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19화>
119. 잘 탄다!
“······죽은 건가요?”
“이미 천명이 다한 나이요. 죽을 때가 된 거지.”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엔 단 한 점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제갈설아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무것도 못 들은 거로 할게요.”
그러자 천무백이 의외라는 듯 제갈설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금까지 천무백은 칠면염라와 문답을 마쳤다. 천무백은 필요한 정보를 얻을 만큼 얻어 냈다. 칠면염라로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리란 판단에 원하는 바를 전부 내어줬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들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은 사람을 빙정으로 만드는 것.
천무백이 극음지기를 다룬다고 해서, 당장 선천지기마저 태우고 있는 칠면염라를 살릴 방법을 어떻게 알겠는가.
좀만 깊게 생각하면 칠면염라도 천무백의 제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았으리라.
하나 이미 끝에 이른 수명과 흐려진 판단력에 칠면염라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천무백이 묻는 대로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곤, 결국 생을 다해 죽었다.
제갈설아는 문답을 지켜봤다. 한데도 그 안의 내용을 못 들은 척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왜요, 내가 죽일 거 같소?”
“······!”
제갈설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강호에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으로, 살인이 가장 유용한 방법인 건 누구나 알지 않는가. 하나 제갈설아는 굳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요. 공자께선 절 죽여 입막음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제가 들어서 좋은 얘기는 아니더군요. 저는 그런 어마어마하고도 무시무시한 일에 얽매이기 싫어요.”
“뭐, 못 들은 척 안 해도 되오. 어차피 그쪽 제갈세가도 얽히게 되어 있으니까.”
“네?”
“자세한 건 그쪽 오라비한테 물어보시오.”
천무백이 웃으면서 답을 일축했다.
그의 착 가라앉은 시선이 칠면염라의 시신을 향했다.
‘마류칠종의 화종은 혈귀곡과 상관이 없다는 건데.’
이리저리 캐내 봐도 확실했다.
화종은 혈귀곡과 연관성이 전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칠면염라와 혈귀곡은 아예 관련이 없었다.
혈종은 정마대전 이후 거의 맥이 끊겨 칠면염라를 비롯해 마인들이 몇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만도 했다. 정마대전때 가장 앞에서 싸운 놈들이 혈종 출신이니까.
하여 칠면염라도 자신 외에 화종 마인들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살아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들 중 일부가 혈귀곡에 가담했을 수도 있지.’
칠면염라는 혈귀곡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혈귀곡에 직접 가담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혈귀곡이란 단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화종이 가담하지 않았다면, 일단 암종 출신으로만 이뤄졌다는 것인데······.’
마류칠종 중 하나인 암종 하나만으로 이뤄진 세력.
그렇다면 무서워할 필요가 있는가?
천무백은 마류칠종 전부였던 천마신교와 싸우지 않았던가.
하나 그간 겪어본 혈귀곡의 저력이 문제였다.
‘비다라 같은 고대 비술을 복원하는 능력이나, 저기 서장의 십만대산에 처박힌 게 아니라 강호 전체로 암약하고 있지.’
그런 놈들이 바로 혈귀곡이다.
천무백이 괜히 정마대전 용사들의 후인들을 모아 정의맹을 창설하고, 소림과 화산, 그리고 종남까지 공동 전선을 펼치려하겠는가.
거기에 천무백은 이번에 제갈설아를 구하는 대가로 제갈세가도 여기에 끌어들였다.
천무백이 그리 행동하는 이유는, 과거 정마대전에 준하는 싸움이 발생하리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딱 혈귀곡 하나 때문이다.
한데 혈귀곡이 고작 마류칠종 중 암종 하나만으로 이뤄진 세력이라면?
‘그게 더 무서운 얘기인데.’
천무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고작 마류칠종 중 하나가 이만한 세력이라고?
더구나 암종이라면 천무백도 잘 안다. 과거 정마대전 때 가장 소수였던 세력이다. 그놈들만으로 혈귀곡의 저력이 이 정도라면, 만일 살아남은 나머지 여섯 개 종단이 힘을 합친다면?
