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02화>
102. 네가 알던 이는 죽었다.
채가령의 표정을 보고 천무백은 확신했다. 저 노인이 당준파다. 채가령이 저런 표저을 지은 건 당준파가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랬다면 저런 표정이 아니리라.
능허가 목소리를 낮췄다.
“당준파, 저 양반이 채주 같은데요.”
“딱 봐도 그렇지?”
“네. 위세가 장난 아닌데요? 뒤에 애들 서 있는 거 보면, 딱 보입니다. 쫄따구들이 대장 앞에서 바짝 기합 들어간 거예요.”
“30년 흑도의 안목이니 신뢰가 아주 팍팍 드는구나.”
능허의 말 대로였다.
수룡채는 일개 수적채로 보기엔 위세가 드높았다.
번성하는 포구처럼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과 배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강변 위로는 목책과 돌로 잘 쌓은 공고한 성채가 오롯이 서 있었다.
관부에서 세운 성채로 보일 정도로 견고했다.
이 늦은 밤에 등을 환히 켜놓은 것만 봐도 저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하물며 그것들을 배경으로 선두에서 당당히 서 있는 당준파의 모습은 위압적이었다.
강바람에 거칠게 펄럭이는 녹색 장포. 아무리 봐도 납치당해 착취당하는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능허의 말대로 오히려 수룡채의 위세를 오롯이 등에 업은 모습이었다.
그러니 채가령이 저런 표정이다.
“맙소사…….”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승이 살아 있다는 기쁨, 다시 만나게 되었단 사실에 흥분, 그러나 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
그런 감정이 뒤섞여 복합적으로 드러났다.
‘의외군.’
사실 천무백도 당준파가 저런 모습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수적들이 만만한 놈들도 아니고, 한낱 의원이 제압하다 못해 채주가 되었다?’
강호에 별별 일이 다 있다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물론 독을 쓰는 독인(毒人)이기도 하니 수를 썼을 수도 있겠으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대체 왜 수룡채의 채주가 되겠는가?
실종되기 전에는 무취의방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의원이었으며, 그를 청하는 명문세가와 문파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고작 수적들의 채주가 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석독을 다루는 재주만 봐도 천무백도 감탄하지 않았는가.
‘근맥이 다 잘려서 꽁꽁 묶인 채 독이나 만들어 내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랬으면 일이 쉬웠으리라.
수적들을 다 때려눕히고 당준파를 구해 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파고들면 되니까.
한데 당준파가 저런 모습이니 천무백의 기존 계획도 쓸모가 없게 됐다.
그렇다 한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이유도 없다.
강호에서 실패는 수두룩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천무백도 숱한 전생을 살아오며 실패에도 익숙했다.
그리고 실패를 다시 이겨 내는 일에도 아주 능숙했다.
천무백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애당초 당준파가 목적을 가지고 수룡채 채주가 됐을 가능성이 첫째, 아니면 실제로 납치당했다가 성격이 뒤틀려 수적채의 채주가 됐을 가능성이 둘째,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명에 채주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세 번째.’
지금 판단을 위해선 딱 하나다.
당준파와 직접 대면하는 것.
여기 배에 올라타 멀리서 표정만 봐선 도통 알 수가 없다.
천무백은 곧장 움직였다.
“능허야, 여기서 배 지켜라. 난 가령이하고 저쪽으로 넘어간다.”
우선 당준파의 상태를 확인하고 대화를 위해선 제자인 채가령이 대동해야 한다.
천무백 홀로 가서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수적들이랑 안 싸우면 다행이지.
천무백의 시선이 채가령에게 닿았다. 그러자 연소운이 불쑥 나섰다.
“저도 같이 갈게요. 아가씨 호위는 접니다.”
“내가 옆에 있는데 호위가 필요하겠어?”
담담한 말에 연소운은 말문이 턱 막혔다. 천무백의 무력을 그간 지켜봤다. 저 대단한 사람이 막을 수 없다면, 본인이 가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절절히 느낀 연소운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채가령을 봤다.
