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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07화 (107/318)

<검신재생 107화>

107. 살고 싶다고 말해

천무백은 한 차례 전투가 끝난 후 자신 앞으로 온 서찰을 뜯었다.

일전에 하오문을 통해 청성표국에 근황을 알린 적이 있는데, 직후에 청성표국에선 곧장 이런 식으로 서찰을 보내와 연락을 통하고 있었다.

“흐음.”

여러 번 서찰이 오고갔다. 대부분은 누님인 천유하가 직접 쓴 편지였다.

청성표국의 근황부터 시작해서 가벼운 안부 인사까지.

특별히 엄청 중요한 내용이 담긴 서찰은 아니다. 거의 천무백에 대한 절절한 걱정이 녹아있는 서찰이었다.

가족에게 서찰을 받는다는 건 꽤 익숙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서찰을 읽을 때마다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비단 여기엔 천유하의 애정이 어린 내용만 있는 건 아니었다.

표국을 통해 연화루와 흑심방에 관한 내용이 종종 전해졌다. 그간 청성표국과 연화루, 그리고 흑심방까지 세 조직의 연계가 잘 이뤄지고 있었다.

“잘되고 있군.”

서찰을 읽어 보니 청성표국은 그간 크게 성장한 듯 보였다. 표사들을 새로 뽑았니, 조직을 재정비했니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평소 천유하가 보내던 서찰이 아니라 아버지인 천문경이 서찰을 보내왔다.

천유하가 제법 중요한 표행을 직접 맡아 떠난 상황이라나.

“참. 오히려 더 주책이네.”

천유하의 편지가 담담한 가운데 동생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면, 천문경의 서찰은 대놓고 애정 공세였다.

[여행 잘하고 있느냐. 우리 막둥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게 다 우리 막둥이가 잘나서 그렇지. 아들아, 근데 곧 아비 생일인 건 알고 있지? 그전에는 같이 식사라도 한번 하면 좋겠구나.]

“흠.”

천무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재정비할 시간이 좀 필요하겠어.”

집을 나선 지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열여섯 막바지 나이에 강호에 뛰쳐나온 천무백도, 이제는 열여덟이다.

그간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소림에서부터 장보도, 화산, 그리고 여기 비검문까지.

천무백은 슬슬 몸에 피로가 쌓이는 느낌을 받았다. 육체적 피로라기보단 정신적 피로였다.

물론 내공을 운기하면 숙취가 사라지듯 머리도 상쾌해지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느낌이다.

천무백이 애당초 청성표국을 크게 키우고 하남에서 세를 확장하던 혈사문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내 울타리와 기반.’

검극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강호에 칼 한 자루 품고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칼 위에 서서 걸어가는 아찔한 삶.

그 삶은 극도로 고난스럽고 피로한 일이다. 하여 언제든 마음을 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다. 그곳이 바로 청성표국이었다.

“이쪽에서 일을 다 처리하고 슬슬 돌아가야겠어.”

천무백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무렵.

밖에서 다급한 얼굴의 채가령이 휙 달려왔다.

“천 공자님!”

“치료를 끝냈느냐?”

채가령에게 사로잡은 십성의 치료를 맡겼다.

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이 영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놈이 깨어나자마자 자결을 시도했어요.”

천무백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자식이. 자살하면 죽여 버린다니까…… 또 시작이네.”

“……네?”

“지금 어때?”

“내공을 강제로 역류시켜서 자진하려 하길래, 때마침 능허 아저씨가 일단 막았어요.”

“능허 그놈이 오랜만에 밥값을 하는구나.”

능허도 내공이라면 이제 꽤 쌓았으니 내공을 역류시키는 건 일단 막을 수 있었으리라. 다만 채가령이 이리 급히 달려온 걸 보니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 * *

“주군, 이거 어떻게 좀 해 주십쇼. 이러다 내가 먼저 골로 가겠소.”

현장에 도착하자 능허가 지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입에 핏물을 머금은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십성.

그의 등에 양손을 갖다 대고 억지로 내공의 역류를 막고 있는 능허.

그도 더는 무리인 듯 얼굴이 샛노래졌다.

천무백은 곧장 손을 뻗어 십성의 몸을 두들겼다.

“……!”

눈을 감고 있던 십성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왈칵 피를 토하며 씹어 삼키려는 듯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이…… 개자식. 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단숨에 혈도를 짚어 내공의 흐름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물론 이렇게 강제로 막아 버리면 온갖 기맥이 다 뒤엉키고 꼬이기 마련이다.

한번 꼬여진 기맥은 원래대로 돌리기 어렵다. 즉,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없단 얘기다. 거기에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

추후 치료하려면 많은 약재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자칫하면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살하려는 놈 살려 준 건데, 고마워해야지. 이 새끼야.”

“이 노오옴!”

천무백이 십성의 뺨을 톡톡 쳤다.

“왜 죽으려고 하는 거야? 머릿속에 있는 얘기들 말하기 싫어서?”

십성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문을 할 테면 해 보거라! 네놈이 원하는 얘기는 단 하나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겨우 몸을 추스르며 일어난 능허가 혀를 찼다.

“이 자식, 독종인데요. 말할 바엔 자결을 계속 시도할 놈입니다.”

능허가 그리 말할 정도로 십성은 독종이었다. 고문을 해 봤자 입을 다물 게 분명했다

하나 이제야 제대로 잡은 꼬리다. 천무백도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죽고 싶어 하는 놈에겐 방도가 있지.”

“방도요? 순순히 죽여 주는 겁니까?”

“아니,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살려 주는 거다.”

