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11화 (111/318)

<검신재생 111화>

111. 네 생각대로 하겠다.

‘말끔하게 생겼군.’

천무백은 제갈서후를 자세히 살폈다.

많아 봐야 스물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꽤 잘생긴 축에 들었다.

하나 다소 턱이 날카롭고 눈매가 진한 것이 유한 느낌보단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약간은 깐깐한 느낌이었다.

“반갑소. 제갈세가의 제갈서후요.”

뜻밖의 거물 등장.

객잔에서 쉬고 있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급히 자리를 비웠다. 천유하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제갈서후와 마주 앉았다.

‘흠. 굳이 내가 안 나서도 되겠는데.’

천무백은 그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내공 하나 없는 천유하는 제갈서후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미소를 지으니, 주위의 무거운 분위기가 밝아지는 듯했다.

제갈서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제가 표행을 책임지고 있는, 청성표국의 부국주 천유하에요. 어떤 의뢰를 맡기러 오신 거죠?”

“실종 인물 수색이오.”

“실종이요?”

“그렇소.”

천유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만일 하남으로 가는 표행을 의뢰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수락했으리라. 어차피 돌아가는 길이었으니까.

다만 다른 곳으로 가는 표행도 잠깐 고민은 하더라도 수락했을 것 같았다.

한데 수색이라니.

그런 건 표국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근방에서 마인이 출몰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네. 표행 중에 들었어요.”

“마인은 지금 비인색귀(非人色鬼)라 불리는 자인데…….”

별호에서 어떤 놈인지 알 수 있었다.

‘색마도 아니라 색귀라. 어지간히 조잡한 놈인가 보군.’

보통 이럴 땐 색마가 붙기 마련인데 말이지.

“제갈세가의 명의로 공식으로 의뢰하겠소. 내 동생 제갈설아를 찾는 데 힘을 보태 주시오.”

* * *

천유하는 그 자리에서 곧장 답을 주지 않았다. 제갈서후도 이해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최대한 빨리 답을 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 시각에도 제갈세가는 있는 힘껏 수색 중이나 아직 성과가 없음을 피력하면서.

천유하는 제갈서후가 떠나자 곧장 천무백을 포함하여 허성, 상자수 유노인과 회의에 들어갔다.

상자수 유노인은 천무백이 강호행을 떠난 후 표국에 들어온 인물이다.

다른 대형 표국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던 노련한 사람으로, 천무백의 조부와 연이 깊어 이번에 청성표국에 온 사람이다.

그는 이번이 기회라는 점을 역설했다.

“제갈세가의 의뢰입니다. 가문이 세워진 이후, 강호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오대세가의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제갈세가입니다.”

유노인은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정력적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제갈세가가 아쉬운 입장입니다. 이 하잘것없는 늙은이가 듣기로, 제갈설아는 제갈세가에서도 끔찍이 여기는 여식입니다. 태상가주 제갈선이 직접 품에서 길렀다는 소문이 자자하죠.”

유노인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이번에 의뢰를 통해 제갈세가과 연을 맺어 두자는 뜻.

천유하도 그런 유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부국주님, 청성표국은 그야말로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더 높은 곳까지 오를 기회입니다. 하남성을 벗어나 호북성에서도 확실한 영향력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유노인은 천유하가 어리다고 해서 강제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 상황에 따라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다. 유노인의 말은 일견 그럴듯해 보였다.

하나 허성이 그때 반론을 제기했다.

“제갈세가가 직접 나서 추적중인데 놓치고 있습니다. 비인색귀라는 멸칭이 붙었지만, 제갈세가에게 번번이 쓴물을 삼키게 한다는 건 그만한 능력이 있는 놈이란 얘기입니다.”

“그럼 거절하자는 뜻인가요?”

허성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이번 표행의 표사들을 이끄는 표두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표국의 운영과 의뢰를 받아들이는 이점은 여기 상자수께서 말씀하신 바에 동의합니다. 다만, 안분지족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훌륭히 표행을 성공시켰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뢰를 받아들였다가, 자칫 표사들을 잃고 제갈설아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음…….”

허성은 표사들의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했다.

그도 맞는 말이었다. 본래 의뢰라는 게 표국 수뇌부에서 충분히 토의를 거친 뒤에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제갈세가 같은 대형 문파의 의뢰라면 각주들과 단주들, 그리고 상자수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장궤들도 다 같이 모여 토의해야 한다.

여기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그만큼 급한 일이므로 성공할 시에 돌아오는 결과도 값지리라.

그때 천무백이 나섰다.

“그러면 우선 상황부터 확인해야죠.”

천무백이 나서자 유노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상황 말입니까? 도련님.”

“네. 비인색귀를 우리가 추적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냐가 우선이 되어야겠는데요.”

유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허성은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백도 무림에서 89명의 무사가 움직였습니다. 제갈설아가 납치된 이후론 제갈세가에서 130명의 무사가 형주와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형주뿐만이 아닙니다. 형주를 벗어났을 확률도 생각해 제갈세가는 의창이나 무한에서도 수색중입니다.”

“여기에 우리 표사는 몇 명이죠?”

“현재 서른셋입니다.”

“서른셋이 나서면 추적에 성공할 수 있나요?”

“표물을 지키는 임무를 주로 맡아 온 표사들이라, 추적에는 능하지가 않습니다.”

허성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이쯤 되자 유노인도 더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다.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의뢰라면 받아들여선 안 된다. 표국에 있어 실패란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는다.

천유하는 고운 미간을 좁혔다.

“거절해도 좋은 상황은 아닐 거예요.”

“으음!”

