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04화>
104. 생사의 이치
빠각!
천무백은 당준파의 뒤통수를 크게 후려쳤다. 혈을 짚어 기절시키는 방안도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귀기가 넘실거리고 광기에 찬 눈을 보니 썩 불쾌했다.
오로지 죽은 자신을 소생시킨 혈귀곡에 대해 그저 맹목적인 신앙이 보였다.
하기야 의원한테는 그럴 만도 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의술이라니.
‘뭐, 그걸 떠나서 비다라는 주인에 대해 맹목적이지.’
결론을 얻었다. 엉킨 실타래 같던 의문이 한 번에 풀렸다. 천무백은 슬쩍 채가령을 바라봤다. 천무백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도 일견 이해한 표정이었나 아직도 믿기지 않은 기색이었다.
“강시도 아닌 비다라…… 그런 게 존재한다고요?”
“그래.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정말이었다.
비다라에 관해 들은 건 전생 중 하나였다. 고대 천축에서 왕위를 놓고 싸울 때 비다라를 소생시켜서 이용했다는 기록을 본적도, 소문을 들은 적도 있다.
하나 그것을 중원 땅에서 보게 되다니.
더구나 지금에 와선 아는 사람도 없을 터인데. 불경을 해석해서 실제로 비술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무백은 혈귀곡에 대해 혐오감이 들면서도 감탄스러웠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걸 해내기 위해 전력하는 모습이 지독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만일 바다라에 대해 몰랐다면 어땠을까.
어느 순간 혈귀곡이 본격적으로 몸을 드러냈을 때, 어쩌면 크게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게 됐으니, 이 사실을 백도 무림에 전달하면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비다라를 되돌려 낼 방법인데.’
죽이는 것밖에 없을까.
이 부분은 아마 좀 더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소림에 가서 상의를 해 보든지.
“주군! 괜찮습니까!”
그때였다.
밖에서 능허의 외침이 들려왔다.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새끼. 배나 지키고 있으라니까.”
천무백이 기관진식 사이를 성큼성큼 뛰어나가 보니, 밖에는 능허와 연소운이 수적들과 대치중이었다.
몇 번 싸웠는지 바닥에는 수적들의 시신이 몇 구 놓여 있었다. 반면 능허는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왜 허세를 부리고 있냐.”
“흐흐흐. 주군 나오실 줄 알고 기다렸죠.”
“배나 지키고 있으라니까?”
“아니, 무슨 천둥이 치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난 또 뭐 산사태에 깔리는 줄 알고 미친 듯이 달려왔네. 어라. 그 장포는 또 뭡니까. 꽤 좋아 보입니다.”
“됐다”
천무백은 녹의장포로 몸을 가린 채, 기절한 당준파를 손에 들곤 터벅 걸었다.
당준파의 얼굴을 확인한 수적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주춤 물러섰다.
“귀찮군.”
“어떻게, 제가 다 치울까요?”
“그럴 수는 있고?”
“뭐 절반쯤은 어찌해 볼 수 있겠습니다.”
능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 본인 실력에 자신감이 찬 발언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싸워야 하면 싸우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피곤했다.
천무백은 한 걸음 나아가 외쳤다.
“부채주가 누구냐.”
“……나다.”
“네가 원래 채주였지?”
“……!”
부채주는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놀란 얼굴이었다.
“당준파는 죽었었지?”
“그걸 어떻게?”
“닥치고 대답이나 해. 죽고 누가 살렸냐?”
잠시 망설이던 그는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모른다. 죽었다길레 시체를 태우러 갔었는데 이미 늦었다. 뒤처리하러 간 내 수하들을 독으로 녹여 버렸다.”
“이미 혈귀곡에서 살려 놓고 딴 데 간 건가.”
하긴, 비단 당준파뿐이 아니라 흉수는 네 명이니까.
천무백이 미간을 좁히자 영 좋지 않은 신호로 받아들인 부채주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만, 정확히는 몰라도 낯선 이를 봤단 수하는 있었다.”
“뭔데?”
“새하얀 백발이라는 점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순식간에 사라졌으니까. 쫓아가지도 못 했다.”
새하얀 백발. 빈약한 단서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무백은 순간 웃었다.
너무 환한 미소라 오히려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천무백은 기꺼운 얼굴로 말했다.
