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08화>
108. 어째, 대가리 한번 해 보실?
곽용은 미간을 좁힌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천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
마류칠종.
그 단어에 곽용은 몇 가지 의문이 곧바로 떠올랐다.
정마대전 직후 모습을 감춘 마류칠종 중 하나가 어째서 혈귀곡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는가가 첫째 의문.
또 정마대전을 겪었던 사람들 대다수도 들어본 적 없는 마류칠종을 이제 약관도 안 된 천무백이 어찌 아느냐는 게 둘째 의문이었다.
첫째 의문은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고민을 접어둬도 된다. 고작 혈귀곡의 인물인 십성이 마류칠종의 암종 출신인 것만 밝혀진 것이니까.
차차 시간을 두고 면밀히 알아봐야 한다.
다만 둘째 의문은 당장 해결 가능했다.
곽용은 눈앞의 천무백을 쳐다봤다.
읽히지 않는 얼굴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표정에서 그 사람의 성향과 특징이 조금씩 드러나기 마련이다. 오래 살아온 곽용은 그런 걸 파악하는 데 능했다. 그저 싸움만 잘하는 싸움꾼이 아니란 얘기다.
‘모르겠군.’
하나 그런 그도 천무백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놈인지, 믿을 만한 녀석인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천무백이 맨 처음 이곳에 와서 했던 말대로 이뤄졌단 사실이다.
‘이번 혈사에 대해 완벽히 다 파헤쳤다.’
만일 천무백이 안휘로 가고 화산이 이쪽으로 왔으면 어찌 됐을까?
화산이라면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곽용은 곰곰이 생각했다. 화산파의 저력이라면 분명 이번 일에 해답을 제시했으리라.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천무백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정답에 근접할 수는 없었으라는 결론이 나왔다.
당장 여기서 곽용도 무언가 주도적으로 하지 못했다. 천무백이 먼저 움직였고, 보조적인 역할로 따라갔을 뿐이다.
‘대단한 녀석이다.’
그렇다고 한들.
마류칠종에 대해 안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곽용은 그간 궁금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사문이 어떻게 되시는가?”
사문.
저만한 기재, 아니 괴물을 길러 낸 사문과 스승은 대체 누구인가.
사문이 어떻길래 마류칠종에 대한 사실까지 전수했는가.
곽용은 기이한 열기에 찬 눈으로 천무백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가설 중 하나.
‘어르신의 후인.’
봤다.
분명히 봤다.
비검문에서 비다라들과 싸울 때, 천무백이 사용했던 무공.
‘건곤창응보. 어르신의 것이었다.’
물론 기억 속 창천검신의 보법보다야 훨씬 부족했지만, 그건 확실했다. 창천검신의 독문무공인 건곤창응보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이해가 간다.
저 나이대에 저만한 실력, 그리고 마류칠종에 대해 알고 있는 것까지.
모든 의문이 풀린다.
곽용의 물음에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과연!”
곽용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곽용이 앉은 자리에서 움찔하며 흥분했다.
“하면, 하면…… 검존, 그 친구의 제자인가? 검존은 어디 있나? 유백기, 이 자식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창천검신의 후인이란, 응당 제자로 알려진 검존의 제자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하나 천무백은 굳이 검존의 제자라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혹시 아는가.
자신이 죽고 나서 진짜 검존이 제자를 따로 길러 냈을 수도 있으니.
그러다가 마주치면 얼마나 곤란하겠나.
천무백은 검존의 제자는 아님을 못 박았다.
“제 스승은 검존이 아니십니다.”
“뭐라?”
“창천검신께서는 말년에 또 다른 제자를 길러 내셨고, 전 그분에게 진전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분이 다른 제자를 받았다고?”
곽용의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엿보였다.
천무백은 애써 그 시선을 담담히 넘겼다. 그럴 수밖에. 눈앞의 곽용이 그토록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럴 리가……. 검존, 그 녀석만큼의 재능이 아닌 이상 더는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럴 수가.”
그는 한참이나 그리 중얼거렸다. 천무백은 조금 마음에 찔렸다. 곽용의 재능도 훌륭하나 이미 검존이란 제자를 길렀던 천무백은 더는 제자를 받지 않았다. 검존만큼의 재능이 있으면 더 받겠다고 했으나, 그게 그리 쉽게 나오겠나.
곽용은 실망하면서도 정마대전이 끝날 때까지 뒤따르며 싸워 왔다.
가장 존경하는 창천검신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지로.