“이해할 수가 없군. 다 작살났을 텐데.”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전생에서 지금까지.
40년의 공백 때문에 무언가 정보가 이어지지 않고 뚝 끊긴 느낌이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게 있나. 일단 혈귀곡 놈들은 다 족치는 거로 생각하자.’
이전 정마대전 때도 그랬다.
머리 쓰는 건 구파일방과 제갈세가였지, 자신은 그냥 닥치는 대로 싸웠으니까.
그게 속 편했다.
천무백은 그리 여기고 몸을 폈다.
“이제 나갑시다. 시간도 꽤 지났으니까.”
한데 제갈설아의 표정이 다소 좋지 않았다.
“먼저 가세요.”
“······?”
“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하곤 곧장 다가왔다.
“잠깐, 실례하겠소.”
“네?”
일전에 그랬듯 천무백은 거리낌 없이 손목을 휙 낚아채고 맥을 짚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제갈설아는 이전처럼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다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볼 뿐이었다.
“흐음. 이런, 골수까지 음기가 뻗쳐 있었군.”
천무백이 미간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그 말에 제갈설아가 놀랐다.
“골수까지요?”
설마 음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을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그저 내공을 운기하는 데 영 불편하다고만 느낀 것인데······.
“생각보다 몸이 음기를 잘 받아들이는 성질이군.”
“······.”
제갈설아는 문득 부끄러운 감정이 불쑥 들었다.
맥을 잡은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듯한 천무백의 어조에 부끄러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리라.
하나 그것이 도와주는 목적임을 잘 알았으니, 제갈설아는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보면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자신만 열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내공 운기가 제대로 안 될 거 같은데?”
“맞아요. 뭔가, 턱턱 막히는 기분이에요.”
“골수까지 파고든 음기 때문이오.”
천무백은 그리 말한 뒤 천장을 올려다 봤다.
“뭐 죽을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데. 적당히 치료받으며 몸 관리만 하면 나을 거요. 다만 여기선 좀 힘든데…….”
당장 제갈세가로 돌아가면, 그쪽에 있는 의원들이나 고수들이 제갈설아의 몸을 치료할 수 있다.
다소 많은 약재가 필요할 따름이다.
천무백이 물었다.
“나갈 수 있겠소?”
제갈설아가 천장을 올려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천무백에게 먼저 가라고 했던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천장까지 뛰어올라야 했기에 내공을 필수였다. 거기에 천장을 벗어난다고 해도, 한참을 절벽을 올라야 했다. 지금 몸 상태론 영 무리였다.
천무백도 그런 상황을 이해했다.
“하면 여기서 되는 대로 해 봅시다.”
“어떻게요?”
“음기를 몰아내기는 어렵소. 하면 양기를 주입해서 음양의 조화를 맞춰야지.”
“음양의 조화……?”
“어려울 건 없소.”
단어에서 느껴지는 묘한 어감에 제갈설아의 눈이 다소 샐쭉해졌다.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에 새빨간 홍조가 올라왔다.
때마침 천무백은 몸을 감싸고 있던 녹의장포를 휙 풀었다.
제갈설아의 눈꼬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뭐, 뭐예요!”
“말했잖소. 양기를 넣어서 일단 음양의 조화를 맞춘다고. 직후에 여러 약재로 치료해 가면서 음기를 빼내면 되오.”
“아니, 왜 옷을 벗어요?”
“그럼 이걸 입고 어떻게 하오?”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태연한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미친 거 아니야?’
음양의 조화?
그것들 보통 색마들이 무슨 채음보양이니 뭐니 할 때 하는 말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갈설아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누가 보면 경악할 광경이었다. 전형적인 차가운 얼굴의 제갈설아가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처음엔 다른 의미인 줄 알았건만, 천무백의 녹의장포를 풀어헤치는 걸 보니 확실했다.
제갈설아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야 물론…… 뭐 언젠간 나도…… 아니, 그래도 이런데서, 아니지!’
