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12화>
112. 천하의 협잡꾼이구나!
“반갑소, 제갈서후요.”
“천무백입니다.”
제갈서후의 날카로운 눈빛이 천무백의 얼굴에 향했다.
“근래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천룡검협을 뵙게 되어 내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오.”
“괜한 칭찬은 괜찮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제갈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름 분위기를 주도할 속셈이었던 그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갈세가는 청성표국에 정식으로 의뢰하는 바요.”
“흐음.”
“내가 좀 알아보니 표행에 따라 네 개의 등급이 있더군. 최상, 상, 중, 하. 이 중에서도 최상에 맞는 보수에서 세 배를 더하여 지급하겠소.”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최상 등급의 의뢰라면 보수가 적지 않을 터.
거기에 세 배를 지급한다니 좋은 조건임이 틀림없다.
또 그만큼 제갈세가가 이번 일에 진심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나 천무백에게 중요한 건 보수가 아니었다.
천무백은 나름의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비인색귀는 도의를 저버린 마인이지요. 그를 잡는데 강호동도로서 무슨 염치로 보수를 받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지 제갈서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 표정을 감상하는 것도 썩 즐거운 일이었다.
대화에서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서로 얻는 게 달라지는 법이었으니까.
천무백은 이런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는 방법을 잘 알았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점을 파고들고, 흔들어라.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기도 했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부분은, 협상자인 본인도 모를 때가 많았으니까.
다만 천무백은 맹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과연, 천룡검협이란 위명이 헛된 게 아니었군요.”
제갈서후는 하오체에서 존대로 화답했다.
“다만, 이건 내 입장일 뿐입니다.”
“……무슨 뜻이오?”
“청성표국의 자제가 아닌, 천룡검협이란 이름을 지닌 강호인으로서 입장입니다. 하나 청성표국의 입장과는 다른 일이지요.”
“본론부터 말하자더니, 은근히 말을 돌리는 걸 좋아하시는구려.”
제갈서후가 은근히 타박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무슨 말장난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저는 이번 일을 받아들이리라 이미 마음먹었습니다. 하나 천룡검협으로 이번 일을 도의적으로 도울 것이고, 청성표국의 자원을 이용해 표국에서도 공적으로 보수를 받고 이번 일을 도울 겁니다.”
“하여튼, 받아들인단 의미 아니오?”
“맞습니다.”
원했던 답이었으나 제갈서후는 순순히 표정을 펴지 않았다. 머리 쓰는 거로 유명한 제갈세가답게 말에 숨겨진 저의를 파악하려는 표정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천무백도 굳이 제갈서후와 줄다리기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다.
머리싸움에서 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귀찮은 일이니까.
하나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갑과 을이 명백한 상황이다. 아쉬운 건 제갈세가다. 이미 천무백을 보고 접근해 온 건, 천무백의 조력이 필요하단 뜻이니까.
결국, 이미 협상의 우위는 천무백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씩 웃었다.
“마인을 상대하는데 강호동도로서 나서는 것은 협의를 가진 강호인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 일을 도울 겁니다.”
“감사하는 바이나…… 청성표국의 표사들을 이용하겠다면…….”
“그에 대한 보수는 받아야지요.”
제갈서후는 뭔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으니까 저리 빙빙 꼬아서 말하는 것이리라.
‘이 양반이 체면을 중요시하는 건가?’
제갈서후의 머릿속에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 받고 이번 일을 도와주자니, 강호에 널리 알려진 게 바로 천무백의 협객으로서의 명성 아니던가.
적어도 천룡검협이란 이름을 한 번씩은 들어본 사람들은, 천무백을 위기를 목격하고 분연히 일어선 협객으로 봤다.
실제로 행적도 그러했고.
하나 제갈서후는 그 생각을 일부 수정했다.
‘체면을 중요시하되, 약간은 속물적이군. 강호의 소문은 절반만 믿으라더니.’
