.’
‘없었지.’
‘젠장.’
검을 쥔 곽천후의 손에 핏줄이 두드러졌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쉬이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다. 특히 빙공의 고수는 상대하기 까다롭다. 아무래도 적일 확률이 농후했다.
곽천후와 능허의 시선이 서로 오갔다.
‘여차하면 바로.’
‘내가 왼쪽을 맡지.’
‘알았다.’
둘이 합을 맞춰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둘만큼 손이 잘 맞는 사람은 없을지도 몰랐다.
수도 없이 비무를 겨뤄 서로의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가 됐으니까.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고 위치를 잡는다.
그리고 안개가 점점 옅어지며 그림자가 뚜렷해지는 순간.
선공은 능허였다.
쉐에에에엑!
아찔한 파공성이 안개를 가르고 인영에게 쇄도했다.
까앙!
“……!”
능허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의 꼬챙이 같은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 한 번.
한 번의 찌르기가 막히고, 그 어마어마한 반탄력에 저도 모르게 검을 놓쳤다.
“미친…… 천후야! 우리가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다!”
능허가 급히 외쳤지만 이미 곽천후는 오른쪽에서 파고들고 있었다.
이내 이어지는 광경에 능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새하얀 손이 덜컥 곽천후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아찔한 광경에 능허는 그야말로 압도당했다.
비무를 겨루며 단 한 번도 제대로 유효타를 먹인 적 없던 곽천후가 저리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라니!
“내 인생, 여기서 조졌구나!”
절로 그런 탄식이 튀어나왔다.
한데 그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능허는 이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어? 주군?”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천무백이었다.
“이제 그냥 막 덤벼드네? 어디 한번 한 따까리 해 보자는 거지? 오냐. 한번 하자.”
“…….”
반가움보다 먼저 공포가 마음에 새겨졌다.
* * *
“고맙습니다.”
제갈서후가 그리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강호인들이 인사할 때 쓰는 포권지례가 아니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는 거의 극진한 인사였다. 주위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데, 정작 인사를 받는 천무백은 담담했다.
“계약했고, 계약을 이행했을 뿐이오.”
“설아에게 들었습니다. 악적이 단순한 색귀가 아니라 칠면염라라고 불리는 마인이었다지요.”
천무백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약속 지키시오.”
제갈서후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혈귀곡 추적에 있어 제가 세가로 돌아간 직후 직접 나설 예정입니다. 칠면염라 같은 과거의 마인들이 출몰하고 있는 상황이 과연 범상치 않습니다. 혈귀곡이란 놈들을 추적하는 데, 약속대로 본 세가도 돕겠습니다. 그게 강호의 도리니까요.”
제갈서후는 사실 혈귀곡 추적에 다소 미온적인 반응이었다.
천무백과 계약을 했다고 해도, 전심으로 제갈세가의 힘을 동원할 생각까진 없었다.
소림과 화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거기에 적당히 생색낼 정도만 도와줄 생각이었다. 적당히 체면치레할 정도로만.
하지만 제갈설아에게 사정을 듣고 상황이 바뀌었다.
‘감히 마인이 제갈세가를 노리다니!’
제갈설아를 납치한 놈은 한낱 색귀가 아니었다.
듣기로는 정마대전 때부터 살아온 절대의 마인이었으니, 이건 단순한 납치가 아니었다.
제갈세가를 직접 공격한 것이다. 적어도 제갈서후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제갈서후도 작금의 강호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혈귀곡의 출현부터 칠면염라라는 과거의 마인도 출현했다.
이대로라면 분명 큰 충돌이 생길 터.
차라리 화산과 소림에게만 일을 맡기기보단, 제갈세가도 직접 나서 한 축이 되는 게 오히려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제갈서후는 그리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제갈세가의 대공자란 위치는, 적어도 그만한 권위와 힘이 있었으니까.
그런 제갈서후의 단호한 약속에도 천무백은 다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거 말고.”
“…….”
이내 뭔가 깨달은 제갈서후가 입술을 깨물곤 말했다.
“복귀하는 즉시 인력을 청성표국으로 보내겠습니다. 약식 수가기문도를 곧장 설치하겠습니다.”
그제야 천무백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시오. 과거 무당이나 해남에 기문도를 설치해 준 것도, 다 그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랬던 것 아니오?”
“그렇긴 하오만…….”
“적어도 나중에는 당신의 선택을 잘한 선택이라고 여길 것이오. 청성표국과 나아가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이니까.”
그 말에 제갈서후는 입을 쩍 벌렸다.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제갈세가와 연을 맺은 청성표국이 훌륭한 거래를 했다고 세상 사람들은 여길 것이다.
한데 천무백은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있다. 본인과 연을 맺은 것을 훌륭한 선택이라고 말하다니.
제갈서후는 그 광오한 말에도 딱히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하긴. 어쨌거나 현재 강호에서 최고의 기재다. 설아의 말을 들어보면, 소문보다 더 대단한 무위를 지닌 게 분명해.’
창천검신 이후, 천하십대고수는 존재하나, 천하제일인은 세상에 없었다.
검존이 그나마 천하제일인이란 별호가 붙을 만하지만, 아직 마교에 과거의 천마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누구도 천하제일고수라 불리지 못하는 강호였다.
제갈서후는 천무백을 바라봤다.
‘이번 시대에 천하제일고수가 될 가장 유력한 자.’
그런 자와의 관계라.
제갈서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실소했다.
‘어쩌면 이자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제갈서후는 그리 생각하며 물러났다. 제갈서후가 물러나자 천무백에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제갈설아였다. 나오자마자 씻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어서 그런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눈매가 살짝 올라간 것이 전형적인 고양이상이었다.
“무슨 일이오?”
“고맙단 인사 드리려고 왔어요.”
“이미 들을 만큼 들었으니, 굳이 할 필요는 없소.”
제갈설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요. 제 목숨을 구명해 주셨고, 무림인으로서의 삶도 살려 주셨어요.”
그랬다.
단순히 칠면염라로부터 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천무백이 골수까지 뻗친 음기를 몰아내는데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제갈설아는 내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됐을지도 모른다.
제갈세가의 여식으로, 무림인으로서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녀에게 그 얼마나 치명적인 일이겠는가.
제갈설아는 그 점에 있어서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니 고마운 인사는 드려도 부족할 거예요. 지금껏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을 거예요.”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은혜를 갚는다는 데 그걸 굳이 만류할 이유가 있겠는가. 천무백이 멀뚱히 미소짓자, 제갈설아는 다소 망설이다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들었어요. 수가기문도를 설치한다고요?”
“그리 약속했소.”
“음…… 알겠어요.”
“……?”
“그러면, 조심히 가세요.”
제갈설아는 고개를 숙이곤 총총 걸으며 제갈서후의 곁에 합류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했던 대화에 천무백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천유하가 다가왔다.
“무백아.”
“네, 누님.”
“몸은 괜찮아? 일전보다 조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걱정 마세요. 잠깐 기연을 얻었으나, 아직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다만…….”
천유하가 그리 걱정할 만했다. 천무백은 검왕곡에 들어서기 전과 달라졌으니까.
핏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변한 피부부터가 걱정이 불쑥 들지 않는가.
하나 천무백은 담담했다. 극음지기가 단전에 꿈틀거리니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괜히 곽천후와 능허가 천무백을 빙공 고수로 오해한 게 아니었다.
하니 천무백은 표국으로 돌아간 직후 이 극음지기에 심력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이제 가시죠. 누님.”
“그래.”
천유하가 방긋 웃었다. 천무백도 마주 웃으며 말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