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00화>
100. 유람하러 왔는데.
어양촌(漁陽村)은 그리 크지 않은 곳이다.
다 합쳐 30호나 되려나.
하여 웬만해선 건넛집에 누가 사는지 이웃끼리 다 알 정도다.
작은 어양촌이다보니 외부인이 들어오면, 당연히 누구나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작금 시대의 강호에선 어느 곳이나 그렇다.
표국이나 상단에서 일하거나 입신양명하여 벼슬을 얻거나, 그도 아니면 무림인으로 명성을 떨치지 않는 한.
평생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일반적인 삶이다.
이런 어촌까지 외부인이 왔다는 사실은 놀라움과 동시에 마을을 바쁘게 만들었다.
“누구지?”
“남자 둘에 여자 둘.”
“두 명은 어린 애송이들이고, 여자 한 명은 칼 찬 거 보니 무림인이고, 저 늙은이도 제법 한가락하는 거 같은데.”
“애송이 둘한테 말을 편히 하는 걸 보니 보호자인가보군.”
한데 어촌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특이했다.
단순한 호기심 수준이 아니라 낱낱이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어떤가? 저 호위무사로 보이는 계집의 무위는?”
“대충 이류급. 잘하면 일류? 멀리서 봐서 모르겠는데.”
“일종의 연검인 거 같은데? 검 모양이. 하면 이류여도 일류 상대하기처럼 까다로울 테니까 조심해야겠네.”
“저 늙은이는?”
“저놈은 잘 모르겠단 말이야.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데.”
“근데 발걸음 보면 대충 무공 익힌 거 같은데.”
“한데 오히려 우리 쪽 같지 않아? 은근히 거친 느낌이 나는데?”
바로 무공의 수위까지 예측하는 건, 절대로 평범한 어촌 사람들이 할 만한 건 아니었다.
눈이 쭉 찢어진 장년인이 목을 길게 빼고 사람을 불렀다.
“장우야.”
“네.”
다소 곰 같은 얼굴의 장우가 불쑥 튀어나왔다. 덩치는 컸지만 눈썹이 옅어서 그런지 은근히 순한 인상이다.
때문에 이런 일에 자주 나서는 건 장우의 역할이었다.
“네가 쟤들 접근해 봐라. 뭐 하러 왔는지 확인해 보고, 저 늙은이랑 호위무사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캐 봐.”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장우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외부인들에게 접근했다.
“누구십니까?”
장우는 누가 봐도 순박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 눈빛 속에 약간의 경계심이 담겼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전형적인 시골 사람의 경계심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 그리 여겼는지 늙은이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하남에서 내 조카애들이 중경으로 놀러 와서 말이야.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유람이나 하는 중인데, 장강을 보고 싶다 하여 데리고 왔네.”
“아하, 그러십니까. 그럼 장강에서 배를 띄워 놓고 풍류를 즐기시려고요?”
“아무렴, 그게 좋지 않겠느냐. 내 두둑이 급전을 내줄 터이니 작은 배와 사공, 그리고 술과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느냐?”
“아후, 물론입죠.”
“한데 여긴 객잔도 보이지 않는 거 같은데…….”
“그냥 한적한 어촌이라 그렇습니다요. 그냥 마을 사람들끼리 물질이나 하며 사는 곳이라 조금 지저분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풍경만큼은 기가 막힌 곳으로 모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느냐?”
“네. 헤헤. 급전만 적당히 챙겨주시면야, 여기 사람들만 아는 명소로 모시지요.”
“오호라. 좋구나. 한데 말이다. 장강에 수적들이 들끓는다는데 괜찮느냐? 나는 괜찮다만, 우리 숙질들이 다소 겁이 많아서.”
장우는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면 자매로 보일 정도로 잘생긴 청년과 여자였다.
다소 닮았다는 느낌은 없었다만, 둘 다 미남미녀니 저절로 부모가 미색이 뛰어나겠구나 싶었다.
‘딱 봐도 무공 하나 모르는 철부지들이고만.’
이쯤 되자 장우는 눈앞의 늙은이 말을 믿었다.
호위무사로 보이는 여자는 조금 어색한 얼굴이었지만, 냉막해 보이는 인상을 보니 원래 그런 얼굴인 듯했다.
특별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늙은이의 말은 자연스러웠고, 저 어린 철부지 둘도 그저 태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하물며 남자애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냄새가 난다는 듯이 표정을 짓고 있기까지 했다. 이런 어촌의 수산물의 비린내가 익숙하지 않겠지.
장우는 속으로 실소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이쪽은 수적 하나 얼쩡대지 않습니다. 저 멀리 비검문이 있으니까요.”
“하긴, 그렇겠구나.”
“네네. 우리 같은 민초들이 여기서 평범히 물질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장우가 속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순간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흐흐. 이유가 있지. 암.’
그리고 그 순간.
냄새난다는 듯이 콧잔등을 찡그리던 청년의 눈이 번뜩였다.
물론, 장우는 그걸 보지 못했다. 아니 봤다고 해도 알지 못했으리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으니까.
장우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하면 바로 모시겠습니다요. 제가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우선 선금이다. 내 재밌게 놀면 더 챙겨주마.”
늙은이는 덜컥 돈주머니를 건넸다.
대충 무게를 감안한 장우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이야. 이거 제대로 호구 하나 건졌는데?’
그는 곧장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급히 움직였다.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생각도 못 한 채.
* * *
“어디서 연기 배웠습니까?”
“경험이다.”
능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저 농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천무백의 말은 진담이었다.