“너 그거 말해 줬으니 살려 주마.”
“…….”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당준파는 내가 해결해 줬으니까, 넌 채주 자리에 오르는 거고.”
“……!”
“그러니까 길 비켜.”
부채주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천무백은 예상대로였다. 당준파에게 채주 자리를 빼앗긴 놈이다. 당준파에게 충성을 다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노예처럼 근맥을 잘라놓고 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던 놈이었으니까. 그러니 부채주에겐 오히려 기회다.
“길을 열고 배를 내놓아라. 물론 배를 끌 사람도.”
“하면…… 그냥 갈 것인가?”
“왜. 다 죽여 주랴?”
“아니, 아니다.”
“길 열어. 내가 원했던 목적은 이놈이고, 다 이뤘으니까. 서로 괜한 피를 볼 필요가 있겠어?”
수적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천무백이 선착장까지 단번에 뛰어넘는 신기와 이내 괴물 같던 당준파를 저리 기절시킨 무위를 보건데, 수적들은 막을 의지 자체가 꺾여 버렸다.
부채주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길을 열었다.
“배를 준비하겠다.”
“좋은 자세야.”
천무백이 씩 웃었다.
수적들이 분분히 길을 열었다. 능허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대로 갑니까?”
“가야지 그러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능허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당준파는 혈귀곡에 의해서 여기 채주자리에 앉은 거고, 그놈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예? 대체 왜요?”
“비다라라는 거다. 대충 강시 같은 거라고 생각해라.”
“강시라고요? 이게?”
“비슷한 거다. 하여튼 이놈을 채주 자리에 앉혔던 게 혈귀곡이다.”
“하면…….”
“수룡채는 가릉강을 꽉 쥔 수적떼다. 그곳의 채주가 바뀌었다. 이쪽 바닥에서 채주가 다시 바뀌었단 소문이 퍼지겠지.”
“아!”
능허가 감탄을 터뜨렸다.
“하면 혈귀곡이 찾아오겠군요?”
“적어도 백모쌍귀 그놈은 올 거다.”
천무백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새하얀 백발.
당준파를 이리 비다라로 만든 건, 백모쌍귀의 동생 놈이다.
일전에 적룡방을 찾아가 그놈 말이다.
아마 그의 귀에 여러 얘기가 들어갔으리라.
적룡방은 멸문당했고, 수룡채의 채주마저 바뀌었단 소식을 접했으면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낄 게 분명하다.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려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하니 천무백은 이제 기다리면 그만이다.
“능허야. 개방이든 하오문이든, 아니면 비검문이든. 있는 힘껏 다해서 수룡채 감시해.”
“알겠습니다. 천후 놈에게 부탁 좀 하죠, 뭐.”
“그새 친해졌구나?”
“친해지긴. 그 어린노무 자식 나만 보면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게 예절교육을 국 말아 처드셨나 싶다니까요.”
“왜 말하면서 날 봐?”
“왜요, 찔리십니까?”
“진짜 칼에 찔리고 싶니?”
“죄송합니다.”
* * *
“잘 있었습니까?”
천무백은 곽용의 앞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소식을 듣고 금세 달려온 곽용은 턱 끝으로 기절해 있는 당준파를 가리켰다.
“저놈이 흉수냐?”
“섭진문을 멸문시킨 양반입니다. 활력의 당준파. 무취의방 출신이죠.”
“의원이란 말이냐?”
“지금은 수룡채의 채주고요.”
“장강수로맹?”
“네.”
곽용이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은 그간의 사정을 대략이나마 설명했다. 특히 비다라에 관해 얘기할 때쯤엔 곽용은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다시 되살려서 맹목적인 명령을 받는 청부살인마라고?”
“아마 이번 혈사의 다섯 흉수가 모두 그럴 겁니다.”
“미친!”
믿기 어려운 사실이나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곽용은 이게 단순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멀쩡한 사람을 되살려 청부살인마로 만드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막말로 당장 누군가 곽용을 죽여서 그 비다라로 되살린다면, 곽용은 놈들의 맹목적인 충견이 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고, 무공까지 그대로 쓰는 놈이 말이다.
“오히려 무공은 더 늘지도 모릅니다.”
“더 는다고?”
“당준파 이놈처럼요.”
