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10화 (110/318)

<검신재생 110화>

110. 제갈세가의 의뢰

본래 청성표국은 업무는 하남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작금의 드넓은 중원에서 다른 성으로 표행을 한다는 건, 보통 규모의 표국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무백이 각성하던 시점에서 청성표국은 표행 실패로 당장이라도 파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그랬던 청성표국이 천무백이 강호를 돌아다니는 사이, 호북성까지 표행 올 정도로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도련님!”

“막내 도련님이시다!”

“도련니임!”

수레를 관리하고 지키던 쟁자수와 표사들 중 천무백을 알아본 이들이 소리쳤다.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다.

천무백이 처음 장노한테 무공을 수련받을 때부터 종종 봐온 얼굴들.

뭘 하던 그저 흐뭇하게 쳐다보던 나이든 쟁자수들도.

물론 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천무백이 강호를 주유하는 사이 새로 뽑았는지 낯선 이도 많았다.

낯선 얼굴들은 모두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낯익은 이들은 죄다 천무백에게 달려왔다.

“주군!”

특히 그중에서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허성이었다.

천무백도 썩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이야. 허 표사.”

“주군, 여기 형주에서 뵙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허성은 진중한 얼굴 대신 반가움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허 표사와 제법 안면이 깊은 능허도 반가운 척했다.

“여어, 허 표사.”

“……능 루주?”

능허와 달리 허성은 능허를 보곤 잠시 당황했다.

그전에 봤던 능허와는 너무나도 다른 기도였다.

천무백이 떠난 직후 표국에 남아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허성이다.

내심 돌아온 천무백에게 자신의 수련 성과를 보여 줄 생각도 가지고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한데 자신과 비슷한 축, 오히려 정종무학을 익힌 자신보다는 얕잡아 본 능허의 기도가 대단했기에 허성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물며 그 뒤에 있는 곽천후를 본 순간 둔중한 충격이 머리를 후려쳤다.

‘이 무슨…….’

능허의 달라진 기도도 놀라운데, 처음 보는 곽천후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충격적이었다.

마치 젊은 숫사자를 보는 듯한 기세였다.

이내 시선이 천무백에게 닿았을 땐, 다른 차원의 충격을 느꼈다.

천무백이 강호를 떠나기 전에도 그 기도를 감히 읽을 수가 없었다. 격차가 너무 뚜렷했으니까. 하나 허성은 지금쯤이면 천무백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그건 정말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깜깜하다.’

그저 느껴지는 건 고요함과 압도적이다.

안개 속에 휩싸인 태산북두를 코앞에 두는 기분이었다. 고요하나 웅장하다, 조용하나 압도적이다. 경탄이 튀어나오나 감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수 없다.

곽천후에게 느껴지던 게 젊은 숫사자였다면, 천무백에게서 느껴지는 건 무언가를 초월한 분위기였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거야? 왜 그리 굳어 있어?”

“아, 아닙니다. 그간 활약은 잘 들었습니다. 천룡검협이란 명성이 하남뿐만 아니라 여기 호북성에서도 떨치더군요.”

“허명일 뿐이지. 허 표사가 이번 표행의 책임자인가? 호북성까지 표행을 올 정도면, 제법 큰 표행일 텐데?”

“예. 무당파의 의뢰를 받아 표물을 전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큰 표행은 제가 이끌지 못하지요.”

“아버지께서 오셨나?”

“아닙니다.”

허성은 알 듯 모를 듯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천무백은 객잔에서 뛰쳐나오는 여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그건 천무백 본인이 자각 못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무백아!”

천유하였다.

막 씻고 쉬고 있었는지, 늘 단정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다소 흐트러진 모습. 격식 차린 차림새가 아닌 집에서 편히 쉴 때 입는 평상복에, 아직 살짝 젖어 물기가 어린 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 천무백처럼 새하얀 얼굴의 그녀는 객잔에서 뛰쳐 나와 다짜고짜 천무백을 안았다.

