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13화>
113. 눈이 옹이구멍이냐?
협상은 타결됐고 계약은 성립됐다.
대신 제갈세가와 황궁에 설치된 것이 아닌, 무당파와 해남파에 설치된 약식, 수가기문도였다.
진짜 수가기문도는 제갈서후 선에서 결정할 수 없었다.
천무백도 애당초 거기까지 노리진 않았다. 진짜 노렸던 건 처음부터 약식이었다.
수가기문도가 얼마나 중요한 보물인지 잘 알고 있다.
하나 약식은 다르다.
이미 무당파와 해남파에 설치된 전례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설치할 만했다.
한편으로는 천무백은 이번 일을 진지하게, 또 심각하게 여겼다.
‘진실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데.’
한낱 표국에 약식이라 해도 수가기문도를 설치해 줄 만큼 도움이 절실하단 의미였다.
또, 그만큼 제갈세가가 비인색귀를 추적하는 데 여간 곤란하단 의미였다.
천무백도 이번 일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확답을 준 건 아니었다.
천무백의 머릿속에 조금이나 짐작되는 바가 있어, 크게 마음먹고 도박수를 던진 셈이다.
“여기 비인색귀에게 당한 피해자의 시신입니다.”
천무백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쟁자수들은 도심을 돌면서 소문을 수집했고, 천무백은 허성 이하 표사들을 이끌고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건 피해자의 시신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아홉 명의 피해자중 시신이라도 찾은 게 딱 두 명입니다.”
“음.”
표사들이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대다수가 표행을 하며, 또 표사로 들어오기 전에 강호를 주유했던 무사들이다.
그런 이들도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시신의 상태는 심각했다.
“불로 태워 버린 건가?”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엄청 지독한 놈이로다. 제 수단을 가리기 위해 시신까지 욕보이다니.”
표사들이 분기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찼다.
불에 한참이나 태운 듯 그저 검은 숯덩이를 보는 듯했다.
“이건 좀 다르군.”
“예. 중간에 불길이 꺼졌는지, 하지만 수분은 다 말랐고 겉의 피부는 칠할 이상이 탔습니다.”
“흐음.”
숯 덩어리처럼 탄 시신과 달리, 이건 어느 정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다. 마치 미라처럼 온몸의 수분이 바짝 마른 상태였으니까.
천무백은 우선 그들에게 합장하며 명복을 빌어 줬다.
표사들도 분분히 따라서 합장했다.
“이들의 가족들이 시신을 순순히 보여 주던가?”
허성이 다소 슬픈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의 명성을 빌렸습니다. 천룡검협이라 하니, 하남에서 흑도들을 멸한 것처럼 반드시 악적을 잡아달라고 하더군요.”
“음.”
천무백은 묘한 책임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강호의 높은 이들은 천무백은 소림을 구하고, 화산과 종남과의 비무전에 뒤따라온 명성을 크게 쳤다.
반면 비교적 작은 문파나 양민들은 천무백의 협객행에 열광했다.
소림에서 역병 환자들을 손수 고치고, 흑랑단이란 흑도단체를 멸한 것 같은 그런 협객행 말이다. 덕택에 천무백이 시신을 내어달라는 과한 부탁에도, 유가족들은 오히려 천무백을 믿는다며 흔쾌히 내어준 것이다.
천무백은 유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시신을 묻지도 않고 그대로 내어 준 이들에게 응당 생기는 책임감이었다.
천무백은 합장 후에 시신에 거침없이 손을 댔다.
녹아 눌어붙은 피부를 드러내는 장면에 몇몇 표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천무백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기 힘들면 제갈세가를 도와 추적 일을 하고 있으시오.”
천무백은 단호하게 말한 뒤 두 구의 시신을 꼼꼼히 확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시신을 살피던 천무백의 눈에, 언뜻 의미심장한 빛이 떠올랐다.
“이거, 공교로운데…….”
* * *
천무백은 곧장 추적을 개시했다.
우선 그간의 피해자가 발생한 지점부터 해서 역추적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추적에 나섰던 다른 이들과 경로가 겹쳤다.
“역시 이쪽으로 왔구려.”
제갈서후는 직접 무사들을 이끌고 추적에 나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피로가 뚝뚝 묻어났다.
다소 천무백에게 불편한 감정이 있었으나, 그는 그걸 외부로 표출할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손을 잡은 상황이 아닌가.
“역추적하다 보니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더군요.”
“그렇군. 우리 측에서도 고용한 추인들도 이쪽으로 왔지.”
