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06화 (106/318)

<검신재생 106화>

106. 자살하면 죽여 버린다.

천무백의 말에 십성은 당황한 채 고개를 돌렸다. 천무백을 본 십성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찌 저 얼굴을 모르겠는가. 그들에게 꽤 쓸만했던 혈사문을 멸문시키고, 혈귀곡의 간부 두명을 제거해버린 자.

“천무백!”

“오호. 알고 있구나.”

천무백의 얼굴엔 미소가 환하게 피어올랐다. 진심으로 만나서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똑같이 생겼구나. 목소리만 좀 다르고.”

소림에서 도망친 구성이란 노인네와 똑같이 생겼다.

다른 게 있다면 검이 놓인 위치와 자세였다.

“넌 왼손잡이군.”

그 자식은 오른손잡이였던 거 같은데.

“어디서 같잖은 입을 놀리느냐!”

천무백은 눈을 들어 십성을 빤히 쳐다봤다. 반가운 기색 아래, 숨겨진 포악함이 꿈틀거렸다. 그 깊음을 들여다본 십성이 순간 움찔했다.

‘눈 안에 괴물이 숨어있다!’

전신에 오한이 스며들었다. 그건 떨쳐 낼 수 있는 종류의 심리가 아니다. 온몸을 꽁꽁 감싼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먹이를 집어 삼키기 전에 몸으로 짓누르는 듯이 공포가 옭아멨다.

콰직!

십성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이 터져나가며 뜨거운 피가 목 뒤로 꿀꺽 넘어갔다. 눈만 보고 공포를 느끼다니. 이건 치욕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지독하게 위험하단 의미다.

십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휘파람을 불었다.

동시에 바닥에서 비검문 무사를 몰아치던 비다라 둘이 훌쩍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둘 다 도를 쓰는 도객이었다.

“죽여!”

왼쪽, 오른쪽에서 동시에 도가 시퍼런 예기를 쏟아 냈다. 중앙에선 십성이 검을 뽑아 들고 쇄도했다.

교묘한 공격이었다. 마치 잘 짜인 촘촘한 그물 같았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었고, 막자니 쉽지 않았다. 하나를 막더라도 하나에 당할 수밖에 없는 교묘한 협공.

십성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크게 칼 한 방 먹여 주면, 근래 소문이 자자한 천룡검협도 비다라로 만들 수 있으리라!

투신 곽용, 투귀 곽천후, 천룡검협 천무백까지.

셋을 모두 비다라로 만들면 십성은 혈귀곡 내에서 오성과 맞먹는 영향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두 눈동자에 탐욕이 넘실거렸다.

천무백이 웃기 전까지는.

“썩 화려한 인사야.”

천무백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십성이 희열에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옳거니!”

앞에선 공격, 뒤에는 지붕 밑으로 떨어지는 위치니.

피할 수 있는 구석은 뛰어오르는 것뿐.

하나 그건 치명적인 실책이다. 위로 뛰면 반드시 낙하할 수밖에 없다. 낙하할 때 공격을 피할 수 있는가? 불가능이다.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걸려들었단 생각에 십성의 검이 쾌속하게 내질러졌다.

하나 그때였다.

“……!”

천무백의 발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땅을 딛고 보법을 밟는 듯했다. 십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허공에서 건곤창응보를 밟은 천무백은 그대로 발을 뒤로 뺐다가 후려갈기듯 뻥 찼다.

콰득!

달려들던 비다라의 턱이 그대로 우지끈 깨지며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아무리 비다라라고 한들, 스스로 사고하고 인지하는 만큼 뇌가 중요했다. 턱을 발끝으로 차올리니 순간적으로 뇌진탕이 와서 중심을 잃고 지붕에서 뚝 떨어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단숨에 하나를 해치운 천무백은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까가가가강!

십성의 검과 비다라의 도가 불똥을 튀기며 얽혔다. 하나 엄청난 반탄력에 십성은 충격받은 얼굴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비다라만이 억지로 달라붙었다. 그때 관자놀이를 손등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꽈앙!

“……!”

흡사 망치로 머리를 후려갈긴 듯 둔중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비다라는 그대로 날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쏟았다. 볼 것도 없다. 다시 소생할 수 없다. 완벽한 죽음.

“너…… 대체…… 천룡검협이…… 이정도인가?”