제갈서후는 그리 생각하고 내심 냉소했다.
“그렇지요. 마인을 추적하는데 제가 보수를 운운했다니, 죄송합니다. 정파인으로서 마인을 추적하는 일이야 당연하지요. 물론 청성표국의 표사분들까지 동원하시니, 그에 합당한 보수도 지급하겠습니다.”
그 순간.
천무백의 입가에 이전과는 다른 환한 미소가 걸렸다. 제갈서후는 무언가 불길해졌다.
이내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제갈서후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그렇습니다. 마인을 추적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요. 가령 제가 화산, 소림과 힘을 합쳐 혈귀곡 놈들을 추적하는 것과 같은 일이지요.”
“……!”
제갈서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뿔싸!’
제갈서후는 지금 천무백의 의도를 뒤늦게 눈치챘다.
그도 혈귀곡이 무슨 놈들인지 다 들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들 사이의 비선이 있기 마련이다.
강호의 얘기에 늘 귀를 기울이니, 당연히 혈귀곡에 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하나 제갈세가는 알면서도 우선 나서지 않았다. 소림과 화산이 움직이는데 끼어들기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보태자니, 자칫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 괜한 적을 만드는 셈이니까.
뭐든지 논리적,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제갈세가 입장에서는 저쪽에서 먼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나서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있었는데…….
‘내 입으로 말해 버렸구나!’
눈앞이 깜깜해졌다. 고개를 들어 천무백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바라봤다.
이미 자신이 말했다. 마인을 추적하는 데 정파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그리고 혈귀곡은 마인이지 않은가.
이미 내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제갈세가의 체면을 생각하면 말이다. 하물며 이번 일을 없던 걸로 칠 수도 없는 게, 상대는 천룡검협이다.
‘당했다. 완전히!’
그야말로 외통수에 빠진 제갈서후는 천무백의 저 웃음이 불편했다.
“과연 대제갈세가입니다.”
추켜세우는 말도 불쾌했다.
하나 제갈서후는 그 감정을 얼굴 위로 드러낼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에 천무백은 속으로 고소를 지으며, 이연타를 때렸다.
“자, 그러면 표국에 의뢰를 맡기는 것이니, 보수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
그래도 제갈서후는 거기까진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사실 속은 뒤집힐 것 같았다. 혈귀곡 추적뿐 아니라, 이젠 보수까지 바라다니. 일 하나로 두 개의 보상을 받는 게 아닌가.
그는 헛기침 몇 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청성표국에 의뢰하는 것이니, 일전에 말했듯이 최상급에 세 배를 더 지급하겠소.”
“아닙니다.”
“……?”
“제가 원하는 보수는 금전 따위가 아닙니다.”
천무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소 능청스러웠다. 하나 지금은 침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 순간의 변화를 제갈서후가 따라가지 못하는 찰나.
천무백의 말이 머리를 때렸다.
“제갈세가의 수가기문도(守家奇問圖)를 청성표국에 설치해 주시지요.”
“뭐, 뭣이오?”
그쯤 되자 제갈서후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지금껏 지켜 온 표정이 단 한 번에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가기문도.
제갈세가에 설치된 천혜의 기관진식을 이른다.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마대전 당시 호북의 무당파를 타격했던 마교가 제갈세가는 피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농담같지만, 사실 진실이 맞았다.
여타 다른 무파와 달리 무공 측면에서 깊지 못한 제갈세가가 강호 역사 동안 오대세가를 지켜 낸 이유가 바로 수가기문도다.
어떤 악적도, 마인도, 고수들도 제갈세가를 직접 타격할 수 없는 절대의 영역.
대표적인 사례로는 약 200년 전, 당대를 휩쓸었던 사파의 절대자 혈천마괴가 단신으로 제갈세가를 공격했다가, 수가기문도의 삼 할을 파괴하는데 그쳤을 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도주했다.
