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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18화 (118/318)

<검신재생 118화>

118. 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

어찌 보면 괴상한 광경이었다.

천무백, 칠면염라, 제갈설아.

셋의 관계는 독특했다. 한 명은 납치범이요, 두 명은 납치당한 사람이고, 그중 하나는 거짓으로 납치당한 척한 사람이다.

한데 그 셋이 서로 제각기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을 하는 모습은 꽤 이례적이다.

셋 중 가장 먼저 운기행공을 마친 사람은 제갈설아였다.

“…….”

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제갈설아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제갈설아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천룡검협…….”

천무백이 자신을 살렸음은 명확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온몸에 치미는 한기는 오장육부를 쥐어짜 내는 기분이다. 몸이 꽁꽁 얼어가는 과정을 시시각각으로 느낀 공포는 어땠는가.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이 정도로 고통을 느낀 것도, 공포를 느낀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이렇게 납치당해서 이런 꼴을 당한 적이 언제 있었겠나.

그것도 제 안방이었던 호북성에서 말이다.

“후우우…….”

제갈설아는 애써 울컥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도통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영민한 제갈설아의 두뇌로도 이해하기 쉽진 않았다만.

“저 사람이 아니면 죽었겠지.”

확실했다.

살지 못했으리라. 저기 칠면염라가 중얼거리듯 한낱 빙정이 되어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귀중한 생명을 한낱 빙정으로 만들어버린다니.

다시 떠올려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히려 그녀의 몸은 지금에 있어서 날아갈 듯 가벼웠다.

운기행공을 하며 제갈설아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내 내공하고 잘 맞을 수가 있지?”

보통 남의 몸에 기운을 흘려보내 준다는 건, 같은 심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양해야 한다.

아무리 같은 정종무학이라고 해도, 같은 심법이 아닌 이상 기운의 성질이 다른 탓이다.

한데 천무백의 경천혼공은 몸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외려 기연을 만난 듯, 내공이 한층 균일해지고 정순해졌다.

제갈세가의 내공심법도 정종무학 중에 정순하기로는 유명하다.

물론 무당과 소림, 화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갈세가는 나름의 특색 있는 내공심법을 보유해 왔다. 명색의 오대세가가 아닌가.

한데 지금은 더한 발전을 이뤘다.

“기연…….”

제갈설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건 단순히 목숨을 구명해 준 은혜가 아니다.

무림인에게 있어 기연을 전해 준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무림에서 얽힌 은원은 원한이든, 은혜든 어찌 됐든 갚아야 했다.

그것이 강호의 도리가 아니던가.

제갈설아는 대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고민하며, 조용히 천무백을 살폈다. 저도 모르게 천무백의 얼굴을 분석하듯 하나씩 뜯어봤다.

호기심과 묘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 본인이 자각하지도 못한 채 천무백에게 향했다.

한데 그때였다.

천무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갈설아가 급히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끄응…….”

천무백은 침음성을 흘리며 하복부를 내려다 봤다.

하단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

경천혼공의 가볍고도 중후한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날카로운 얼음송곳 같았고, 묵직하게 차가웠다.

다행히도 잠잠했다. 천무백이 의지만 가지면 하단전에 있던 극음지기는 금세 웅크린 몸을 일으켜며 포효를 내질렀다.

“몇 년 공력인지 감조차 안 잡힐 정도군.”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그의 목소리엔 다소 피로함이 묻어났다.

경천혼공을 이용해 극음지기를 제압하는 과정.

“선기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뒷골이 서늘해지고 머리칼이 절로 쭈뼛섰다.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선 늘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천무백은 위기를 감수하고 만년월단을 목 뒤로 삼키는 선택을 택했다.

‘경천혼공이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경천혼공을 과대평가한 건 아니다. 경천혼공의 포용력이라면 응당 극음지기도 버텨 내리라 생각했다. 당연했다. 지금까지 경천혼공은 늘 천무백의 예상을 벗어나는 힘을 보여 줬으니까.

한데 입속으로 삼킨 게 만년월단일 줄은 몰랐다.

‘화종 놈들이 만년월단을 제조한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설마 그걸 자신에게 먹일 줄이야.

하긴, 칠면염라는 천무백을 천신지체라고 오해했다. 즉 극음지기를 넣으면 넣는 대로, 그대로 빙정이 되는 셈이라고 여겼다.

하니 만년월단의 극음지기라면, 선천지기마저 불태우며 타오르는 극양지기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화종 놈들이 늘 그런 식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해 왔지.’

젊은 시절 화려하게 타오르는 무위를 지니게 해주지만, 노년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그 불길이 생명을 잡아먹는다.

화종 무공의 특성이다.

화종 마인들은 그걸 이겨 내기 위해 여인들을 빙정으로 만들어 흡수해 오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런 와중에 만들어진 게 바로 만년월단이고.

‘어마어마했다.’

만일 경천혼공이 상단전이 아니라 하단전의 심법이었다면?

극음지기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으리라.

상단전을 억지로 개통해서 극음지기를 밀어 넣는다고 해도, 불확실성이 너무 뚜렷했다. 그 어마어마한 한기가 두뇌에 파고들면 머리가 얼어붙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우연과 기적이 겹친 일이었다.

경천혼공은 상단전에 있어 하단전은 비었고, 그곳에 극음지기를 밀어 넣을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경천혼공의 부족한 힘을 선근경이 만들어 낸 선기가 보태 줬다.

‘기연이다.’