“우리, 무백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누나 봐봐. 응? 으구! 살이 쏙 빠졌네! 내 동생!”

마치 어린 애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천무백의 양볼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는 천유하.

천무백도 이 같은 태도에 적잖이 당황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능허와 곽천후도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은 그런 둘의 눈치를 슥 보다가 천유하를 살짝 밀어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누님.”

“야! 넌 오랜만에 만나놓고도 그렇게 어른스러운 척할래?”

일전에 봤던 어른스러운 천유하가 아니었다.

천무백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의 어색한 반응에 천유하도 내심 뾰로통해졌지만, 주위의 눈을 의식하곤 급히 표정을 달리했다.

어찌 됐건 이번 표행의 책임자였고, 차후 표국을 이끌어갈 부국주가 아닌가.

사람들 앞에서 늘 당차면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 줬었다.

잠깐 흩트려진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아 천유하는 내심 얼굴이 붉어졌다.

화장을 지워서인지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빤히 드러났다.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네. 별 일 없었습니다.”

“별일 없기는! 내가 소문 다 들었는데! 너는 진짜…….”

천유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마침 뒤에 있던 능허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능 루주, 우리 무백이가 줄곧 예악만 즐겨서 허약해요. 고난을 이겨 내기 힘들었을 텐데……. 연화루도 다른 이한테 맡겨 두고 따라가서 도와주시다니,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능허는 표정관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당장이라도 괴상하게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억지로 폈다.

마음 같아선 ‘허약하다던 당신 동생 놈이 혈사문주 대가리 따고, 화산이며 종남이며 무대뽀로 싸우고 흑도며 수적떼며 다 깨고 다녔소!’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천무백의 눈을 봤다. 그리 말했다간 연화루에 무사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연화루는 이제 청성표국의 대표적인 사업체가 되었기에, 굳이 따지면 능허도 청성표국 소속인 셈이었다.

그래서 천유하는 능허에게 정중한 대우를 해 줬다. 천무백의 거친 태도에 익숙했던 능허는 천유하가 사근사근 말하자 뭔가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연화루는 잘 운영되고 있어요. 오히려 성황이죠. 역병도 끝났으니까요. 설영이란 소저께서 수완이 있으시더라고요.”

“하하, 그럼 다행입니다.”

능허는 노후 생활을 책임져 줄 연화루가 잘되고 있단 얘기에 헤벌쭉 웃었다.

“설영 소저가 능 루주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어요.”

“네? 저를요? 왜요?”

“글쎄요? 그건 능 루주가 잘 아실 것 같은데?”

천유하가 웃었다. 능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유하는 대답해주지 않고 그저 웃었다. 이내 곁에 있는 곽천후를 보고 천무백을 바라봤다.

“아, 곽천후란 녀석입니다. 중경성 비검문의 자제고, 연을 맺었습니다.”

“반가워요. 청성표국 부국주이고, 여기 무백이의 친누이인 천유하라고 해요.”

천유하가 활짝 웃었다.

괜히 천무백의 남매가 아님을 역설하듯, 천유하의 미소에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곽, 곽천후라고 합니다. 소저.”

한참이나 뒤늦은 반응. 매번 날카롭게 벼려놓은 칼처럼 즉각 반응하던 곽천후 답지 않았다. 목소리의 어조도 은근히 높았다. 하물며 허둥지둥하며 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선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순간 천무백과 능허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능허는 웃겨 죽겠다는 듯한 눈빛,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이었다.

‘허? 이것 봐라?’

고개 숙인 곽천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천무백은 천유하와 그간의 해후를 나누었다.

서로의 사정을 얘기했는데, 천무백은 적잖이 놀랐다.

청성표국의 규모가 생각보다 더 커졌다.

“기존의 단들은 모두 각으로 재편했어. 일당(一堂), 삼각(三角). 삼단(三壇). 내가 부국주이자 당주를 맡아서 총 지휘하고 있고.”

