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05화 (105/318)

<검신재생 105화>

105. 보고 싶었다.

천무백은 당준파를 앞에 놓고 선근경을 펼쳤다.

“…….”

문장 한 줄, 글자 하나, 획 하나에 현기가 느껴진다.

어째서 도경이 성물로 취급받는지 일견 이해가 가는 고아한 기운이다.

선기.

선근경에서 느껴지는 고아한 기운은 바로 선기였다.

오랜 시간 도를 쌓은 도사들에게서나 간신히 느낄 수 있는 선기가 가득했다.

다만 천무백에겐 그뿐이다.

특별한 무학이 담긴 것도 아니다. 풍운검군 종리홍의 말에 따르면 오성물이 모여야 하니, 지금으로선 좀 대단한 도경에 불과하다.

‘생사의 이치가 담긴 선근경. 과연 도움이 될까.’

선근경에 적힌 내용은 범상치 않았다.

생명의 탄생과 끝맺음.

생사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절절히 녹아있었다. 그중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암호 같은 문장도 있었고, 읽자마자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내용도 있었다.

천무백은 한글자, 한글자 경천혼공을 이용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읊었다.

그때, 마침 당준파가 깨어났다.

그는 천무백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짓을 하느냐.”

천무백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읊었다.

선문답 같은 내용이 천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준파는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혈을 짚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그대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으음?”

당준파는 침음을 내뱉었다. 천무백이 소리 내 암송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문장에는 선기가 담겼다. 선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며 향긋한 향을 풍겼다. 그 향에 취해 당준파의 눈빛이 점점 떨렸다.

기이한 열기와 광기에 차 있던 눈빛이 차츰 연해졌다.

넘실거리던 귀기가 힘을 잃은 듯 떨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무백이 끝내 선근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을 마쳤을 때.

당준파는 침묵했다. 눈빛에 가득했던 지독한 광기가 아직은 남아 있었지만,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천무백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게 되네?”

* * *

선근경은 중원의 도학을 대표하던 전진교의 성물이었다.

왕중양이 신선에게 받은 가르침을 적힌 글이니, 이 글에는 알 수 없는 깨달음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선근경이 비다라가 된 당중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단 사실이다.

‘하지만 비다라는 이미 죽은 자를 되살린 것. 비다라에 벗어나는 게 곧 죽음에 이를지는 모르지.’

그래도 가능성을 봤으니 해 봐야 아는 일이다.

어느 정도 효과를 봤으니까.

물론 아직도 비다라의 맹목적인 의식을 고치진 못했다.

다만 저 광기가 다소 옅어진 것만 해도, 선근경에 담긴 선기가 분명 영향을 끼쳤음은 확실했다.

계속 시도해 볼 만했다.

천무백은 수도 없이 선근경을 달달 읊었고, 당준파는 묵묵히 들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천무백을 대신하여 채가령이 나섰다. 비다라에서 벗어나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단 얘기를 했지만, 채가령은 굳게 마음먹고 직접 선근경을 매일 같이 암송했다.

“지금의 모습은 제 스승님이 아니에요.”

채가령은 어려운 문장은 천무백에게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집중해서 선근경을 읊었다.

그러다 보니 천무백은 선근경을 통째로 외웠다. 머릿속에 모든 구결이 비석에 새기듯 새겨졌다.

단순히 암기에 그치지 않았다. 채가령의 물음에 문장을 풀어서 얘기해 주고, 지금은 쓰지 않고 사라진 글자의 획풀이까지 해 주면서, 천무백은 선근경을 깊게 파고들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누구보다 선근경에 해박해졌다.

‘허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선근경의 효능이 체감됐다.

‘내공이 순탄해지는구나.’

천무백이 경천혼공을 운기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악기의 운율에 따라 상단전의 백회혈이 크게 자극된다.

어떤 곡조를 연주하냐 따라 갖은 영향을 받아 들어오고 나가는 기의 흐름이 확확 변한다.

거기에 선근경의 구절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상단전에서 공급되는 공력에 선기가 담겼다.

물론 당장은 눈에 띄는 극적인 효능은 아니다. 거대한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만 여러모로 가능성을 봤다. 천무백의 경천혼공도 정종무학의 한 갈래였지만, 선기는 전혀 다른 종류였으니까.

