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09화>
109. 하남귀가행
“간다고요?”
“그래.”
“어, 중간에 딴 길로 안 새죠?”
“집에 간다. 나는 표국, 너는 연화루.”
“…….”
천무백은 응당 이쯤 들려오겠거니 한 능허의 말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야 우냐?”
능허가 코를 한 움큼 집어삼켰다.
“크흥, 아닙니다.”
“우리 능허, 살벌한 강호행에 힘들었구나.”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긴.
강호가 칼날 위를 걷는 삶이라지만, 천무백이 표국을 나온 이후 그야말로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으니까. 피로가 쌓일 만도 하다.
하남에서는 흑랑단부터 시작해서 소림의 흉사까지 이어졌다. 섬서에선 전진성단과 화산에서 사건이 수없이 발생했다. 중경성까지 와서도 아찔한 전투가 이어졌다.
강호란 게 이렇다.
아무리 강대한 정신력을 지닌 강호인이어도, 흔들리지 않는 철심의 사내라고 해도, 강호풍파를 거쳐나가면 무언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감정의 한편이 자신도 모르게 마모되어 있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서 심각한 피로를 느끼기도 한다.
능허 역시 그간 내색치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심력이 많이 소모됐다.
이러니 강호를 살면서도 마음 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천무백은 지금이 잠깐의 휴식을 보낼 시간이라 여겼다.
‘크게 문제 되진 않지만…….’
심마란 게 예상되는 지점에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지금까지 얻은 것을 정리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하남으로 귀로의 길에 오르기로 하자 능허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천무백이 뭐라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순식간에 준비했다.
흠 잡을 데 없는 일 처리 능력에 천무백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능률이 올라가는 법이지. 역시, 옛말 틀린 게 없다니까.”
능허 덕택에 천무백은 곧장 여정을 떠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부랴부랴 곽천후가 곽용이 소림에 보내는 서찰을 들고 대동했다.
“하남까지 같이 가지.”
“그러던가.”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천후까지 준비를 마치자 천무백은 곧장 움직였다.
“천 공자님, 잠깐만요!”
때마침 떠날 준비를 끝낸 천무백을 찾아온 건 채가령이었다.
연소운을 대동하고 나타난 채가령은 비교적 환한 얼굴이었다.
성화문을 멸문시킨 백모쌍귀의 십성과 비다라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그녀는 나름 응어리진 한을 풀었다.
덕분에 채가령은 천무백을 은인처럼 여겼다.
“중경에서 나는 약재 중에 최고로 좋은 것들만 쓴 거예요. 강서성의 임강부에서 온 좋은 약재들을 꽉꽉 채웠어요!”
채가령은 그리 말하며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건넸다.
“천 공자님꺼, 이건 능 아저씨꺼, 요건 곽 공자님꺼.”
누구나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능허는 안 그래도 집에 돌아간단 사실에 기뻤던 상황에서 흐뭇하게 웃었고, 냉막한 곽천후도 소림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조금 덜어냈다. 천무백은 그저 담담하게 받았다.
“잘 쓰마.”
“네네! 내상약도 넣어 놨고, 금창약도 있고, 때에 맞춰서 쓰면 돼요. 근데 부디 쓸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채가령이 조금은 수줍게 말했다.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품에 잘 챙겨 넣었다.
서로의 것이 헷갈리지 않게끔 보따리에 각자의 성을 직접 수실로 새겨놓은 게 퍽 정성이 대단해 보였다.
“뭐, 지내면서 어려운 게 있으면 비검문주에게 말해. 그 양반이 잘 도와줄 거다.”
채가령은 당분간 비검문에서 머무르다가, 정의맹이 창설되면 그곳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자. 가자.”
천무백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고삐를 흔들었다.
하남귀가행에 올랐다.
* * *
“이럴 리가 없는데.”
능허가 별안간 그렇게 중얼거렸다.
천무백이 무슨 말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능허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평화로운데요.”
귀로는 호북성을 거쳐 하남으로 향하는 경로였다. 벌써 호북성에 접어들었다.
그간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능허는 그 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원래 이게 정상이다.”
