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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15화 (115/318)

<검신재생 115화>

115. 아니, 나도 잡혔소!

“걱정 말거라, 아해야. 날 색귀라고 칭하지만, 색을 즐기지는 아니한다. 더구나 남색은 더더욱.”

칠면염라는 그리 말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솥뚜껑 같은 큼직한 손아귀에는 천무백이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천무백의 덩치는 크지 않고 선이 유려한 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잘 짜여 있기에, 제법 무게가 나간다. 한 손으로 들고 경공을 펼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칠면염라는 단숨에 난입하여 천무백의 혈도를 짚고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도 추적대 중 누구도 눈치 못 챘으니, 칠면염라가 왜 지금껏 추적대에게 한 번도 안 잡혔는지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천신지체라. 참으로 좋은 몸이구나. 흐흐. 조금만 참아라. 곧 대법을 준비할 터이니.”

천무백을 내려다보는 칠면염라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강렬한 욕망이었다.

탐나는 건 반드시 쟁취해 내겠다는 지독한 의욕도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천신지체가 맞았다. 겉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내력. 그러나 묘하게 느껴지는 선기. 흡사 그것은 검왕곡에 가득한 대자연의 기운과 유사하지 않은가.

천신지체가 분명했다.

그런 흥분에 휩싸인 칠면염라는 보지 못했다.

천무백이 놀랄 정도로 침착하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칠면염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협곡 사이로 미친 듯이 이동하던 칠면염라는, 점점 좁아지는 협곡의 가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끝내는 아주 작은 구멍만이 보였다. 고작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까 싶은 구멍이었다.

칠면염라는 웃음을 흘리며 천무백에게 말했다.

“가서 조금만 기다리거라. 얼굴 반반한 계집애도 있으니 영 외롭진 않을 거다.”

철면수라는 그 구멍 안으로 천무백을 던졌다.

* * *

꽝!

제갈설아는 출구라곤 천장의 구멍밖에 없는 이곳에서 진작 바깥에서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한데 위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자 이내 놀란 눈을 떴다.

칠면염라인 줄 알았건만, 웬 청년이 뚝 떨어진 게 아닌가.

위에서 칠면염라가 웃는 소리가 점점 멀어질 때쯤.

청년은 바닥에 잠시 누워 있다가, 이내 별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다 한쪽에 머무른 제갈설아를 봤다.

잠깐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힐 때. 천무백이 불쑥 물었다.

“그쪽이 제갈세가의 여식이오?”

“마, 맞아요!”

제갈설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휴, 드디어 찾았군. 이런 데에 있었으니 못 찾았지.”

청년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리 중얼거렸다.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울컥 무언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그녀가 언제 이렇게 차가운 곳에 납치당해서 방치당했던 적이 있던가. 그것도 비인색귀라는 끔찍한 멸칭으로 불리는 자에게 말이다.

매번 끔찍한 일을 당할까 염려했고, 또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여기서 울면 얼마나 꼴불견인가.

여자가 울면 아름답다고 하지만, 제갈설아는 그리 생각지 않았다.

여기 갇혀 있어 제대로 씻지도 못해 눈물을 흘리면 마치 구정물이 흘리는 것 같으리라.

제갈설아는 애써 참고 기쁜 낯으로 말했다.

“누구시죠?”

“어, 천룡검협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소.”

천룡검협!

제갈설아도 그 명성을 익히 들었다. 근래 강호를 진동시키는 그 별호를 모르는 자가 누가 있을까.

제갈설아도 천룡검협의 강호행에 자못 감동하지 않았던가. 애써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나마 그 행보를 응원하기도 했었다.

한데 그 사내가 구하러 오다니!

심지어 외모도 과연 소문대로였다.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기쁜 낯으로 소리쳤다.

“역시, 천룡검협이시군요! 여기까지 구하러 오셨군요!”

하나 이어지는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나도 잡혔소.”

“…….”

