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01화 (101/318)

<검신재생 101화>

101. 천무백 협상법

장우가 천무백을 이끌고 온 장소는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들어가는 위치였다.

“거 명소를 보여 준다더니.”

“보긴 좋구나.”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노을이 지면서 황금빛이 바위섬 사이로 스며드는 모양이 꽤 볼 만했다.

그 너머에서 두 개의 배가 불쑥 올라오지 않았다면 더 보기 좋았을 듯했다.

천무백은 안력을 돋워 배를 살폈다.

하나는 황포 돛을 단 배였다. 대략 오십 여명 정도 타고 있는 큰 배였다. 오십 명 모두 흉악한 병장기를 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좀 더 작지만, 상당히 빨라 보였다. 사람은 스무 명 정도.

“저거 깃발, 수룡채냐?”

“맞는 것 같은데요? 청룡이 창대를 감싼 모양이 수룡채가 맞습니다.”

“더 귀찮을 일은 없게 됐구나.”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심하십쇼. 배 위의 수적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능허는 답지 않게 천무백에게 조언의 말을 건넸다.

“안다. 절정고수도 강 위에선 맥을 못 추는 법이니까.”

더구나 수적 놈들은 독하다. 흑도들이 다 독하다지만 수적만큼 독한 놈들은 거의 없다.

“세 명, 네 명이 칼에 몸이 잘려가도 고수의 발 하나, 팔 하나만 잡으면 그만이지.”

제 몸 안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몸을 던진다. 과정에서 팔이 잘려나가도 몸을 던져 고수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그 사이에 철로 짜인 그물이 쏟아져 팔이 묶이면, 온갖 날붙이들이 파고든다. 정신 못차리게 물에 빠뜨렸다가 꺼내기를 반복한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면 제아무리 절정고수도 못 버틴다.

그게 수적들의 방식이다.

“참고로 저는 배 위에서 처음 싸워 봅니다.”

“이야. 본인이 쓸모없음을 이렇게 강조하네.”

“강호인이 배 위에서 싸울 만한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평생 배에 안 오르는 양반도 있는데.”

“걱정 마라. 싸울 일 없다.”

“네?”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봤다. 능허는 말은 저리 했지만 검을 뽑고 언제든 공력을 쏟아 낼 수 있게끔 내공을 운기 중이었고, 연소운도 마찬가지로 낭창거리는 연검을 꼭 잡고 있었다. 채가령은 다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딱히 신경 안 써도 되겠군.’

고작 두 척의 배 앞에서 벌벌 떨면 골치 아프겠지만.

그런 기색은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 저런 수적들이 한가득한 수룡채로 향해야 했으니까.

잠깐 얘기를 나누는 사이 저들의 표정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배는 가까워졌다.

온갖 흉흉한 날붙이를 들고 있는 수적들이 갑판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저들 딴에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하는 짓이겠지만 천무백이나 능허에겐 코웃음이 나는 광경이었다.

“가릉강을 다 차지한 수적들치곤 조잡해 보이는뎁쇼?”

“장강만독으로 차지한 위세니까.”

“하긴. 만독이면 뭐 두려울 게 없죠.”

배가 빠르게 접근하다 이내 돛을 내리고 멈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이란 욕을 다 쏟아 내는 수적들의 외침이 일시에 멈췄다.

곧장 선수 위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이마가 훤히 까인 생김새의 남자였다. 한데 제법 기세가 흉흉한 게 과거 능허를 처음 볼 때의 느낌이 들었다.

“키야, 개성 있게 생겼네요.”

“너만 하겠냐.”

“…….”

능허가 조금 억울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직후 채가령에게 ‘내가 못생겼냐? 아가야?’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천무백은 선수에 올라온 사내에게 집중했다.

“애송아! 네가 우리 식구들 족쳤냐? 으잉?”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는 두툼한 박도를 선수에 콱 박았다.

“새끼들아! 지금이라도 발가벗고 머리 박고 용서를 구해라. 그러면 있는 것만 빼앗고 보내 주마. 아, 물론 계집은 우리가 재미 좀 보고 돌려보내 주마. 흐흐.”

“금품갈취, 강도, 살인에 인신매매까지 하냐?”