“그쵸? 이게 강호행이죠? 허참. 그간 평생 할 싸움을 다 한 거 같네.”
“많이 심심한가 보구나.”
천무백의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능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스쳐갔다. 능허가 단호하게 말했다.
“심심하진, 않습니다.”
“무인이 심심할 땐 뭐가 있겠느냐. 검이나 휘두르는 것이지.”
“아니 그게 또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천후야.”
“……?”
“능허가 심심하단다.”
“그럼 심심하지 않게 해 줘야지.”
곽천후도 그간 몸이 찌뿌둥했는지 기지개를 켰다. 능허가 허탈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입이 방정이지…….”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니라.”
“조언 감사합니다, 주군.”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 했던가.
천무백은 곽천후와 능허를 툭하면 서로 붙여 줬다.
능허는 왜 이리 사람을 괴롭히냐고 하소연했지만, 정작 비무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했다.
그도 알았다. 천무백이 괜히 싸움을 붙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이건 기회였다.
천무백은 비무를 지켜보며 한두 마디 툭툭 던졌다.
능허나, 곽천후나 천무백이 어떤 존재인지 가장 가까이서 체감하는 이들이다.
사람들이 경외하는 천룡검협이고, 실제로 명성에 걸맞는 무위를 갖췄다. 무인들은 누구나 가르침에 목말랐고, 고수의 조언은 때론 영약보다 귀한 법이다.
곽천후는 그 말을 듣고 찰떡같이 알아들어 조그만 깨달음을 얻어 갔다.
능허도 곽천후 정도는 아니어도, 이제는 제법 검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라진 탓에 깨닫는 바가 점점 명확해졌다.
어느 정도 경지에 접어들면, 시야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법이다.
반골 기질 강하고 깐족거림이 심한 능허도 천무백이 툭툭 던지는 말이 금과옥조임을 곧 깨달았다.
그래도 결과는 늘 똑같았다.
“차라리 원숭이한테 칼 들리고 싸우는 게 낫겠다.”
곽천후의 승리였다. 능허는 매번 졌다.
하루에도 두 번, 세 번을 싸웠는데 결과는 늘 똑같았다. 하나 둘의 분위기는 상반됐다.
오히려 이기고 있는 곽천후는 슬슬 조급함을 느꼈다.
‘이거 이러다가 한 방 먹겠는데?’
곽천후는 살짝 위기감을 느꼈다.
겉으로 보기엔 늘 곽천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능허는 곽천후의 몸에 상처하나 내지 못했다. 반면 능허는 매번 바닥을 볼썽사납게 구르거나 상처 하나씩은 입었다.
하나 그건 외면적인 것이었다.
곽천후는 비무를 벌이며 그 누구보다 능허의 성장을 크게 느꼈다.
오늘의 비무에선 가슴 부근의 옷깃이 한 움큼 잘려나갔다.
조금만 반응을 늦게 했으면 가슴에 구멍이 뚫렸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질 수 없지.’
곽천후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표는 천무백이다.
고작 능허에겐 따라잡힐 수는 없다. 눈동자가 거칠게 타올랐다.
“와. 미치겠네. 너 잘 때 나 몰래 영약먹지? 솔직히 말해, 자식아. 달라곤 안할게.”
능허는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 천무백의 조언을 듣고 있노라면 무언가 아슬아슬하게 알 것 같은데도, 곽천후에게 매번 패배하니까 문제였다.
그 답답함을 이겨 내기 위해 지금은 천무백이 시키기도 전에 비무를 계속 했다.
능허는 곽천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 주기 위해. 곽천후는 능허로부터 더 멀어지기 위해.
둘은 각자의 이유로 성장하고 있었다.
“보기 좋군.”
천무백은 오랜만에 흐뭇한 감정이 들었다.
본인의 성장만큼 좋은 게 바로 주변인들의 성장이다.
그는 본래 고독하고 독단적인 면모가 없잖아 있었지만, 전생을 거쳐오며 그런 점도 많이 희석됐다.
특히 직전 전생의 정마대전이 결정적이었다.
‘나 혼자 강하면 무얼 할까. 다 죽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성장이었지만, 주변 인물들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능허를 바라봤다.
“흐럇차!”