제갈세가의 대공자인 제갈서후가 직접 발걸음해서 부탁하듯 의뢰했다.

더구나 이번 의뢰가 지극히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었다.

강호에 협의가 있는 협객이라면, 사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나서야 할 일이다.

비인색귀.

호북성에서 벌써 아홉 명의 여자를 납치하여 겁간 후 살해.

살아남은 이는 하나도 없다.

더구나 시체를 불로 태운 듯한 현장이 목격되면서 공분을 사고 있었다.

아홉 명이 다 무가의 여식이나 문파 소속이었기에 백도무림이 움직였다.

그전에 평범한 양민들 상대로도 일을 벌였을 테니까 피해자는 더 많으리라.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제갈세가의 여식인 제갈설아마저 납치당했다.

호북성은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앞마당이다.

다른 지방과 달리 흑도나 사파세력이 숨도 못 쉬는 곳이 바로 호북성이다.

그만큼 백도무림의 장악력이 대단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제갈세가의 여식을 건든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일단 미친놈이란 얘기다.

비단 형주뿐만 아니라 호북성 전체에 제갈세가의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총동원됐는데, 성과는 없다고 한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성표국에 의뢰한 것이리라.

“아마 이런 의뢰를 받은 이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오문이나, 개방, 그 외의 표국들이나. 제갈세가의 명성이면 관부에서도 움직일 것이고.”

유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천유하를 바라봤다.

선택은 이번 표행의 총책임자인 천유하가 해야 한다. 유노인은 상자수로서 그저 조언에 충실할 뿐이었다.

천유하는 별안간 천무백을 바라봤다.

“우리가 형주에 들어선 건 삼 일 전이에요. 한데 오늘에 와서 제갈세가에서 접촉을 해 왔죠.”

“그렇습니다.”

“정말 급했다면 형주에 들어섰을 때부터 접촉해 왔을 거예요.”

“하면……?”

“우리 표국의 명성을 보고 찾아온 게 아니란 얘기죠.”

천유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천유하의 시선이 이내 천무백에게 향했다.

“무백이가 온 순간, 곧장 접근해 왔어요.”

“……!”

“하면 그 말씀은…….”

“청성표국의 이름이 아니라, 천룡검협의 이름을 보고 왔다는 뜻이죠.”

그랬다.

청성표국이 근래 성장을 거듭하지만, 아직은 하남성에서 국한된다.

호북성은 이제 막 진출하는 시점이 아닌가.

제갈세가가 청성표국에 애당초 의뢰할 예정이었다면 진작 접근했으리라.

하니 도출되는 결론은 당연했다.

천무백.

천룡검협이란 별호를 듣고 온 것이다.

천유하의 말에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주에 들어섰을 때부터 제갈세가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낯선 외부인의 무리이니 제갈세가의 시선의 곧장 꽂혔었다. 또 천유하에게 의뢰를 하는 자리에서도, 구석에 있던 천무백에게 은근히 시선을 던졌었다.

천유하는 말했다.

“무백아, 이번 일은 네 생각대로 하겠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청성표국이 아닌 천무백에게 의뢰한 셈이다. 하니 결정도 천무백이 내려야 할 터.

천무백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갈서후와 직접 얘기를 나눈 후 결정하겠습니다.”

* * *

제갈서후는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왔다.

특히 천무백이 직접 만나자는 제안에 두말할 것도 없이 곧장 달려왔다.

애당초 제갈서후는 청성표국이 아니라, 천무백을 보고 의뢰한 것이니까.

“뭐 해?”

“눈싸움하고 있었다.”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곽천후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저 멀리서 오고 있는 제갈서후를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던 탓이다.

“왜 그래?”

“강하더라고. 국보나 전현도 내 기준에서는 대단한 놈들이었는데, 저 자식도 만만치 않아.”

곽천후의 눈이 타올랐다. 호승심이 이는 표정이었다.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라. 너랑 상극이야.”

“뭐? 내가 진다고?”

“진다기보단, 골치가 아플 거다. 나도 저런 놈,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잔머리 살살 굴리는 놈.”

“능허?”

“조금 다른 잔머리야. 말로 표현하긴 힘들다.”

곽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줬다. 그는 비켜서면서 천무백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뭐.”

“죽이지는 마.”

“……뭔 개소리야?”

“나도 한판 붙어볼 거니까.”

천무백은 잠깐 두통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보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경천혼공을 익히고, 선근경의 구절을 외우면서 이젠 그에게 두통이란 단어는 머나먼 단어다. 한데 천무백은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능허보단 좀 정상 같던 녀석이, 근래 조금 이상해졌다.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할까.

하긴 자극은 받았으리라. 세상은 넓은 걸 체감했고, 강대한 적들도 목격했으니까.

아마 비검문에 습격한 비다라들과의 싸움 이후일 거다.

천무백과의 격차를 두 눈으로 보고 직접 체감한 곽천후는 수련에 있어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

간혹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내가 왜 제갈서후를 패?”

“응? 아니었나?”

“협상하러 가는 거다.”

“그래? 흐음. 쳐다보는 눈이 마치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빛이었는데.”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널 보는 내 눈은 어떤 거 같냐?”

“……지금 네가 바쁘니, 우리의 비무는 추후에 하지.”

곽천후는 금세 눈에 불을 끄고 꼬리를 말았다.

아무리 싸움 좋아하여 투귀란 별명이 붙은 그도, 천무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천무백은 곽천후를 뒤로 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먼 거리다.

하나 걸어오고 있는 제갈서후도 마침 고개를 들어 정확히 천무백을 쳐다봤다.

‘흐음.’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