채가령은 이내 결연한 얼굴로 끄덕였다.
“네. 같이 가요. 저도 스승님을 뵙고 싶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무사히 돌려보내 줄 테니까.”
천무백은 그리 말하고 능허에게 명령했다.
“여차하면 튀어야 하니 배는 지키고 있어야지. 알겠지?”
“예예. 걱정하지 마십쇼.”
잔뜩 긴장한 채가령, 연소운과 달리 능허는 담담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최근엔 적룡방에서도 살 떨리는 일을 치르고 오지 않았는가.
“같이 다니다 보니 저도 간댕이가 제대로 부은 것 같습니다.”
“넌 원래부터 부어 있었다.”
“흐흐흐.”
천무백은 곧장 검을 들고 움직였다.
서걱!
천무백이 배를 연결하는 밧줄을 그대로 끊어 버렸다.
“무슨 일이냐! 아직 배를 선착장에 대지 않았다!”
천무백의 배와 줄을 연결해 수룡채로 이끌던 수적의 눈이 부릅떠졌다.
미리 폭죽을 터뜨려 수룡채에 신호를 보냈다. 만만치 않은 고수를 데리고 가니 준비하라고.
이대로 배를 끌고 가면, 놈은 채주와 수적들에게 죽을 게 자명했다.
한데 그걸 눈치채고 배를 끊고 도망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건 수적들의 오해였다. 천무백은 새로운 계획대로 움직였다.
수적들의 큰 배와 천무백이 타고 있던 배는 단숨에 멀어졌다.
“배 지키다가 신호 보내면 곧장 돛 올려라.”
“저 다룰지 모르는데요?”
“내가 아니까 돛만 펴.”
“어떻게 가시려고요? 선착장까지 아직 더 가야 하는데?”
대답 대신 행동이었다.
“몸에 힘 풀어라. 단숨에 뛰어간다.”
“네넷? 끄악!”
천무백의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채가령은 이내 몸이 홱 들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내 무슨 상황임을 깨달은 그녀는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코끝을 훅 찌르는 천무백의 체취.
“……!”
천무백의 배를 여기까지 끌고 왔던 수적들은 입을 쩍 벌리며 위를 올려봤다.
꽈앙!
“미, 미친!”
수적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숨에 선수를 건너뛰어 수적들이 탄 배로 훌쩍 넘어오더니, 멈추지 않고 선착장을 향해 크게 도약했다.
앞에 있던 배 두 척을 그저 도움닫기를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착장까지의 거리는 팔장(丈)은 된다.
그걸 도움닫기 해서 뛰어넘는다고?
하물며 옆구리엔 왜소한 체격이지만 사람 하나를 끼고?
그들의 눈에 불신이 어리는 순간.
천무백의 발이 허공을 몇 번 밟는 듯 성큼성큼 걸었다.
“……!”
흡사 하늘을 걷는 듯한 움직임. 건곤창응보가 펼쳐지자 배 위의 수적뿐 아니라 선착장에 몰려나왔던 수적들도 모두 입을 벌리고 아연실색했다.
“고수……!”
“고수다!”
그들의 떨리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무백은 선착장 위에 바로 착지했다.
꽝!
“…….”
완벽한 기선제압이었다.
천무백이 굽힌 무릎을 펴자 수적들은 두려운 시선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딱 한 명.
당준파만이 알 듯 모를 듯한 눈빛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얼떨떨한 얼굴이던 채가령이 급히 당준파에게 소리쳤다.
“스승님!”
천무백은 당준파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가령이구나.”
당준파가 웃었다.
서서히 호선을 그리는 입가.
채가령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자신이 알던 스승이 맞다고 여겼다. 당장이라도 뛰어갈 듯 움찔했다. 하나 천무백이 그사이에 서며 막았다.
천무백은 봤다.
“공자님?”