크나큰 위험을 감수할수록, 성공한다면 얻는 과실이 더욱 달콤한 법.

기연을 얻었다. 천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단전이 웅웅되며 진동했다. 백회혈이 활짝 열리고 경천혼공의 공력이 요동쳤다.

동시에 하단전이 꿈틀거렸다.

배꼽부근이 차가워지더니 이내 극음지기가 기경팔맥을 질주했다. 그 곁을 경천혼공이 함께했다.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운이 맥을 타고 흐르는 괴이한 광경.

그것이 어찌 가능할 수 있는가.

오로지 선기였다.

경천혼공에 덧씌워진 묘한 선기가 두 가지 기운의 공존을 성립시켰다.

천무백은 최선을 다해 선근경의 구절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것만이 두 가지 기운이 공존할 수 있는 현재 유일한 방법이니까.

“어찌 됐든…….”

천무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단전의 극음지기.

상단전의 경천혼공.

그 사이를 연결해 주는 선근경의 선기.

천무백의 몸속에 세 가지 기운이 교묘하게 서로 얽혀들었다.

강호 역사상 그 누구도 밟지 못한 영역.

천무백은 그 영역 위에 올라섰다.

‘물론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천무백은 일단 이걸로 만족했다. 어차피 곧 표국으로 돌아갈 터이니,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되짚어보면 된다.

그때였다.

“저기요.”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꽂혔다. 제갈설아였다.

“좀 나아진 것 같구려.”

“살려주신 것 고마워요. 그런데……혈도도 풀어주지 않으실래요?”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공 금제 풀리지 않았소?”

“네. 풀렸어요.”

“그럼 혈도 안 푸시고 지금까지 그렇게 앉아 있던 거요?”

“…….”

제갈설아는 침묵했다.

말이 쉽지, 내공을 이용해 짚인 혈을 푸는 건 절대로 쉬운 공부가 아니다.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혈도를 풀었다. 순간 제갈설아의 몸이 휘청였다. 며칠을 똑같은 자세로 혈도가 짚힌 상태였다. 몸이 굳어 있다가 풀렸으니 제갈설아의 의지대로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휘청이는 몸을 때마침 혈도를 푸느라 옆에 있던 천무백이 부축했다.

“……!”

“천천히 기운을 전신으로 밀어 넣어서 감각을 깨우시오. 머릿속에서 인지하는 감각과 실제 감각이 지금 다소 차이가 있어 제멋대로 안 움직이는 것이니까.”

“……네.”

제갈설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허리춤을 휙 감싼 천무백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구명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 비인색귀가 저에게 무언가 하려 했을 때, 나서서 구해 주셨잖아요. 아니, 여기까지 들어온 것도 저를 구하러 온 일념이었으니, 애당초 공자가 아니었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제갈설아의 목소리는 다소 떨렸지만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은 아닌데.’

굳이 따지면 제갈서후와 계약해서 수가기문도를 설치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바로 저 칠면염라.

마류칠종의 화종을 맞닥뜨렸으니, 저들이 혈귀곡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니 제갈설아는 단단히 오해했다.

마치 자신을 구하려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사람처럼 쳐다보지 않는가.

하나 천무백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일부러 납치당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제갈세가 놈들이면 이 자식을 당장이라도 요절내려고 하겠지.’

귀하디귀한 여식을 납치한 놈이니, 요절을 내려고 할 게 분명하다.

천무백으로선 역설적으로 칠면염라의 죽음을 막아야 했다. 일단 잡아놓고 정보를 캐내야 했으니까.

천무백은 시선을 돌렸다.

칠면염라의 등은 마치 꼽추처럼 깊게 굽혀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탈색되다 못해 숭숭 빠졌고 얼굴은 주름살이 그득해 이목구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온몸에 피어난 검버섯을 보면 마치 관에서 걸어 나온 시체를 보는 듯했다.

불과 반나절.

그 시간 사이에 급격하게 늙어 버렸다.

하나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지금껏 여인을 납치해 오며 빙정으로 만들어 수명을 연장한 효과가 있으니, 당장은 죽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잠깐일 뿐이다. 이젠 정말 막바지다.

“어째, 숨 쉬는 건 괜찮나?”

번쩍!

칠면염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노오옴……!”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불길이 솟구치는 듯했다.

“여어, 너무 열 내지 마. 또 탄다. 타.”

명백한 조롱이다.

하나 칠면염라는 무어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젊은 시절 그토록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던 극양지기가, 지금은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있다니.

“네놈만큼은 반드시 찢어 죽이겠다!”

“내가 죽으면 넌 못 살아.”

“……!”

당장 운기행공을 끝내고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려던 칠면염라의 몸이 순간 굳었다.

천무백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칠면염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내 몸엔 만년월단의 극음지기가 그대로 있지. 이걸 이용하면, 그쪽의 선천지기를 태우는 불길을 조금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빙글빙글 웃는 웃음을 보고 칠면염라는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당장이라도 이놈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격렬함.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건, 이 육신의 노쇠를 이겨 내고 더 살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그의 경지는 더 오를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극양지기의 불길을 한번 잡으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시간,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리된다면?

당장 이 눈앞의 건방진 애송이를 찢어 죽일 수 있다.

천무백의 말뜻.

그가 왜 모르겠는가.

거래다. 이건 거래였다.

저놈은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칠면염라는 목소리를 낮췄다.

“무얼 원하나? 무얼 줘야 내 삶을 이어 주겠는가?”

천무백이 씩 웃었다.

“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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