십성의 눈에 불신의 빛이 한가득 어렸다.

도대체 어느 정도 무력이어야 비다라 둘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천무백을 상대한 비다라 둘이 가장 약한 축에 드는 편이었다. 그 둘은 생전에 간신히 절정고수의 문턱을 밟았으니까.

곽용을 상대한 세 명의 비다라가 절정에서도 상급의 무사였음을 고려하면, 차이는 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리 쉽게 상대할 수는 없다.

‘본 곡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

혈귀곡의 판단에 천룡검협의 무력은 절정에서도 최상급.

구파일방의 장로중에서도 최상위, 대장로에 근접한 실력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평가임이 분명했다.

고작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청년이 구대문파의 대장로에 근접한 수준이라니!

하나 직접 목격한 십성은 그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했다.

‘이미 대장로급은 된다!’

하면 자신은 천무백의 상대가 되기 어렵다. 기껏해야 비등하다는 것이 자존심을 생각하면 간신히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십성은 급히 머리를 굴렸다.

‘몸을 뺀다!’

결론에 도달한 십성이 휘파람을 불었다. 비검문을 몰아치던 비다라들이 거짓말처럼 몸을 빼며 천무백에게 달려들었다.

그 숫자가 무려 넷!

곽용에게만 둘이 붙어 있을 뿐, 살아남았던 나머지 넷이 모두 천무백에게 달려들었다.

각자 팔, 다리 하나씩을 노리는 공격을 뿌리며.

그사이 퇴로를 모색한 십성은 곧장 몸을 뜨려고 했다.

한데 그때였다.

천무백은 백회혈을 크게 열었다. 상단전이 꿈틀거리며 공력을 울컥 토했다. 공력을 목소리에 담은 채 천무백은 사자후를 터뜨리듯 외쳤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의지하오니, 끼치는 복은 이루 말할 수 없노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널리 구제하노니, 무량보도인이라!(无量普度天人)”

차분하되 공력이 실린 목소리.

하물며 그것도 항마의 기운이 가득한 경천혼공의 공력이다. 선근경을 꾸준히 외워 어느덧 묘한 선기가 담긴 공력으로 천무백은 선근경에 담겨 있던 구절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좌중의 중인들이 갑작스러운 천무백의 외침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어지는 상황에 경악했다.

달려들던 비다라들이 순간 움찔거렸다.

‘통했다!’

곧장 다시 움직였지만, 그 잠깐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흐아압!”

곽용은 비다라가 움찔한 순간 단숨에 둘의 목을 베어냈다.

쏟아진 대검이 단숨에 머리를 잘라 냈다.

천무백 역시 비다라들이 움찔한 순간,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천무백이나 곽용 같은 고수들에겐 아주 잠깐의 찰나가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제아무리 무서운 적이라도 동작이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면 동작 사이에 틈이 생기기 마련.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천무백은 단숨에 비다라 셋의 목에 구멍을 내줬다.

나머지 하나만이 살아남아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천무백은 그의 가슴을 발로 뻥 차며 날려 보냈다.

동시에 발로 찬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어딜 도망가!”

천무백이 그리 외치며 십성의 뒤를 순식간에 점했다.

공중에서 천무백은 검을 쭉 내질렀다.

날카로운 기세가 검신을 타고 쏘아졌다.

“이익!”

십성이 급히 바닥에 착지하더니 곧장 반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천무백의 본래 목적은 달성했다. 도망치려던 십성의 발을 바닥에 묶어 두는 것이었으니까.

십성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곧장 검을 뽑아 검기를 흩뿌렸다.

마치 채찍처럼 길고 가느다란 검기가 휘둘러지듯 후려쳤다.

콰직!

주위에 있던 비검문 무사 하나가 검기에 휘말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사이 십성이 다시 도망치려고 땅을 박찼다.

“으랏차!”

후우웅!

그때 왼쪽에서 훅 들어오는 찌르기에 십성은 적잖이 당황하며 물러섰다. 막기에는 위협적이었고, 피하기에도 너무 빠른 찌르기였다.

마치 평생을 찌르기만 연마하면 저런 위협적인 공격이지 않을까 싶은 찌르기였다.

십성의 선택은 결국 나려타곤이었다. 비루한 당나귀처럼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자 찌르기를 해 온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독안사 능허시다!”