그의 말에 천무백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제갈세가 무사들을 지휘하면서 세심하게 길을 살피는 두 명의 중년인이 보였다.
형제인 듯 그들은 제법 이목구비가 비슷했는데, 전문적으로 사람을 추적하는 일만 하는 추인들이었다.
“풍추쌍오(風追双烏)지.”
“풍추쌍오라!”
천무백을 따라온 곽천후가 감탄을 터뜨렸다.
사실 곽천후는 이번 일에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천무백의 일이었고 청성표국의 일이었으니까.
하나 그는 무슨 생각인지 천유하한테 직접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퍽 진지했다. 강호인으로서 악적을 쫓는 일이라며 장엄하게 말하는 모습이 말이다. 천유하는 감명받은 얼굴로 곽천후에게 임시 객원표사의 자리를 제안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천무백은 우선 넘어가 줬다.
곽천후 정도라면 도움이 될 만한 인력이니까.
그래도 목소리가 까칠해지는 건 가릴 수 없었다.
“알아?”
“추적술에 있어서 이쪽 최고의 권위자들이지. 바람도 추적하는 두 까마귀인데. 천망표국의 대표두로 유명했지.”
“맞습니다.”
허성이 맞장구쳤다.
표국 사람들에겐 풍추쌍오는 전설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빼앗긴 표물을 중원 끝까지 추적해 다시 가져오는 일로 유명한 양반들이었다.
물론 천망표국이 모종의 사정으로 파산하고, 그들은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강호를 주유했다.
그만한 명성의 사람들을 고용할 정도로 제갈세가는 총력을 기울였다.
천무백도 잠깐 지켜본바, 그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확실히 전문가들이군.’
천무백이 추적하는 대로, 그들도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추적에 확신하는 천무백이기에, 풍추쌍오가 똑같은 경로를 추적하는 걸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던 터였다.
그러다 보니 풍추쌍오는 알게 모르게 천무백을 의식했다.
“제법 실력이 좋소이다?”
풍추쌍오중 형인 흑오(黑烏)가 불쑥 말했다.
“뭐, 길이 하나니 당연한 거 아니겠소.”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러자 동생인 적오(赤烏)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충 그럴듯하게 우리 따라오는 거지 뭐.”
작게 말했다지만 그 목소리가 천무백의 귀에 안 들렸을 리가 없다.
애당초 남에게 들으라고 할 말이 아니었다면, 전음으로 했으리라.
저런 혼잣말을 굳이 한 건 대놓고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하나 천무백은 그저 속으로 코웃음 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풍추쌍오의 추적술은 썩 훌륭하나, 내공은 간신히 일류 정도였으니까.
굳이 대거리할 상대도 아니었다. 천무백은 묵묵히 추적에 나섰다.
책임감을 느낀 만큼 천무백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풍추쌍오도 눈에 불을 켜고 추적에 임했다.
그들의 경로가 동일하니 따라 움직이던 제갈세가 무사들의 얼굴에 ‘혹시’하는 희망의 빛이 어렸다.
실제로 갈수록 비인색귀의 미세한 흔적이 발견되면서 분위기는 묘하게 달아올랐다.
특히 천무백이 비인색귀의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야말로 흥분했다.
“발자국이오.”
“이게 어딜 봐서?”
풍추쌍오가 눈을 치켜떴다. 천무백이 가리키는 곳엔 발자국이라고 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살짝 패인 자국이 있는데, 그걸 발자국이라 할 수는 없었다.
풍추쌍오는 기세등등한 얼굴이었다.
“이건 아니오. 비인색귀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놈이오.”
흑오는 조금 신중하게 흔적을 살폈지만, 적오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비인색귀란 놈은 말이오, 그 특유의 향과 심리를 쫓아야 하는 거요. 응? 여기서 어떻게 도주해야겠다, 그걸 미리 짐작하면서…….”
“눈이 옹이구멍이야? 왜 이래?”
별안간 쏟아진 천무백의 독설에 적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적오가 뭐라할 새도 없이 천무백은 곧장 행동으로 보여 줬다.
손을 뻗어 패인 자국을 툭툭 털어댔다.
“무슨 짓이오? 그게 진짜 발자국이면 그리 함부로 손대면 훼손당하지 않소?”
신중했던 흑오도 기함해서 그리 소리칠 정도였다. 그는 패인 자국이 발자국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인위적인 흔적임은 느꼈다.