“침착하고 집중해서 봐봐. 스승으로 보여?”
“네?”
“입만 웃고 있잖아?”
천무백의 담담한 목소리와 분위기는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채가령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당준파를 봤다.
“어……?”
그제야 채가령은 천무백의 말뜻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입가는 미소를 그렸으나 딱딱했다. 마치 억지로 웃는 듯 근육이 어색하게 움직였다. 하물며 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했다. 눈에는 반가운 기색도, 따뜻함도, 부드러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눈동자처럼.
채가령은 흠칫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스승님이, 아닌…… 건가요?”
“아니. 맞긴 한 것 같다만.”
천무백은 당준파로부터 느껴지는 독기를 분명히 느꼈다. 오랫동안 독을 다룬 이들에게서만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독기.
특히 섭진문에서 향을 맡고 맛을 봤던 그 독기가 천무백의 초감각에 잡혔다.
석독의 주인이 당준파라면 눈앞의 이는 당준파가 맞다.
채가령이 처음 의심도 하지 않았으니 외모도 똑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채가령이 알던 과거의 당준파라고 할 수 있을까?
“대화 좀 하지. 활력의.”
“자네는 누구인가.”
목소리에 어조가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라면 응당 높고 낮음이 운율처럼 담기기 마련이다. 한데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했다.
천무백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천무백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경천혼공을 익힌 직후 머릿속으로 느껴지는, 오감을 넘어선 또 하나의 초감각.
“그건 알 필요 없고, 그쪽이 섭진문에 독을 썼소?”
“…….”
이번에도 표정 변화는 없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데 그것마저 마치 지어낸 듯이 딱딱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위화감을 느낀 건 채가령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는 살짝 겁에 질린 듯 주춤했다.
천무백이 그녀를 바라보자, 채가령은 눈치껏 나섰다.
“스승님, 채가령이에요. 도대체 일이 어찌 된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별거 없다. 난 수룡채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협박당했나?”
“협박? 내가 말인가?”
그 모습에서 천무백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접었다.
누군가에게 협박받아 억지로 수룡채 채주 자리에 앉은 게 아니다.
천무백의 눈이 그의 손목에 닿았다.
“스승님, 수룡채에 납치당해서 협박당하는 건 아니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어찌 스승님이 수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채가령.”
천무백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천무백은 드디어 알 것 같다는 듯,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알던 이는 이미 죽었다.”
“……네?”
천무백은 당준파를 바라봤다.
손목에 남은 건 근맥이 잘린 흔적이다. 하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잘 쓰고 있었다. 비단 손목의 근맥뿐일까.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소생했다고 해야 하나…….”
“소생? 그대가 어찌 알지?”
당준파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으나 무언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천무백은 이제 확신했다.
당준파는 의원이었고, 수적떼의 우두머리가 될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 채주가 됐고, 독을 써 섭진문을 멸망시켰으며, 그 배후에는 혈귀곡이 있다.
당준파가 혈귀곡과 연결되어있음은 명확하다.
천무백은 기억을 더듬었다.
일전에 소림과 얽혀들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청성표국이 운반하던 표물을 강탈했던 게 바로 혈귀곡이었다.
그때 혈귀곡이 강탈한 표물은 일종의 불경이었다.
달마가 중원으로 건너와 소림을 세울 때부터 존재했던 불경.
고대 천축의 밀교에서부터 이어져 온 비술(祕術).
수많은 괴랄한 비술이 적힌 불경.
만일 혈귀곡이 그 불경을 해석하여, 끝내 성공시켰다면.
천무백은 그간의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당준파가 수룡채의 채주가 된 것도, 독을 써서 문파를 하나 멸문시킨 것도, 다섯 명의 흉수 중에 정파의 명숙인 호선자가 있는 것도.
의식과 기억은 있되, 같은 존재는 아니다.
드디어, 모든 게 풀렸다.
“너…… 그거구나?”
당준파를 쳐다보는 천무백의 입가에 하얀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