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14화 (114/318)

<검신재생 114화>

114. 검왕곡에서.

강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수는 흐르는 물처럼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검왕의 이름은 강호 역사에 뚜렷이 남았다.

당시 정마대전 같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무림의 평화기임을 떠올리면, 유난한 일이다.

하나 강호에 이름이 뚜렷한 이유는 분명했다.

다른 시대였으면 능히 천하를 제패할 제일고수가 동시에 둘이나 출현했으니까.

팔선 중 하나로 알려진 검선 여동빈과 검왕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만한 인물이 한 시대에 태어나는 일도 놀라운 일인데, 둘이 동시에 태어나 맞수로서 천하제일을 다퉜다.

하여 그 시기를 일선일왕(一先一王)의 시대라 불리었다.

둘의 발자취를 쫓는 후인들의 노력은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검왕곡이라니!”

“여기가 정말 검왕곡이란 말이오?”

“검왕과 검선의 비무를 그린, 당대 제일 화가인 천필화백의 검곡도(劍谷圖)속 협곡 모습과 일치하지 않소이까?”

“……!”

무사들은 흥분에 찬 얼굴로 떠들었다.

검왕이 말년에 머물렀다는 검왕곡.

몇 번 강호의 명숙들이 검왕곡을 찾았다고 했지만, 실제 그 위치를 정확히 공개한 적은 없다.

검왕의 흔적이 남은 검왕곡에 중인들이 방문하여 망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허어…….”

“하긴, 처음 검왕곡을 발견했다고 소문을 냈던 사람이 무당 쪽 인물이었지.”

“호북에 있었군.”

무사들이 흥분에 찼지만.

천무백은 다소 상념에 빠졌다.

‘여길 또 오게 되는군.’

천무백이 검왕으로 살던 삶.

그때 삶의 막바지,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었다.

‘그때는 뭘 그리 조급했었는지.’

별안간 웃음이 튀어나왔다. 여동빈이 먼저 우화등선해버렸단 소식을 듣고, 한참 여기에 처박혀서 참선에 빠졌었지.

여하튼 천무백은 검왕곡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강호인들에게 정확한 위치가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지, 아는 사람은 아는 장소였다.

추적을 피해 숨어들기에 적당한 장소였으니까.

이미 이 숲에 들어선 순간부터, 천무백은 이곳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갈세가가 총력을 기울이는데도 찾지 못한다는 건, 상대가 검왕곡에 숨어들었음을, 천무백은 이미 짐작했다.

검왕곡은 마음만 먹으면 모습을 완벽히 감출만한 장소였다.

끝 모르게 바닥을 향한 깊고 깊은 절벽.

협곡 사이의 절벽은 그야말로 깊고, 장엄했으며 끝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득히 검게 보일 정도였다.

“과연, 이곳에 숨어들면 쉬이 찾을 수가 없겠어.”

곽천후는 검왕곡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부터 각별히 조심해야 해.”

천무백이 답지 않게 신중하게 말하자 곽천후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들과 표사들 역시 천무백의 말대로 신중히 추적을 개시했다.

그들에게 천무백은 몇 가지 주의점을 당부했다.

“안개가 보이면 피하시오.”

“……안개를 피하라고요?”

“하여튼 피하시오. 그리고 땅을 밟을 땐 무조건 나무나 지팡이나 하여튼 뭐든 한 번씩 두드려 보시오.”

“대체 무슨…….”

이해 못 하는 이들에게 천무백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죽기 싫으면 말이오.”

순간 정색하는 천무백에 무사들은 모두 몸이 싸늘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표사들은 어느새 천무백의 말이라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따랐다.

우두머리인 허성부터 기존 표사들은 물론이고, 천무백이 집을 떠난 이후 들어온 이들도 이젠 천무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놀라웠으니까. 다들 하나같이 명성이 헛되지 않았구나! 여길 따름이었다.

하나 제갈세가 측엔 간혹 천무백의 말을 무시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여지없이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콰득!

“끄아아아아---!”

“젠장!”

“또!”

몇몇 무사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단단한 바위처럼 보여도 모래처럼 바스러져서 왕왕 무너져 내리는 부분이 있었다.