“뭔 개잡놈이!”

십성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제는 별 같잖은 녀석도 나서는구나!

머릿속에 불쑥 드는 한탄도 잠시, 십성은 급히 몸을 굴렸다. 허공에서 뚝 떨어진 천무백이 순식간에 도달했다. 십성의 눈이 암울해졌다.

‘빠르다!’

이미 거리가 완전히 좁혀진 터.

도망가기란 글렀다.

그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천무백이 근접한 순간, 그는 웅크린 몸을 펼쳐 대며 품안에 있던 무언가를 쏟아 냈다.

강호를 살아가는 누구나 비장의 한 수쯤은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가령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만한 기책 하나쯤은 갖고 있다.

웅크린 몸을 펴며 꺼내든 건 동그란 장식물 같았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그물이 둥글게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하나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섬뜩한 예기를 줄줄 흘리는 날붙이가 안에 한가득이었다.

십성이 공력을 불어넣자 겉이 팽팽팽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안에 있던 날붙이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

쉐엑! 쉐엑! 쉐엑!

독기를 머금은 수백, 수천 개의 암기가 흡사 만천화우처럼 쏟아졌다.

천무백이 곧장 근접해 왔기에 그 모든 날붙이가 천무백에게 집중됐다.

제아무리 강대한 고수여도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 찰나에 쏟아지는 공격에 절명할 수밖에 없을 터!

십성이 그리 생각할 때, 천무백을 둘러쌌던 녹의장포가 거칠게 펄럭였다.

까가가가가강!

수백, 수천으로 나뉘어 쏟아진 날붙이가 우수수 막혔다. 장포에 박히지도 않고 마치 강철을 두드리듯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

십성의 눈이 벌게졌다.

펄럭이는 녹의장포.

그게 무엇인지 잘 알았다. 해남의 영물인 녹표(綠豹)의 가죽으로 만든 신병이기 중 하나다. 웬만한 도검도 뚫지 못하는 도검불침의 녹의장포.

그건 불과 얼마 전까지…… 당준파에게 있었는데.

“네놈이었구나?”

십성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십성은 중경성의 일이 비검문이 주도해서 한 짓으로 여겼다. 적룡방을 멸문시킨 건 비검문이었고, 수룡채에 비검문도들이 목격되지 않았나. 비검문이 혈귀곡의 꼬리를 잡았다고 여겼다.

하여 십성이 직접 가용할 수 있는 비다라를 모두 이끌고 비검문을 습격한 것이다.

한데…….

당준파를 죽인 건 비검문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천무백이었다.

그리고 혈귀곡의 꼬리를 잡아 유인한 것도.

“너였구나!”

십성이 거칠게 탄식을 터뜨렸다. 여기서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던 비장의 수도 저 녹의장포에 처참하게 막혔다. 천무백은 장포를 거둬들이며 검을 겨눴다.

십성은 아연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곽용이 마지막 남은 비다라의 목을 베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뿐인가.

곽천후를 비롯한 비검문도들이 모두 성난 얼굴로 포위를 해 왔다.

싸움은 끝났다.

이렇게 포위당한 이상 벗어날 방법은 없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천무백 하나를 상대할까 말까인데, 옆에는 투신 곽용이 있다.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 명성.

그를 상대하려면 오성중 일인이 직접 와야 한다.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 줄 수 없다.

처음으로 노출된 혈귀곡이다.

‘그간 이놈이 우리를 추적해 왔구나!’

그간 해 왔던 일이 어디서부턴가 어긋났다. 하남의 소림에서부터 섬서의 혈사문까지.

가만히 생각하면 그 모든 일에 천무백이 있었다.

여기서 순순히 잡힌다면, 그 끝이 좋지 않으리라. 십성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에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독단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독단을 씹었다. 천무백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아니, 씹으려고 했다.

“……!”

천무백의 검이 쭉 뻗어왔다. 머리를 관통하듯이 내질러지는 검격.

검은 순식간에 볼을 파고들어 찢어버리더니, 이내 어금니를 그대로 찍어버렸다. 잇몸이 쩍 벌어지며 독단이 툭 떨어졌다.

잇몸의 신경을 짓이겨 아찔한 고통이 머릿속을 파고들며 십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무백의 묵직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살하면 죽여 버릴 거야.”

……자살 대신 타살을 선택하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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