이번에도 빗나간 공격이었지만, 천무백은 똑똑히 봤다. 곽천후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걸.
능허는 본인이 자각 못 할 뿐, 분명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 줬다.
천무백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화해 내는 건 곽천후만이 가능했는데, 능허도 그 정도 경지에 올라섰다.
다만 곽천후도 만만치 않게 천무백의 조언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 불행한 이유였다.
둘의 성장이 천무백과 상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남의 검도를 보라.’
천무백은 전진성단에서 얻은 여동빈이 남긴 의미를 잊지 않았다.
곽천후가 추구하는 검도, 능허가 알게 모르게 걷고 있는 검도.
각자의 특색이 뚜렷했다.
천무백은 그 검도를 보며 새로운 부분에서 소소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천무백은 작은 것에서도 큰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대종사의 경지를 수백 년 전에 넘지 않았던가.
‘성향에 따라 검의 흐름이 묘하게 달라지는구나.’
천무백은 이미 오래전 검신의 경지에 올랐고, 더는 검에 대해 알 게 없다고 여긴 적도 있다.
물론 매번 저승길을 넘기 전, 그 달걀 놈에게 패배하면서 그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긴 했다.
다만 아직도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작은 깨달음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천무백은 한편으론 희열을 느꼈다.
아직 자신이 검극에 이르지 못했단 사실보다도, 더 나아가고 깨달을 게 많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검의 끝. 멀지만, 정말 닿고 싶은 곳이다.’
천무백의 눈이 타올랐다.
* * *
천무백은 굳이 빠른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
잘 닦인 관도를 따라 움직였다. 경공을 이용해 움직일 게 아니라면 당연히 관도로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른 법이다.
관도를 따라가면 응당 대도시를 거쳐 가기 마련이다. 의창을 거쳐 형주에 도착했다.
형주에서부터는 호북성을 사방팔방으로 가로지르는 장강과 무수히 많은 지류를 이용해 배를 타고 곧장 하남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온 김에 동쪽의 무한에 들려 동정호 구경이라도 할까 했지만, 모두 관심이 없었다.
천무백이야 수도 없이 봤고, 곽천후는 소림으로 가는 길이 급했으며, 능허도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게 편안한 여정이 이뤄지며 도착한 형주에서 천무백은 기이한 열기를 느꼈다.
호북성은 큰 성인만큼 무림인도 많다. 중원에서도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장강이 관통하다 보니 인구가 많다. 그중 강호인들이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데 비슷한 무복을 입고 도시를 황급히 움직이는 모습은 흔히 보는 광경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무복이 제갈세가의 무복임을 떠올리면 말이다.
“제갈세가 아닙니까?”
“맞다.”
“크으. 신기하네요. 제갈세가 말만 들었지, 무사들 수준 꽤 대단해 보입니다.”
“괜히 오대세가겠느냐.”
천무백은 굳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나 곽천후는 조금 굳은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도시에 들어올 때부터 시선이 따라 붙었다.”
“알아.”
“가만히 내버려둘 건가?”
“자연스럽게 행동해. 낯선 강호인이 들어오면 일단 쳐다보는 게 강호인들 특징 아니겠어.”
천무백이 그리 말하니 곽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 역시 굳이 나서지 않았다. 목적이 있으면 저 시선 중 누군가가 다가올 테니까.
능허는 객잔에 들리기 전에 주위에서 몇 가지 소문을 가지고 왔다.
“뭐 제갈세가뿐 아니라 무림인이 좀 많은 이유가 있답니다. 근방에 마인이 나타났다는데요?”
“마인?”
“네. 피해자도 제법 되다 보니 근방 백도무림이 나섰답니다.”
“곧 잡히겠군.”
제갈세가마저 움직였으니까.
천무백은 그리 생각하고 곧장 객잔으로 향했다.
“어?”
늘 큰일에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곤 했던 천무백이, 약간 흠칫하는 목소리를 냈다.
능허가 무슨 일인가 싶어 객잔을 바라봤다.
커다란 마차가 객잔 옆에 정차되어 있고, 커다란 수레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깃발.
능허가 천무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네 표국 아닙니까? 청성표국?”
청성표국의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