“삶에 대한 의지요?”

능허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고 싶어 하니, 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 주면 그만 아니겠냐.”

얘기를 듣고 있던 십성이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냐! 이 병신 같은 머저리 같으니라고!”

삶의 목표를 이룰 가능성을 보여 줘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는 법이다.

십성의 목표가 곧 혈귀곡의 목표일 터이니, 천무백이 아직 알 수가 없다. 하니 십성은 그런 천무백을 조롱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천무백은 담담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능허와 대화를 이어 갔다.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넣어 준다는 게?”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뒤지게 패.”

“……네?”

능허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은 답지 않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너 나한테 옛날에 엄청나게 맞을 때 뭐라고 소리치면서 울부짖었냐?”

“뭐, 살려 달라고 했죠. ……어?”

능허는 순간 멈칫하고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봐. 살려 달라고 할 때까지 패면 된다니까.”

“…….”

능허는 머릿속에서 인지 부조화가 왔다. 언제든 자결을 시도하는 놈을 죽어라 패서, 살려 달란 말이 튀어나오게 한다고?

그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맞는 말이지. 뒈지게 패면 저도 모르게 살려달란 말이 튀어나온다니까. 그럼 살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어?’

왠지 모르게 그럴듯했다. 저도 모르게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묘안이십니다!”

“그치?”

“……이 머저리 놈들.”

십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나 곧 그 생각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불쑥 복부에 꽂아 넣는 천무백의 주먹.

“커헉!”

십이지장을 비롯해 모든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찔한 고통이 신경계를 타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 미, 미친.’

굳은 결의가 가득했던 십성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입가에서 침이 주룩 떨어지는 것도 자각 못 한 채 천무백을 올려봤다.

그의 망막에 커지는 주먹이 담겼다.

콰득!

“우으…… 어.”

십성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불거졌다. 파르르 떨면서 몸을 잔뜩 움츠렸다. 호흡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뜨거운 핏물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얼굴엔 온갖 통점이 다 모여 있거든. 대충 아무 데나 때려도 골로 가더라고.”

천무백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콧잔등이 풀썩 내려앉고 광대뼈가 함몰됐다. 이마가 함몰되듯이 폭 들어가고 이빨이 우수수 털렸다. 온갖 신경이란 신경이 모여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만 천무백은 집요하게 노렸다.

사람을 죽이려면 필요한 부분만 공략하면 그만이다.

하나 고통을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크게 다치지 않고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

천무백은 십성의 혈도를 몇 개 더 짚었다.

꼼짝도 못 하게 혈도를 짚은 상태에서, 감각만 제대로 깨웠다. 그리고 통점이 모여 있는 곳만 집요하게 노리니 십성은 그저 비명을 미친 듯이 내지를 뿐이었다.

빠악! 콰득!

지독한 폭력이었다.

“움, 직인다?”

넋 놓고 보던 능허가 순간 입을 벌렸다. 혈도를 짚어 움직일 수 없는데, 십성의 팔다리가 꿈틀거린 것이다. 순간 십성이 반격이라도 하는가 싶어 긴장하던 능허는 이내 맥이 탁 풀렸다.

“……본능이구나.”

혈도가 잡힌 상태에서도 팔다리가 꿈틀거리며 한 행동은, 얼굴을 무릎 사이로 깊게 파묻고 팔을 들어 머리를 막은 자세였다.

본능이 만들어 낸 자세가 그러했다. 능허는 왠지 모르게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천무백은 그런 십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쏟아 내며 소리쳤다.

“살고!”

뻐억!

“싶다고!”

빠각!

“말해!”

“……살, 살려…….”

“살고 싶다고 말해!”

“살, 살려 줘!”

그 굳은 의지가 처참하게 부서져나가는 장면을 보며 능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수위 조절하면서 깐족대자. 자칫하면 골로 간다.’

깨달음이었다.

* * *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의지는 다시 굳게 세우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천무백은 이미 무너진 의지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짓밟았다.

사실 폭력만으로 사람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더구나 무공을 깊게 익힌 무림인이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 천무백의 폭력은 달랐다.

그의 손에 담긴 공력은 항마의 기운이 가득한 경천혼공이다. 하물며 거기에 선근경의 구절을 외운 이후 미약하나마 선기가 담겼다.

마공을 익힌 십성과 극상성이었다. 하니 한 번의 충격이 전해질 때마다, 십성은 단순한 고통뿐 아니라 그가 평생을 익혀 온 무학의 뿌리부터 공격당하는 기분이었을 거다.

하니 십성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천무백은 최대한 필요한 정보를 캐냈다.

하나 천무백은 기뻐할 수도, 그렇다고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마류칠종이라…….”

천무백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노을이 드리워지는 방향, 서쪽이었다.

저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서장이 나오고, 천산이 나온다.

십마대산, 마교의 본거지.

마류칠종(魔類七宗)

사람들은 마교가 하나의 단일 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연히 아니다.

고작 일개 단체 하나가 강호 중원을 사망선고 직전까지 몰아 붙이겠는가.

마교도 수많은 복잡한 역학관계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어떤 단체나 그 안에서는 치열한 경쟁과 분쟁, 상쟁이 있기 마련이다.

마(魔)를 탄생시킨 일곱 개의 거대 종단.

그것을 마류칠종이라 한다.

그리고 십성은 그 마류칠종 중 하나, 암종(暗宗) 출신이었다.

천무백은 전생을 건너 다시 한번 이어지는 마교와의 악연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생에 끝내지 못한 것…….”

아마 현생에 끝내야 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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