천무백은 관심을 가지고 이 선기를 분석했다.

하나 그는 선근경이 경천혼공에 미치는 영향력을 추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다급한 기색으로 달려온 능허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주군, 당장 비검문으로 가야 합니다! 비검문이 습격당했습니다!”

비검문의 습격. 급한 얼굴로 들이닥친 능허와 달리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꼭꼭 숨어서 뒤에서 암약하던 혈귀곡.

드디어 유인책에 걸려들었다.

“가자.”

* * *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이 악적 놈들!”

곽용의 사자후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나 사자후가 더 퍼져나가기도 전에 두 개의 검과 하나의 도가 거칠게 얽혀 파고들었다.

곽용이 무언가 명령조차 내리지 못하게끔 쏟아지는 연이은 공격.

공격 하나, 하나에 무시무시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쩌저저저적!

곽용이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쳐냈다. 불똥이 튀며 강렬한 기파가 주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여섯 명의 습격자들이 비검문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때마침 비검문의 장원에 머무르던 무사들의 숫자는 고작 스무여명.

비검문의 규모가 작다고 한들, 스무 명이란 숫자는 비검문 전원이 아니었다.

‘하필 이 때!’

비검문의 무사 대다수가 중경성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적룡방의 뒤처리를 위해서, 수룡채를 감시하기 위해서, 나머지 혈사를 조사하기 위해서.

장원에 남은 이는 곽용, 곽천후 부자와 무사 스무여 명이다.

그에 반해 적은 딱 열 명이다.

하나 곽용은 싸움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습격자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당장 곽용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세 명과 싸우는 것만 해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쾅! 콰앙!

검과 검의 충돌.

한낱 날붙이의 충돌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을 정도로 기파가 마구 쏟아졌다. 그 충격으로 담장이 우수수 무너지고 건물의 지붕이 풀썩 내려앉았다.

곽용은 저 지붕 위.

비열한 미소로 내려다보는 새하얀 백발을 바라봤다.

“네놈이 백모쌍귀구나!”

백모쌍귀.

그렇다면 이 나머지 아홉 명은…….

‘비다라인가?’

곽용은 탄식을 토했다. 아홉 명의 습격자 중에 도관을 쓴채 매화향이 나는 검을 뿌리는 호선자를 봤다. 심지어 곽용이 상대하는 이중 하나는 정종무학이 확실한 공력을 뿌리는 중이었다.

한데 표정들을 보면 모두 얼굴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일생일대의 대적을 만난 듯,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가 담겼다.

곽용은 원한은커녕,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다.

“정녕 비다라라는 게 위험한 놈들이로구나!”

곽용은 그리 탄식을 토하며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검에서 무지막지한 공력이 새파랗게 맺혔다가 순간적으로 발출됐다.

까가가강!

달려든 비다라 셋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곽용이 비다라 셋을 상대하는 동안.

곽천후도 분전하고 있었다.

달려든 비다라 하나를 완벽하게 묶어 두면서, 비검문도가 위험에 빠지면 벼락처럼 달려들어 구원에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지붕이 백모쌍귀의 동생이자 혈귀곡의 십성(十星)은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과연 비검문이란 말이지.”

비다라 아홉이면 웬만한 문파 하나가 아니라 열 개는 멸문시킬 위력이다.

비다라는 단순히 죽어버린, 절정의 무인을 소생시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혈귀곡의 연구 끝에 마기를 주입하여 더 강력한 존재로 탄생시켰다.

한데 곽용은 홀로 셋을 상대하고 있었고, 곽천후는 하나쯤은 간단히 상대하면서도 나머지 비검문을 구원중이었다.

“과연 부전자전이라더니.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투신의 명성과, 후기지수 중 이름 높은 투귀구나!”

말은 그리 했지만, 십성의 얼굴엔 단 조금의 조급함도 어리지 않았다.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 모습이 눈꼴 시렸을까.

곽용은 분노를 토하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쏟아 냈다.

콰가가가강!

곽용의 대검은 거대한 크기를 보건데 압도적인 파괴력은 당연해 보였다. 하나 많은 이가 착각하는 게 바로 속도였다.