“거, 대롱대롱 매달려서 왔더니 몸이 찌뿌듯하구먼.”

태연하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는 천무백 모습을 보며, 제갈설아는 한참이나 말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머릿속에서 천무백의 말을 조합한 그녀는 간신히 물었다.

“그쪽도…… 잡혀 왔다고요?”

“그렇소. 그쪽 오라버니를 도와 추적을 해 왔는데, 자는 사이 저 노인네가 납치했소.”

“……하.”

제갈설아는 무언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달아올랐던 감정이 확 가라앉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불길함이 스쳐갔다.

저 대단한 천룡검협도 잡혔다고? 비인색귀가 그만한 고수였단 말인가?

하면 오라버니가 날 구할 수 있을까.

구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지금쯤 직접 나서서 움직이고 있을 거다.

하나 그전에 비인색귀가 무슨 짓을 저지른다면?

그 끔찍한 상상에 제갈설아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잡혀왔다는 천무백은 제갈설아를 신경도 쓰지 않고 무언가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천무백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더 깨끗하고 새하얀 피부와 유려한 선. 우락부락한 근육의 거구를 생각했던 제갈설아에겐 의외의 모습이었다.

훤칠한 미공자가 아닌가.

머리를 길게 땋아서 그런지 멀리서 보면 얼핏 여자처럼 보일 정도로 선이 유려했다.

그러고 보니.

“왜 당신을 납치했죠?”

제갈설아는 그게 의문이었다. 지금껏 비인색귀는 여자만 납치하지 않았던가?

하여 색귀라는 멸칭까지 붙인 게 아니던가.

근데 왜 뜬금없이 남자를?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가자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냉소가 흘러나왔다.

“하! 날 건드리지 않았던 게, 남색가여서 그랬던거야?”

“뭔 소리요?”

“비인색귀 말이에요. 절 납치하고도 지금까지 손도 안 댔거든요.”

“그게 어째서 남색가란 결론이 나오는 거요?”

“자신의 성 취향을 깨달은 거죠! 어떻게 나 같은 여잘 두고 부처님처럼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남자를 잡아 오겠어요?”

“…….”

천무백은 침묵한 채 제갈설아를 빤히 쳐다봤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한 듯한 어조였다.

그만큼 자신의 미색에 자신 있다는 의미겠지.

하나 천무백은…….

“지금 땟국물이 얼굴에 잔뜩 있고, 머리칼에도 기름이 떡져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공감할 수가 없소.”

화악!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뭐예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오.”

“하! 내가 제대로 씻지 못해서 그런 거지. 호북제일미 몰라요?”

“알고 있어야 하오?”

“아니, 모를 수가 있나…….”

“하남출신이라 모르오.”

“…….”

제갈설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언가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벽창호를 두고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끝내 고개를 돌림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피력했다. 물론 천무백이 그 모습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줄 리가 없었다.

천무백은 연신 무언가를 찾는 듯 기웃거렸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며칠 만에 만난 사람이고, 어쨌든 자신을 구하려던 추적대의 사람이었다. 더구나 근래 가장 명성 높은 천룡검협이 아닌가.

그녀는 치미는 호기심에 고운 미간을 좁혔다.

“뭐 해요? 뭐 찾아요? 출구 찾아요? 출구는 저 위에 구멍밖에 없어요.”

“…….”

“안 그래도 이십 장 높이에요. 웬만한 고수여도 절벽을 타고 올라서 저 구멍으로 못 나가요. 하물며 나나, 당신이나 지금처럼 내공이 금제 당한 사람이면…… 잠깐만.”

제갈설아는 별안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당신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죠?”

그랬다.

칠면염라는 주도면밀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추적당하지 않게 모든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제갈설아가 저 구멍으로 빠져나갈 정도로 내공이 강대하지 않음을 알고도 점혈을 짚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뿐이랴. 내공에도 금제를 가해 놨다.