그녀는 눈을 치켜떴다.
그때였다.
휙!
“……?”
천무백의 녹의장포가 제갈설아의 몸을 휙 덮쳤다.
천무백이 입을 때도 전신을 보호할 정도로 큰 크기였으니, 비교적 작은 체구의 제갈설아를 완벽히 덮는 면적이었다.
순간 머리 위에서부터 전신에 녹의장포가 덮어지자 제갈설아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큰 눈을 끔뻑거렸다.
“뭐…… 예요?”
“양기를 밀어 넣어야 일단 음양의 조화를 맞추지 않겠소. 근데 얼굴이 빨개진 거 보니 양기가 돌아온 건가 싶기도 하고.”
“아, 아니, 지금 뭐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간단하오. 몸을 뜨겁게 만들어 줘야지.”
“네?”
화르르륵!
그때였다.
천무백의 손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삼매진화!’
고강한 내공으로 피워 내는 불길.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단순히 고수라고 다할 수 있는 잡기가 아니었다. 깊은 내공과 그걸 운용하는데, 섬세함이 필요했다.
한데 눈앞의 천무백이 삼매진화를 가볍게 피워 낸 것이다.
‘대체 어느 정도지?’
소문의 천룡검협의 무위도 훌륭하지만, 직접 목격한 천무백의 모습에 제갈설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그 혼란스러움은 황당함으로 뒤덮였다.
화악!
천무백이 불꽃을 그대로 제갈설아에게 던졌다.
“무, 무슨?”
뜨거운 열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간 훅 전해졌다.
화르르륵!
그녀를 덮은 녹의장포 위로 불길이 솟구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천무백이 흐뭇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알 탄다!”
“…….”
* * *
천무백의 방법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직 하단전을 완전히 내 통제에 둔 건 아니니.’
경천혼공을 잘 쓰면 그 안에서 양의 기운만 끌어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하단전의 극음지기다.
아직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선근경의 구절을 외울 때마다 흘러나오는 선기로 간신히 진정시킬 따름이었다.
괜히 양기를 넣는답시고, 저 극음지기가 은근슬쩍 파고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니 천무백은 단순한 방법을 생각했다.
“몸을 따뜻하게 만들면 되오.”
“그게, 저를 통째로 불태우는 거예요?”
제갈설아의 목소리가 다소 뾰족해졌다. 뭔가 뾰로통해진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천무백은 어조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그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녹의장포가 불꽃을 막아 줄 테니.”
실제로 녹의장포는 겉만 타고 있을 뿐이지, 불길이 파고들진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기운은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제갈설아는 덥다 못해 몸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웃차,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천무백은 녹의장포를 거둬들였다.
“이제 내공을 운기행공하면서 양기를 최대한 끌어내시오.”
“네.”
“아, 잠깐만. 썩 훌륭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약이오.”
천무백은 불현듯 떠오른 게 있는지 품을 뒤졌다.
이내 그의 손에 잡혀 나온 건 채가령이 전해준 보따리였다. 천무백은 보따리를 뒤져 내상약을 몇 개 꺼냈다.
내공의 흐름을 비교적 원활하게 해 주는 역할이니, 안 먹는 것보단 도움이 되리라.
한데 제갈설아는 내상약이 아니라 보따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군가 직접 공자의 성을 수실로 새겼네요. 섬세한 솜씨를 보아하니 여인인 것 같은데.”
보따리에 새겨진 천(天)자를 보고 한 말이었다.
“아, 맞소. 아는 소저가 줬소.”
“아는 소저요?”
천무백이 살짝 미소를 띄웠다.
그 모습에서 제갈설아는 묘한 불편함이 생겨났다.
하나 이어지는 말에 그런 불편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황당함이 솟구쳤다.
“내 증손녀처럼 여기는 애가 줬소.”
“…….”
제갈설아는 멍하니 천무백을 바라봤다.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얼굴이 저리 말하니 뭔가 자신이 한참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손녀면 손녀지, 또 증손녀는 뭐야?’
그런 의문도 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