저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엄청난 속도.

상황과 상황사이에 파고들고 찌르는 대검에 비다라 하나의 팔이 싹둑 잘렸다.

한데도 비다라는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돌진해 왔다.

“이 미친놈들!”

곽용은 돌진해 오는 놈의 머리를 그대로 쪼갰다.

동시에 양옆에서 곧장 공력이 쏟아졌다.

검을 회수할 수 없었다. 곽용은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온몸에 새겨지는 상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곽용의 무력에 십성은 이대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음을 느꼈다.

아직은 여유로웠지만, 곽용은 벌써 비다라 하나를 해치웠다. 곽천후도 잘 짜인 그물망 같은 협공으로 비다라 하나를 해결했다. 벌써 아홉 비다라 중 둘이 당한 상태.

물론 지금의 비다라는 거의 실험체에 가까운 성격이지만, 이들이 곧 십성의 든든한 힘이 되어 줄 터.

“이대로 여기서 저 두 놈을 죽인다. 투신과 투귀를 비다라로 만들어 내 휘하에 둔다면…… 흐흐. 준비하거라.”

“예.”

새하얀 무복을 입은 사내가 옆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만일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호남에서 창 하나로 두 손안에 든다는 거령극(巨靈戟)이었으니까.

십성의 명령에 거령극은 두말하지 않고 훌쩍 뛰어 곧장 곽용에게 쇄도했다.

달려나가는 힘을 그대로 창끝에 실었다.

길쭉한 창날이 단숨에 공간을 가로지르고 곽용의 허벅지를 찔렀다.

쉐에에엑!

곽용은 대경하여 급히 대검을 휘둘러 막았다. 다만 대검의 특성상 기습적인 하단 공격을 쉬이 막을 수는 없던 터.

곽용은 있는 힘껏 기운을 끌어올려 기파를 휘두르듯이 쏟아 냈다. 훌륭한 임기응변이다.

하나 그것만으로 거령극의 창끝에 담긴 힘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자마자 곽용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하나 그 잠깐의 찰나 몰아붙이던 비다라 둘까지 협력해 다시 셋이 어지러이 얽혀져 왔다.

하나의 검, 하나의 도, 하나의 창.

세 개의 각기 다른 병장기가 상단, 중단, 하단을 노리고 쏟아지자 천하의 곽용도 쓴물을 삼켰다.

이전의 두 비다라는 그래도 완전히 하수였다.

하나 지금 창을 쓰는 거령극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일대일로 겨뤄도 적어도 백합까지는 충분히 싸워 볼 만한 실력자.

‘이런…….’

곽용의 눈에 아찔한 기색이 스쳤다.

아직까지 충분히 상대할 만하지만,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벌써 비검문 무사 셋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중과부적.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하나 상황은 좀처럼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 거령극의 창끝이 미친 듯이 파고들어 곽용의 움직임을 꽁꽁 묶었다.

이제는 체력싸움.

이대로 곽용이 체력과 공력이 고갈되면, 여기서 싸움은 끝난다.

곽용의 눈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고작 이딴 쓰레기들한테!”

자신이 누구였던가.

그 대단한 창천검신의 뒤를 십 대 애송이 시절부터 따라다닌 역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곽용이 분노를 토하는 순간.

아주 미세한 빈틈이 드러났다.

그리고 거령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빈틈을 노리고 창을 쭉 뻗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파고들었다.

곽용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뿔싸! 내가 흥분했구나!’

이대로라면 큰 치명상을 입을 터.

‘이렇게 된 이상,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육참골단의 결정을 내린 곽용이 그대로 거령극을 베려는 순간.

서걱!

기세 좋게 파고들던 거령극의 머리가 순간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

지붕 위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십성의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반월형의 검기.

거령극은 반응도 못한 채 무표정의 얼굴 그대로 목이 잘렸다.

“뭐, 뭐야.”

기세도, 기척도, 검기가 날아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한번 끔뻑이니, 검기가 날아와 목을 베었다.

그 아찔한 섬뜩함에 십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때였다.

터벅.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기척.

십성의 몸에 벼락이라도 친 듯 전율하는 순간.

“야. 보고 싶었다?”

묘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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