천무백은 협곡을 이루는 바위 중에 유난히 내구도가 약한 부분이 있음을 익히 알고 경고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사고 끝에 희생자가 발생한 이후엔 더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천무백을 감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착실히 그의 말대로 따랐으니까.

“이거 시간 종일 걸리겠는데요?”

능허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만큼 검왕곡은 넓었다. 또 천무백의 경고대로 조심하면서 수색해야 했기에 시간은 더욱 소모됐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

“별수 있나. 여기서 숙영해야지.”

아마 이 안에 있을 거다. 천무백은 거의 확신했다.

천무백은 제갈서후를 바라봤다. 마침 제갈서후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비록 제갈서후는 천무백의 협상 이후, 그를 불편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강렬한 믿음이 눈빛에 묻어났다.

어쩌면 천무백이라면 제 동생을 찾아내리라 여기는 것이리라.

천무백은 그런 믿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직은 살아 있을 거다. 아직은.’

자신이 아는 그것이라면 말이다.

* * *

비인색귀는 이를 악물었다.

“돌아버리겠구나. 저 애송이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지?”

그의 스산한 눈빛이 불을 피우고 숙영 준비를 하는 추적대에 향했다.

처음엔 우연히 이곳을 찾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비인색귀는 그 생각을 지웠다. 저들은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모든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

비인색귀가 어디 한두 번 쫓겨보겠는가.

그의 새하얀 수염이 한차례 불어오는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몇 번이고 강호공적으로 몰려 쫓겼다. 그때마다 비인색귀는 통쾌하게 추적을 뿌리쳤다. 지금은 비인색귀란 멸칭으로 쫓겼지만, 과거엔 달랐다.

그의 이름을 듣고 쫓아오는 이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정예 무사들이었으니까.

“이 칠면염라(漆面閻羅)를 고작 애송이들이 쫓아오다니.”

칠면염라.

정마대전 이전부터 존재해 온 노괴이자, 한때 구파일방의 천라지망까지 돌파해 냈던 전설을 가지고 있는 그가 바로 비인색귀의 진실한 정체였다.

“끄응!”

“흥. 왜요? 이제 조급한가 보죠? 지금이라도 당장 풀어 주는 게 좋을 거다!”

“닥쳐라!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가만 안 두겠다!”

그런 그를 뒤에서 조롱하는 뾰족한 목소리.

다소 피로가 쌓이고 옷에 먼지와 이물이 묻었지만, 미색을 잃지 않은 제갈설아였다.

제갈설아는 혈도를 짚어 몸이 꽁꽁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왜? 혈도라도 짚어서 입 다물게 하려고요?”

“이 빌어먹을 제갈 씨의 계집애가! 입을 찢어버리겠다!”

광폭한 기세가 쏟아져나오자 제갈설아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암코양이처럼 날카로운 성정을 지녔다고 한들,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눈치 없이 굴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애당초 처음엔 설설 기지 않았는가.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후우. 도대체 이 노인네, 날 갖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칠면염라에게 잡혔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

좌절감과 경악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능욕을 당하리라는 좌절감. 또 칠면염라의 수준이 예상과는 달리 아득히 높은 수준이라는 충격.

제갈설아는 영민하게 행동했다. 바싹 기어서 칠면염라의 비위를 맞춰 줄 요량이었다.

의외로 칠면염라는 소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제갈설아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두 눈에는 음욕도 없었다. 단지 이상한 단약을 먹이고 가만히 내버려 둘 따름이었다.

이쯤 되자 당장 칠면염라가 본인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제갈설아는 여러 방면으로 칠면염라의 성정을 건드려 봤다.

때론 사근사근한 태도를 유지했고, 때로는 방금처럼 날카롭게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하나 칠면염라는 분노를 토할지언정 선을 넘지 않았다.

‘대체 뭘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제갈설아의 영민함으로도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다행히도, 그사이 제갈세가의 추적대가 근방까지 도달했다. 기쁨도 잠시, 제갈설아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졌다.

추적대가 근방까지 도달했으니, 칠면염라가 여차하여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잔뜩 경계 어린 시선으로 칠면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갈설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흐음.”