그랬기 때문에 천무백은 은근히 미안한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 별수가 없지 않은가.
이리 말하지 않으면 검존의 행방부터 해서 여러모로 곤란할 일이 많이 생기니까 말이다.
‘그것도 알아보긴 해야 할 텐데.’
천무백도 검존의 행방이 궁금하긴 했다.
하나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천무백은 곽용과 만남을 가진 이유를 꺼냈다.
“비검문은 적에게 노출됐습니다.”
“어…… 그래, 그렇지.”
본론이 튀어나오자 곽용은 애써 심신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했다.
“비다라를 이끌고 비검문을 대대적으로 습격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적룡방을 결국 무너뜨린 건 비검문이었고, 수룡채에서도 비검문이 목격됐으니 혈귀곡은 이번 일에 저뿐만 아니라 비검문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천무백의 말에 정신을 차린 곽용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말뜻을 파고들면 그 의미가 심상치 않았다.
곽용은 맨 처음 천무백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한배를 탄 겁니다…….’
그랬다.
그때 말 대로였다.
더구나 지금 혈귀곡의 정체.
“마류칠종 중 암종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암종 하나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다른 놈들까지 얽혀 있다면?”
“…….”
“정마대전 땐 창천검신이란 압도적 존재가 있어, 그를 중심으로 백도 무림이 뭉쳐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요?”
“그렇군.”
혈귀곡이 마교와 연관된 건 확실하다. 하나 일전의 천마신교와 같은가, 아니면 마교가 멸망하고 새롭게 일어난 마도인가는 정확하지 않다.
하나 적어도 정마대전 때의 마교라고 생각한다면…….
“……허어.”
백도무림은 백척간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하물며 혈귀곡은 지금 비검문을 적으로 인식한 상태.
비검문은 좋나 싫으나 맞설 수밖에 없다.
천무백의 말대로 한배를 탄 것이다.
“비검문 홀로 혈귀곡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곽용은 내심 분했지만 인정했다.
“맞다. 난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만, 홀로 싸우면 결론은 죽음뿐이다.”
“제가 같이 싸울 거니,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곽용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곽천후도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인데, 그보다 더 어린 천무백이 저리 말하는데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든든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비검문이 위협에 노출된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 비관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말해 주니 마음이 아프군. 자네 말대로 됐어. 한배를 탔다는 말, 말이야.”
“어찌 됐든,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적룡방이 사라졌으니 비검문은 중경성의 유일한 거대 세력이 됐고요.”
“그래서?”
곽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의 어조에서 묘한 걸 느꼈기 때문이다.
“도움을 줬으면 보상을 받아야겠지요.”
“허허. 보상이라고? 말했다시피 적룡방을 끝낸 건 비검문일세.”
“방주는 제가 죽였습니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는군. 그래, 무얼 원하나?”
“적룡방이 쓰던 장원 말입니다.”
“장원? 그 넓은 장원을 달라는 겐가?”
“아니요. 정확히는 그 장원을 제가 문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제 제안을 하나 들어주신다면요.”
“……?”
“새로운 무림맹을 결성하시지요.”
“……!”
곽용이 입을 쩍 벌렸다. 곽용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천무백은 생각했던 바를 줄줄 말했다.
“이미 비검문을 적으로 인식한 혈귀곡은 추후에 반드시 공격해올 겁니다. 비검문 홀로 맞설 바엔, 새로운 무림맹을 결성하시지요. 작금의 허울뿐인 무림맹 말고요.”
“대체 그 무슨…….”
“적룡방의 장원을 정비하고, 거기서 새로운 맹을 만드는 겁니다. 더불어 구성원은 정마대전에 참전했던 이들을 중심으로요.”
거기까지 말하자 곽용의 눈이 번뜩였다.
“정마대전에 참전했던 이들?”
“가령 이번에 사라진 성화문 같은 문파들이 강호중원에 얼마나 많겠습니까. 정마대전에 참전한 이후로 피해가 커서 제대로 성세를 회복하지 못한 중소문파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정마대전 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 싸운 게 아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중소문파들이 더 많이 싸웠고 사라져 갔다.
그들 중 남은 이들은 아직도 강호에서 무도(武道)를 걷고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맹을 결성하는 겁니다. 정마대전의 용사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 이건 곧 상징성을 가집니다. 어쩌면 새로운 정마대전으로 발전될 수도 있는 혈귀곡과의 싸움에서 이 상징성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까지 천무백이 말하자 곽용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새로운 백도무림의 연합체.