오히려 그 사건을 두고 혈천마괴를 추켜세우는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 대단한 수가기문도의 삼 할을 부쉈다고 말이다.
그리고 천무백은 그 수가기문도를 원했다. 약선의 진법보다도 표국을 지키는 데에는 수가기문도가 중원 제일이었다.
천무백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설령 설치한다고 해도 그걸 해체해서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수가기문도를 황궁에 설치해 준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또 무당 본산에도 설치해줬고, 해남파에도 설치해 주지 않았습니까?”
제갈서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황궁에 설치한 것은 그렇다 쳐도, 무당본산과 해남파에 설치한 건 약식이요. 제갈세가의 진실한 수가기문도가 아니오.”
“보수를 지급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과한 보수요!”
제갈서후는 참지 못하고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내 차라리 보수를 더 주겠소. 다섯 배, 아니 그 이상을 주지.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었소. 하남성에서부터 섬서를 거쳐 중경성까지. 혈귀곡을 끝내 추적해 성과를 올렸다지?”
천무백은 그 말에 왜 그리 자신을 원하는지 이해했다.
이들의 관점에서 천무백은 추적의 대가였다.
그 누구도 몰랐던 암중세력인 혈귀곡을 알아냈고, 끝내 중경성까지 추적해 일부 성과를 얻어 냈다. 천무백이 그 사실이 명문정파 사이에 알려지는 걸 이미 알고 있긴 했다. 그의 곁엔 개방이 있었으니까.
어찌 됐든 제갈서후의 눈에 천무백은 그리 비쳤으리라.
홀로 세 개의 성을 넘어 끝내 추적에 성공한 대가.
그만큼 절실하단 얘기다. 동생을 찾기 위해 절실한 제갈서후에게 천무백은 그야말로 꼭 잡아야 할 동아줄처럼 느껴졌으리라.
‘아직은 애군.’
천무백이 제갈서후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물론 남이 그 생각을 읽는다면 헛웃음을 터뜨릴 얘기다. 천무백이 적어도 열 살은 더 어리니까.
하나 천무백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 자리에서 자신이 절실함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결국, 천무백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릴 수 없음을 피력한 것 아닌가.
천하의 제갈서후도 천무백이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자 흔들렸다.
“금전의 다섯 배, 아니 열 배까지 지급하겠소. 호북상에 청성표국의 지점을 설립하는데, 전심전력으로 돕겠소. 이 정도면 충분한 조건 아니오?”
천무백은 목소리를 낮췄다.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주위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쪽은 제갈세가의 이름을 쓰는 데에 한낱 금전으로 가치를 매길 수가 있습니까?”
“……!”
“제가 제갈세가의 이름을 좀 쓰겠습니다. 얼마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무슨 망발인가! 천룡검협!”
제갈서후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했다. 탁자가 쩍하니 쪼개졌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쏟아졌다. 바깥에 있던 곽천후와 능허가 벌컥 들이닥쳤다.
하나 천무백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손을 휘저었다.
“하면, 천룡검협의 이름을 쓰는데 왜 금전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이오?”
“……!”
“청성표국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자 무력인 천룡검협이오. 그 천룡검협이 가용 가능한 인원을 총동원하여 도울 것이오. 이걸 금전으로 가치를 매기겠다고?”
“…….”
제갈서후는 말을 잃었다. 그는 더는 표정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의 명성과 본인의 명성을 같은 선상에 놓다니, 이 얼마나 광오한가!’
천무백의 의도에 휘말렸단 생각이 들면서도, 논파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
눈 때문이었다.
아니, 분위기 때문이었다.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눈빛과 기세.
“받는 만큼 확답을 드리겠소. 그대의 동생, 찾아낼 거요.”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순간.
제갈서후는 저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당했다. 그것도 된통.
‘천하의 협잡꾼이구나!’
제갈서후는 천무백의 웃음이 가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