반면 칠면염라는 제갈설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안력을 돋궈 수색대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풍추쌍오, 저 두 놈 때문인가?”

추적의 대가, 풍추쌍오.

이내 칠면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저 애송이한테 의지하고 있어.”

그의 눈썰미는 금세 추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천무백임을 알아봤다.

칠면염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지켜볼수록 입가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뭐지? 저놈?”

거리가 멀어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천무백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놀랍게도 칠면염라는 이 먼 거리에서 여타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천무백의 공력을 분명하게 느꼈다.

“저들 중에선 제일 강한데?”

칠면염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 놈이 몇몇 보였다. 저 정도라면 후기지수들 중에서 제법 한가락하는 놈들이리라.

한데 천무백은 달랐다.

“이거야 원. 누가 키운 거지? 누가 저만한 놈을 키운 거야?”

칠면염라는 자신이 쫓기는 중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연이어 감탄했다.

누구도 제대로 파악 못 한 천무백의 무위를 그는 멀리서나마 간접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천무백의 수준에 경악을 터뜨릴 정도로, 칠면염라 역시 본인의 무력이 막강함을 증명하는 바였다.

“이상하구나. 참으로 이상해! 겉으론 전혀 내력이 느껴지진 않으나, 분명하다. 어마어마한 고수다.”

칠면염라는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 무력이라면, 아무리 숨기려고 노력해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내력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칠면염라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그 부분에서 혼란을 느꼈다.

“내공을 숨기는데 타고난 고수인가? 이 칠면염라를 헷갈리게 할 정도로?”

절정을 넘어선 입신지경.

이미 오래전 그 경지에 발을 걸친 칠면염라였기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고작해야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 애송이다.

그 정도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마 과거의 창천검신이 어렸을 때나 저랬을까.

검존도 저러지 못했다.

그 순간, 별안간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

“혹시 천신지체인가?”

천신지체.

대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천신지체. 몸안에 내공을 쌓지 않아도 대자연 자체를 단전으로 사용하는 신체. 그 단어가 연상되자 칠면염라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지금껏 저 애송이들에게 추적이나 당하면서까지 여자들을 납치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대계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던가.

한데 천신지체라면, 성별에 상관없이 칠면염라에게 가장 필요한 바였다.

“이거야 원. 궁하면 된다더니.”

칠면염라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재빠르게 궁리했다.

“어차피 저놈이 추적 책임자로 보이니, 저놈만 없으면 저 애송이들도 쫓아오지 못할 테고, 이거 일거양득이구나!”

칠면염라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제갈설아는 그런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쐐애애애애액!

숙영지를 차리고 경계를 세우고 잠이 들었던 추적대들은 귀를 파고드는 파공성에 벌떡 일어났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강렬한 파공성.

파공성에서 느껴지는 위험.

곽천후도, 능허도, 제갈서후도 벌떡 일어났다.

“습격이다!”

곽천후가 가장 먼저 그리 소리쳤다.

달빛만이 스며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월형의 푸르게 타오르는 검기가 숙영지를 덮쳤다.

꽈아아아앙!

“우아악!”

“피해라! 당장 기어 올라가!”

검기는 숙영지 위를 덮친 게 아니다. 숙영지를 차린 협곡의 밑 부분.

밟기만 해도 으스러지는 내구도가 약한 부분. 정확히 그곳을 노리고 검기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쿠구구구구구!

협곡이 무너져 내렸다. 무사들은 재빨리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몸을 던졌다.

“이 미친…….”

“비인색귀인가?”

“비인색귀가 이만한 무력의 소유자란 말이오?”

다들 벌어진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만일 벌떡 일어나 도망치지 않았으면 저 협곡 아래로 영영 묻혔으리라.

“어휴. 뒈질 뻔했네.”

능허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어?”

“왜 그래?”

곽천후가 정신 사납게 고개를 휙휙 돌리는 능허를 보고 미간을 확 좁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곽천후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다.

하나 그도 이내 능허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데.

“주군이…… 안 보이는데?”

“응?”

곽천후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무백이, 없다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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