비다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언가 더해지는 게 있다.
당준파는 수적들에게 사로잡힐 정도의 무위였다.
물론 수적들은 배 위에서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방법을 따로 익혔다. 가령 몸을 던져 팔 다리를 늘어잡고, 그물로 몸을 봉한다. 직후 물속에 빠뜨렸다가 꺼내기를 반복하면 절정고수도 순식간에 제압당한다.
한데 비다라로 살아난 당준파는 수적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즉, 더 강해졌단 얘기다.
“내공이 아닌 뭔가 다른 걸 다루더군요.”
천무백은 두루뭉술하게 얘기했지만,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기다.’
단순 천축의 고대 밀교 비술인 비다라뿐 아니라, 거기에 무언가 마공이 더해졌다.
천무백이 느낀 건 분명한 마기였다.
‘혈귀곡.’
일전에 마주친 혈귀곡의 기운과 매우 유사했다.
마기인 듯하나, 깊고 중후한 마치 정종의 무학을 보는 듯한 이질감.
‘마교라.’
마기하면 떠오르는 건 당연히 마교다.
일전에 혈사문의 도문탁도 마교출신임이 분명했다. 그가 사용했던 무공이 마교에서 흘러나온 것이니까.
하나 혈귀곡의 마기는 마교와는 전혀 궤를 달리했다.
수없이 마교와 부딪쳐본 천무백이기에 확신했다.
‘하긴, 정종이어도 숱하게 나뉘어 있는데 마공이라고 다를까.’
그간의 상식으로 강호를 접하면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강호는 늘 비상식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세상이다.
그러니 천무백은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혈귀곡, 마교의 분파거나, 아니면 새로이 피어난 마종(魔宗)이거나.’
천무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저번 삶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번 삶의 강호도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을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너 이제 열일곱 맞느냐?”
“맞습니다.”
“방금 얼굴은 노인네 같았다.”
“애늙은이란 소리는 자주 듣죠.”
“하여튼, 지금 유인책을 펼치겠다는 뜻이지?”
“네. 백모쌍귀의 동생 놈이 분명 접근해 올 겁니다. 적룡방도 무너졌고, 수룡채 채주도 바뀌었고. 그가 손댄 두 군데가 틀어졌으니까요.”
천무백은 이번 혈사에 수적과 흑도가 연관된 점을 주목했다.
수룡채를 기점으로 장강수로맹을 휘어잡고, 적룡방을 비롯한 흑도도 손에 넣는다면?
혈귀곡은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강호를 혼란에 빠지게 할 만한 무력을 손에 쥐게 된다.
천무백은 혈귀곡이 굳이 흑도와 수적들에게 접근한 이유를 그런 것으로 추정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놈들이니, 최대한 뒤에서 이용할 건 다 이용하겠다 이거지.’
일전의 혈사문도 그렇고.
하면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드러난 순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야 한다.
이번 유인책이 그러하다.
“그러니 비검문에서 잘 도와주십시오.”
“알겠다. 이번 일은 심상치 않구나. 비검문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 꼬리가 밟히는 대로, 즉시 움직이겠다.”
중경의 비검문, 그리고 개방과 하오문도 움직이고 있다.
백모쌍귀 동생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파고들을 수 있으리라.
일단 얘기가 일단락되자 곽용은 다시 당준파를 가리켜 물었다.
“한데, 저 비다라라는 거 말이다.”
“예.”
“방법이 없느냐? 죽이는 것밖에?”
“글쎄요…….”
천무백은 잠시 멈칫했다. 비다라를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니,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정녕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면 일은 더 골치 아파진다.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렸으니, 생사의 이치를 벗어난 것인데 무슨 방도…… 잠깐.’
순간 천무백은 멈칫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
“잠시,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천무백은 곧장 일어나 당준파를 데리고 움직였다.
곽용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천무백은 순식간에 움직였다. 그가 당준파를 이끌고 이동하는 목적지는 바로 객잔에 있는 자신의 방.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생사의 이치. 삶의 탄생과 끝맺음에 관한 이야기. 마기로 되살린 비다라…… 어쩌면.’
천무백은 한 가지 가능성을 봤다.
‘생사에 관한 이치가 적혀진 도경, 선근경.’
선근경.
거기에 무언가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