“그 정도야 기본 아니겠냐? 왜 두려우냐? 흐흐. 아니다. 네놈도 제법 반반하니, 남색가들한테 꽤 인기 끌겠구나. 이거 갑자기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는지. 저 두 계집도 반반하니 좋구나. 꽤 비싸게 팔리겠어.”

천무백은 지독한 폭언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흑도나 사파 애들이 흔히 하는 분위기 잡는 기선 제압용 말이 아니던가.

다만 뒤에 있던 연소운과 채가령은 이런 폭언에 노출된 적이 많지 않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천무백이 더 길어지기 전에 나섰다.

“협상하자.”

“뭐? 협상? 푸하하! 그렇게 살고 싶더냐? 좋아. 목숨만은 살려는 주마! 대신 계집들이랑 네놈은 우리에게 인질로 잡혀야겠다! 가지고 있는 것도 다 내놓고!”

“뭔 개소리야?”

천무백이 불퉁하게 소리쳤다.

그리곤 검을 바닥에 콱 박으며 소리쳤다.

“너희 대가리 있는 곳으로 안내해. 그럼 네놈들 목은 제자리에 있을 거야. 이게 내 조건이다.”

“…….”

순간 왁자지껄 떠들던 수적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수에 있던 광대뼈가 떨떠름하게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살려 준다고?”

“그래. 그러니까 안내해.”

아무리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그게 상황에 맞지 않거나 어처구니가 없으면 머릿속으로 곧장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 천무백의 말이 그랬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광대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송아. 겁에 질려 미쳐 버린 것이더냐?”

“협상 거부냐?”

“미친놈!”

“협상에 임하는 태도가 글려먹었구나.”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광대뼈는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는지 순간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조금 갖고 놀아 줘야 할 듯싶었다.

그렇게 여기면서 광대뼈가 뭐라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쿠웅!

“……!”

서릿발 같은 정적이 수적들 사이를 관통했다.

대다수 수적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광대뼈의 곁에 있던 몇몇 수적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크게 벌린 입 사이로 어부들이 쓰던 작살이 박혀 있었다. 광대뼈는 부릅뜬 눈 그대로 절명했다. 천무백이 옆에 있던 작살을 그대로 내던진 것이다.

빨랐고, 보이지도 않았다. 파공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둔중한 굉음과 함께 광대뼈의 시신이 바닥에 처박혔다.

핏물이 선수 위를 빠르게 적셨다.

수적들의 머릿속에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 개자식이! 모두 무기 들어! 저 개새끼를 죽인다!”

“넌 누구냐?”

“부선장이다! 이 시발놈아!”

“협상할 테냐?”

“협상? 지금 협상을 하자고? 개소리! 모두 다 죽여 버릴 거다!”

그의 눈이 분노에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천무백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다시 내 조건을 말하지. 너희들 대가리 있는 곳에 안내해.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

“이 미친 새끼가 끝까지……”

콰득!

부선장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끄으으으.”

복부에 박힌 커다란 작살.

믿기지 않는 눈동자로 복부에 박힌 작살을 보며 부선장은 피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졌다.

선장과 부선장이 연이어 쓰러졌다.

그 사이로 천무백의 독백이 파고들었다.

“다음.”

“…….”

얼음같은 차가운 정적.

모두가 입을 다물고 침묵할 때, 천무백의 미소는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협상은 계속해야지?”

순간 수적들은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협상이라니…….’

‘저 미친놈이…….’

그저 미친놈의 덜떨어진 말인 줄 알았건만.

그것이 이내 실체화된 공포로 다가왔다.

“갑판장이다.”

다소 담담한 얼굴의 사내가 시체들 사이로 불쑥 올라왔다.

천무백이 말했다.

“좋아. 협상할 텐가?”

“하지. 안내하마. 대신 약속은 지켜라.”

“협상타결. 안내해.”

갑판장이 그리 말하자 수적들이 곧장 반발했다.

선장과 부선장을 죽인 놈이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하나 갑판장은 담담한 얼굴로 재빨리 눈짓을 줬다. 그 시선을 마주한 몇몇 수적들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교환한 갑판장이 소리쳤다.

“그쪽 배를 몰기 위해 우리 애들이 건너갈 거요.”

“알겠다.”

천무백이 순순히 대답하자 배가 천천히 근접해왔다.