하여 천무백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저리 막 건들면 흔적이 훼손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무백은 아랑곳 안 하고 손을 휘저었다.
“어? 어?!”
이내 그들의 입가에서 얼빠진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흑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이 손을 댈 때마다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데 아주 세심했다. 대충 휘두르는 것 같은데 아주 섬세하게 바깥의 흙을 털어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세하지만 분명했다.
“발자국이다!”
흑오가 저도 모르게 흥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적어도 어버버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일견 보기엔 얕아서 발자국처럼 보이진 않지만.
“경공이구나!”
“경공을 쓰면 자국이 이리 남지!”
“허어!”
제갈세가 무사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껏 신중한 기색이던 제갈서후마저 얼굴에 은은한 흥분이 떠올랐다.
천무백은 발자국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무수경공이군.”
“무수경공이라……. 마도 놈들이 보편적으로 쓰는 경공 아니오?”
“이런 빌어먹을 마인 같으니라고!”
무사들이 일제히 분노를 터뜨렸다.
천무백의 말에 곽천후가 다가와 말했다.
“무수경공이라면 지속성이 길지 않은데,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빠르게 움직이나 지구성이 낮지.”
“그래.”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 않았다.”
천무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갈서후가 외쳤다.
“다들 움직이도록!”
“존명!”
천무백은 곧장 움직였다. 이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개의 발자국을 더 발견했다. 발자국이 향하는 쪽으로 급히 움직였다.
무사들의 얼굴에 열기가 떠올랐다.
드디어 찾는다!
한편 풍추쌍오는 점점 경악에 찬 시선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의 신에 달한 추적술을 겪은 적오는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흑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혈귀곡을 홀로 추적해 냈다더니……. 이 무슨 신기에 달한 수준인가!’
그는 불현듯 청성표국이라 적힌 옷을 입고 천무백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표사들을 바라봤다.
흑오의 머릿속에 무언가 새로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는 잠시 그 생각을 접어놨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풍추쌍오가 있는 힘껏 움직이자 천무백도 미처 놓쳤던 흔적을 한 개씩 발견했다.
흔적이 한번 드러나기 시작하자 우수수 쏟아졌다.
즉슨 그 말은 근방에 비인색귀가 있거나, 적어도 비인색귀가 근처에 있었단 얘기였다.
하나 이내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추적대들은 이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기서 흔적이 뚝 끊겼소.”
흡사 운남의 밀림처럼 사람 손이 하나 닿지 않은 수풀림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허어.”
“길이 아예 없군.”
“이러다 길도 잃겠어. 수풀이 우거져서 그런지 방향감각 찾기도 힘들군.”
흔적이 뚝 끊기자 나아갈 수 없었다.
워낙 우거진 숲이었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쪽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였기에 풍추쌍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거기엔 흔적도, 길도, 그리고 무언가 드러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쪽은 똑같은 수풀인거 같은데?”
“뭘 보고 그런 것이오? 흔적도 없는데?”
풍추쌍오는 이전처럼 천무백을 조롱하지 않았다. 흑오는 물론이요, 동생인 적오도 이쯤 와선 천무백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대답에 이번만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여튼 이쪽이야.”
근거는 없다. 그러나 확신한다.
하나 풍추쌍오는 쉬이 따를 수 없었다. 추적에 있어서 한번 잘못된 길에 빠지면, 기회를 놓치기 마련이다.
추적 대상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니까.
천무백은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무작정 움직였다.
천무백이 움직이자 곽천후와 능허도 따랐고, 이내 표사들도 따랐다.
제갈세가 무사들은 천무백과 풍추쌍오 사이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제갈서후가 표정을 굳히며 외쳤다.
“천룡검협을 따라간다.”
“……!”
결국, 풍추쌍오도 굳은 얼굴로 천무백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번만큼은 천무백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흥. 이렇게 흔적을 놓쳤을 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어려서인가, 관록이 부족하구나.’
그리 생각하던 풍추쌍오는, 이내 우거진 수풀이 점점 옅어지자,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끝내, 천무백이 멈춰선 순간.
그들의 얼굴에 아연한 빛이 떠올랐다.
“맙소사…….”
“미친, 이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떻게?”
둘의 경악에 찬 시선이 천무백의 등에 꽂혔다.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광경.
깎아지른 절벽 아래 드러난 거대한 바위협곡.
그 모양새를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혹시…… 검왕곡?”
과거, 팔선 중 검선으로 불렸던 여동빈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 제일의 검객, 검왕이 머물렀다는 검왕곡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