그것도 정마대전의 참전용사들이 모여 만들어진다면, 그 명성과 당위성, 권위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작금의 강호에서 정마대전에서 활약했던 영웅들은 성역화까지 되고 있으니까.
천무백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런 연합체의 맹주가 될 만한 사람은 딱 한 명이지요.”
“…….”
천무백이 곽용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거울이 없어 못 보지만, 천무백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곽용의 눈동자에 기이하게 타오르는 열망을.
“창천검신의 뒤를 따르며 싸웠던 투신.”
“허어…….”
“어째, 맹주 한번 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천무백의 웃음이 진해졌다.
* * *
곽용은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끝내 천무백의 제안을 수락했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혈귀곡이 비검문으로 적으로 인식한 상황. 하물며 혈귀곡은 마류칠종 중 하나와 연관되어 있다. 비검문 홀로 싸울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정마대전의 후인들 중심으로 연합체를 결성하라는 제안은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천무백 말대로 상징성도 뚜렷하다. 혈귀곡을 대비하는 모양새로도 적합하다. 거기에 곽용 본인이 누구나 알아주는 정마대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비단 곽용만 이득이 아니었다.
“이로써 걱정 하나는 덜었나.”
천무백도 성화문이 멸문되고 가졌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성화문처럼 평범한 중소문파로 살아가는 후인들이, 연합체로 결성하면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참사에서 성화문처럼 힘없이 무너질 일은 없으리라.
일이 결정되자 곽용은 정의맹이라는 가칭을 붙이고 곧장 연합체 창설에 나섰다.
가장 먼저 할 건 바로 강호의 지지였다.
여기서 천무백은 또 하나 제안했다.
“소림의 지지를 받으라고?”
“그렇습니다.”
“허울뿐이지만 무림맹이란 이름은 존재하고 있고, 소림은 그 수좌 중 하나다. 과연 정의맹을 지지하겠는가?”
“정마대전 때 모든 이득을 저버리고 오로지 정의를 위해 싸운 게 소림이었지요.”
“아!”
“또 정마대전의 참전용사 중엔 소림도 있습니다. 소림이 정의맹에 가입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과연.”
곽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의 말 대로였다. 소림이 지지해 준다면, 정의맹의 창설은 물 흐르듯이 이뤄지리라.
충분한 조언을 건네고, 할 일을 마친 천무백은 곧 하남으로 돌아가겠다 얘기했다.
그 틈에 곽천후가 나섰다.
“아버지, 제가 직접 소림으로 가서 지지를 받아오겠습니다.”
“…….”
곽용은 묵묵히 곽천후를 바라봤다.
그간 느낀 곽천후는 분명 성장했다. 하나 분명 조급함이 느껴졌다.
‘천무백, 그 녀석 때문이겠지.’
비슷한 나이. 하지만 천무백은 이미 훌쩍 앞서 걸어가고 있다.
중경성 제일 후기지수로 평가받던 곽천후에게는 적잖은 고통이리라.
특히 목적은 소림의 지지를 받으러 가는 것이나, 곽용은 곽천후의 생각을 꿰뚫어봤다.
자신도 저러했으니까.
소림으로 가는 건 부가적인 것일 뿐, 곽천후는 천무백의 곁을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곽용의 눈빛에 언뜻 안타까움이 스쳤다.
‘평생을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창천검신의 가르침을 받은 검존.
그는 단연코 빛나는 재능이었다. 숱한 인물들이 떠오른 정마대전 당시에도, 지금 화산파의 장문인도, 곽용 본인도.
검존이란 강렬한 재능 옆에 서면 빛을 잃었다.
한 세대에 나타난 압도적인 천재.
그의 곁에서 강호를 살아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곽용은 평생을 싸웠다.
왜 그랬겠는가.
검존을 넘어서고 싶어서. 창천검신이란 희대의 거인의 가르침을 받는 검존을 이겨보고 싶어서. 창천검신 이후의 세대에서 검존을 뛰어넘고 오롯이 서고 싶어서.
하나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곽용은 걱정했다.
정마대전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 얻은 저 늦둥이 녀석이.
천무백이란 강렬한 빛에 좌절할까 봐.
자신이 그랬듯이. 결국엔 이겨 내지 못하고 도망칠까 봐.
하나 곽용은 다부진 곽천후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좌절을 느껴봐야 이겨 내는 법도 안다.
곽용은, 부디 곽천후가 그런 사내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가거라. 가서 소림의 지지를 받아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