갑판장은 슬쩍 눈짓했다.

뒤에 있던 수적들이 일제히 몸을 낮춰 은밀히 활을 꺼내 시위를 먹였다.

화살촉이 반짝하고 빛이 반사됐다.

장강만독이 묻어 있는 화살촉이었다.

배가 다가선 순간, 저 수적들이 일제히 일어나 활시위를 놓으리라.

하면 제아무리 무림 고수라도 어쩔 수 없다. 다 피할 수도 없다. 코앞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화살을 어찌 피하겠나. 하나쯤은 분명히 맞는다. 하나만 맞아도 충분하다. 한 방울로도 운남의 코끼리가 삼 보를 걷기도 전에 즉사하는 극독이니까.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수적들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누가 봐도 분분히 배에 건너가려는 움직임이었다.

하나 그들은 상대를 잘못 봤다.

“협상결렬.”

“……무슨 소리냐!”

“협상해 놓고 뒤에서 수작질 부리면 안 되지.”

천무백이 빙긋 웃으며 검을 빙글 돌렸다. 순간 그의 검이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새하얀 검기가 마구잡이로 발출되었다.

“으, 으아아악!”

순식간이었다.

발출된 검기가 갑판장과 그 뒤의 활시위를 먹이고 있던 수적들의 목을 잘라 버린 것이.

수적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멈춰 섰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들이 놀란 건, 정확히 활을 든 수적들만 검기로 요격한 사실이다.

검기를 날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골라서 죽였다.

이쯤 되자 수적들은 현실을 자각했다.

“자, 협상 계속하자고.”

천무백의 협상은, 진심이었다.

* * *

“볼 때마다 감탄이 드네요.”

“뭐가.”

“혹시 전생에 어디 흑도 대장이셨습니까? 사람 겁박하는 꼴이 진짜 배울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천무백은 능허가 비아냥거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그의 눈을 보고 피식 웃었다.

능허는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에게 말을 통하게 하려면, 공포가 필요하다.”

“그렇군요.”

“공포가 스며들면, 말 안 듣는 놈도 말 잘 듣게 되는 법이지.”

애당초 수적들을 천무백이 좋게 봐줄 일이 없다.

그냥 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으니까.

하니 천무백은 수적들을 대할 땐 거리낌이 없었다. 여차하면 죽여 버리는 게 마음 편했다. 저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건 부처나 하라지 뭐.

천무백은 그리 생각하며 정면을 바라봤다.

수적들의 배로부터 연결된 튼튼한 밧줄이 천무백이 타고 있는 배를 이끌고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을이 완전히 지고 배 위에 등을 켠 채 어둠 속의 강을 헤쳐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천무백은 강 위에서 왜 무림 고수들이 수적들한테 당하는지 쉬이 이해가 됐다.

중심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날붙이들이 달빛에 요란하게 번쩍이고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수적들이 날뛰면,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야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여 저 수적들은 천무백이 부선장까지 참살하는데도 기가 죽지 않았다.

갑판장이 이미 올라서는 순간 천무백은 짐작했다. 그 눈빛을 보고.

결국, 선택해야만 했다.

더 지독한 공포를 줘야 한다고.

하여 더 많은 피를 봤다.

그게 지금의 결과다.

‘그러니까 협상하자고 할 때 말 좀 잘 듣지.’

얼마나 신사적인가.

천무백은 그리 생각했다.

그때였다.

한쪽 강변에서 화려한 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수많은 배가 운집되어 있고, 흡사 성을 보는 듯 울타리와 돌벽이 견고하게 새워진 성채였다.

특히 소식을 들었는지, 돌벽 위로 수적들이 무기를 든채 우수수 튀어나와 있었다.

그들을 보던 채가령이 일순 경악한 듯 비명을 내질렀다.

“맙소사, 스승님이에요.”

천무백은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채가령을 보며 혀를 쯧 찼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과연 누구를 일컫는지 알만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이라고 보기엔 거대한 풍채였고, 강바람에 펄럭이는 전포가 인상적이었다.

“납치당해 협박받으며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천무백은 바람에 휘날리는 녹색 전포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 오연히 서 있는 모습.

그건 결코, 납치당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 수적채의 채주가 되었다라…….”

수룡채주, 당준파를 만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