한데 천무백은 처음 왔을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여 의문에 답했다.

“그야 일부러 잡혀 왔으니까 그렇지.”

“네? 무슨 소리에요?”

똑똑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때, 예상되는 답변을 미리 생각해 놓는다.

하나 예상범위에서 벗어나는 대답이 나오면, 찰나지만 당황하기 마련이다.

지금이 그랬다.

“일부러 잡혀 왔다뇨?”

“그야 더는 추적할 길이 없어 막막했소. 검왕곡에 들어선 직후부턴 흔적이 아예 없더군. 경공으로 훨훨 날아 협곡 사이로 들어왔으니 그런 거겠지만……. 뭐 하여튼 별수 있나? 직접 잡혀 올 수밖에.”

“……!”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천무백의 말뜻을 이해했다.

일부러 잡혔다.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서.

그렇다는 건, 칠면염라를 속였다는 뜻이다.

“혈도를 푸신 거예요?”

“그거야 쉽소. 적당히 내공을 운기하면 그만이니.”

제갈설아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쉽다고?

나흘째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나는 뭔데?

그런 의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천무백은 연신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넋을 놓고 있는 제갈설아에게 시선을 멈췄다.

자신을 뻔히 쳐다보는 시선에 제갈설아는 당황했다.

“왜, 왜요?”

“그 노인네가 아무 짓도 않았소?”

“그,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혈만 짚고 그냥 내버려 뒀어요.”

“진짜 아무것도?”

“왜, 왜 그래요? 그렇게 이상한 말만 하지 말고, 내 혈도 좀 풀어줘요.”

천무백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제갈설아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손을 뻗어 덜컥 제갈설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잠시, 실례하겠소.”

“……!”

제갈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평생 살면서 외간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아챈 적이 있던가.

조부의 끔찍한 사랑 때문에 세가를 벗어나본 적도 몇 번 없는 그녀가 아니던가.

당황하여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무심한 듯 강렬한 천무백의 눈빛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버버하다가 그 꼴이 퍽 우습게 느껴져 제갈설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천무백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갈설아의 맥을 짚었다.

“흐음, 제갈소저.”

“네?”

“뭘 드신 게 있소?”

“……어, 아니요.”

“어쩐지 기가 허하군. 아예 아무것도 안 먹었소?”

“그어, 늙은이가 이상한 단약을 줘서 매일 같이 하나씩 삼켰어요.”

그러자 일순 천무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운 이 공간이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깨끗한 미소였다. 제갈설아도 순간 멍때리고 볼 정도였다.

“그랬군. 사람을 통째로 빙정으로 만드는 거였어. 하. 이러니 못 찾았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갈설아에게 말했다. 퍽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대로 있으면 당신 죽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앞뒤 맥락 다 잘라 버리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요?”

그러자 천무백이 큰 눈을 끔뻑였다.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왠지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생기지 않아서였다.

“꽁꽁 얼어 죽거나, 완전히 불타서 죽거나. 둘 중 하나요.”

“아니, 앞뒤 맥락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제갈설아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저리 쉽게 하는가.

“뭐, 걱정하지 마시오. 그쪽 오라비한테 살려 보낸다 했으니까.”

담담한 어조였지만 묘한 확신이 생기는 목소리였다.

천무백은 그리 말한 뒤 곧장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주위로 내공이 휘몰아쳤다. 제갈설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공의 금제마저 풀려있다니.

하나 그때였다.

저 멀리서 칠면염라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무백이 쓰읍하곤 혀를 찼다.

“일단 상황 좀 지켜봅시다.”

그렇게 말하더니 천무백은 자신이 떨어진 지점으로가 그대로 쓰러졌다.

마치 위에서 떨어진 자세 그대로.

“…….”

제갈설아는 빤히 그 모습을 보며 침묵했다.

‘대체 뭐야.’

눈빛에 혼란스러움이 어렸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이내 칠면염라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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