청성표국은 애당초 표사들이 두 개의 단으로 이뤄졌을 뿐이다.

하나 그 위에 세 개의 각을 설치했고, 그걸 모두 총괄하는 하나의 당을 설치했다.

즉 이전의 규모가 두 배가 아니라 거의 세 배, 네 배에 이르게 됐다.

“하남에서 내로라하는 무사들도 표사로 뽑았어. 쟁자수들도 더 보충했고. 그래도 사람이 부족할 정도야.”

천유하는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폈다.

그러더니 별안간 천무백의 어깨를 안마라도 해주듯이 주물주물해 줬다.

무공을 익히지 않아 그저 평범한 아귀힘이었지만, 천무백은 은근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무백이, 네 덕이야!”

“제 덕이요?”

“천룡검협의 표국! 이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모르겠어?”

소림의 경비 의뢰를 받으면서 일약 명성을 쌓게 된 청성표국.

거기에 곧 천룡검협의 별호가 강호를 진동시키면서, 자연 청성표국에 들어오는 의뢰는 수도 없이 많아졌다.

소림을 지키고, 천룡검협이 있는 청성표국이다.

당연히 의뢰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천문경과 천유하는 물이 들어오자 노를 저었다. 규모를 확대했고, 표사들을 새로 고용했고, 표국을 정비했다.

급격하게 성장하여 청성표국은 이제 하남제일 표국이 되었다.

하여 하남을 넘어 근방에 있는 호북과 섬서성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럴 수 있던 이유에는 연화루라는 든든한 자금줄과 정보망.

흑심방이라는 일종의 용병격인 무력단체까지 있었다.

그 모든 게 다 천무백이 안배한 바였으니, 천유하에게 천무백이 얼마나 이뻐 보일까.

“정말 대단하세요.”

하나 천무백은 오히려 천유하와 천문경이 대단해 보였다.

천무백으로부터 기회가 생겼다고 해도, 그 기회를 온전히 살려내는 건 그들이었으니까.

천무백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규모를 갖추고 무력을 지니기 시작한 표국의 모습에 내심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혈귀곡이 직접 노릴 수도 있겠군.’

흑심방이야 괜찮은 무력집단이고, 듣자 하니 하나의 각을 맡은 각주들도 제법 한가락 하는 무사들이었다. 허성만 해도 절정 무인이 아닌가.

표사들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나 혈귀곡이 마음먹고 노리면 답이 없다.

소림도 습격하는 놈들인데, 표국을 어렵게 생각하겠나.

천무백이 표국에 머무를 때야 상관없다.

그때는 오히려 바라는 바다.

습격해 오는 대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흐음. 몇 가지 수를 좀 써놔야겠는데.’

천무백이 없을 때 최소한의 대비책.

‘가령 진법이라거나…….’

당장 떠오르는 건 약선이었다.

하나 약선의 진법은 방어를 위한 진법보단, 모습을 감추는 진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적불암도 그러했다. 평생 은거기인으로 강호에서 잊혀진 삶을 살았던 이유도 그랬다.

싸움 자체를 싫어하고,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그저 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진법에도 소양이 뛰어나긴 하나, 가장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만 대비해 놔도 어느 정도 괜찮겠어.’

그간 해후를 풀었으니, 이제는 좀 편안하게 표행의 복귀길을 따라가면 그만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말이다.

가령…….

“부국주님! 제갈세가의 대공자인 제갈서후가 의뢰를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런 특별한 일 말이다.

천무백은 다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진작 느끼고 있었다. 여기 형주에 들어섰을 때부터 따라다닌 시선. 적의가 없었기에 그저 무시했을 뿐이다. 하나 천유하와 만날 때 그 시선이 더 진해지더니,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적어도 곽천후와 맞먹는 기세와 존재감.

만만치 않은 고수였다.

제갈세가의 대공자, 제갈서후.

그가 직접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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