숱한 전생을 거듭하면서 얻은 경험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매번 전생을 각성할 때마다, 인격 자체가 확 바뀌어 버리니.
주위 사람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하게끔 천무백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지금의 연기도 그런 경험의 발로였다.
“너도 만만치 않던데.”
“저야 뭐 흑도판에서 굴러다니면서 사람 눈치 슬슬 보는 게 장기니까요. 이 정도 철면피는 깔아야죠. 그래도 주군만 하겠습니까. 난 진짜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 모시고 다니는 줄 알았네.”
천무백은 능허의 잡담이 길어지자 손을 휘휘 젓고는 채가령을 돌아봤다.
“대충 알겠지?”
“네. 눈빛이 이상했어요.”
“살기가 맴돌았다. 특히 돈을 건네는 순간 더욱. 우리가 대충 돈 많은 부호로 인식했고, 더구나 머나먼 하남 출신이라 하니.”
“뱃놀이 나가서 다 물에 빠뜨리겠죠?”
“맞다. 이놈들, 평범한 어부도 민초도 아니다. 사람 여럿 죽여 보고 약탈해 본 경험이 있는 놈들이야.”
하면 뭐겠는가.
“어촌 전체가 수적들이라니…….”
“뭐, 세상 사는 게 그렇지.”
천무백은 염세적으로 중얼거리곤 다시 표정을 바꿨다.
장우가 어촌 사람 둘을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 마침 제법 큰 배가 있습니다요! 하면 가시겠습니까? 저희가 아는 명승지에서 보는 노을이지는 모습이 정말 장관입니다요.”
능허 역시 이내 허허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그래. 가자.”
* * *
배를 타고 반 시진(1시간)을 나아갔을 때.
천무백이 불쑥 물었다.
“이게 어선인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대.
그 모습에 장우와 함께 와서 배를 몰던 중년인은 한가락 남은 의심마저 털어 냈다.
저보다 나이는 두세 배 많은 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늘 하대하며 살았던 사람인 듯이.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 맞군.’
서로 눈빛을 교환한 장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예. 어촌 사람들끼리 좀 큰 고기 잡을 때 출항하는 배입니다요.”
장우의 말엔 은근히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치 여기에 탄 너희들이 큰 고기라는 듯이.
그뜻을 짐작한 천무백이 덤덤하게 물었다.
“그런가? 얼마나 큰 고기이길래 이렇게 크나?”
실제로 천무백이 타고 온 배는 꽤 큰 편이었다.
단순 어선치고는 컸고, 비록 하나지만 돛도 걸려 있어서 노를 젓지 않을 때 바람만 잘 타면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뭐, 때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어르신들께서 챙겨주신 급전이 워낙 넉넉하니, 마을에서 내어드릴 수 있는 배 중에 가장 큰 배를 내어드렸지요. 어찌, 즐거우십니까?”
장우는 능청스럽게 말하곤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차려진 술상 위에 제법 먹음직한 음식과 술이 올라가 있었다.
한데…….
“어,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왜 안 드시는지요?”
장우의 눈꼬리가 순간 살짝 떨렸다.
어째 음식이 그대로지 않은가.
‘이럼 골치 아픈데?’
저 음식엔 독을 타놨다. 원래는 다 물에 빠뜨려버리고 돈만 갈취할 생각이었는데, 중년인이 만류했다.
제법 외모가 반반하니 딴 곳에 팔아넘기자고. 하여 독을 먹여서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했다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입맛에 안 맞아서.”
“아, 그렇습니까. 하긴 도련님 같은 분이 드시기엔 조금 저급하지요. 그래도 술은 기가 막히게 좋은데, 앗차. 술 배운 나이가 아닌가?”
장우가 말을 늘어뜨렸다.
천무백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천무백의 나이쯤 되는 청년이라면 응당 자존심으로 포장되는 허세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욱.
장우는 그걸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다.
‘수를 쓰는군.’
뭐, 그만큼 천무백이 철부지 도련님처럼 보인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천무백이 그냥 웃자 능허가 끼어들었다.
“술맛이 별로구나.”
“아 그렇습니까. 한데…… 드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어르신께서도.”
장우가 그때서야 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말끝을 흐렸다.
“딱 봐도 향이 안 좋은데 이걸 술이라고 갖고 왔느냐?”
“그것이…….”
“적어도 백화주나 소홍주는 갖고 와야지. 그렇지 않느냐?”
“소홍주요?”
절강성의 소홍주를 여기서 찾는단 말인가?
그것도 배 위에서?
이 무슨 억지인가. 장우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능허를 쳐다봤다. 슬쩍 보니 넷 모두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순간 등골이 섬찟해졌다.
‘왜?’
아니, 뱃놀이하러 왔다면서 그냥 가만히 배에 타고만 있다고?
묘한 분위기가 선상 위를 감돌았다.
멀리서 노를 젓고 키를 돌리며 방향을 잡던 중년인이 장우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였다.
“어디서 눈알을 굴려?”
“……!”
장우와 중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낮고 짙게 깔려 마치 자욱한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목소리.
천무백이었다.
그저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보이던 이가 정색하며 바라보자 장우는 일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기에 장강만독을 탔을지는 어떻게 알고 먹냐? 응?”
“……장, 장강만독이라니 그 무슨.”
“끝까지 아주 시치미를 떼는구나.”
천무백이 손짓하자 능허와 연소운이 칼을 뽑았다.
급변하는 분위기에 중년인과 장우는 한탄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폭죽과 칼을 꺼냈다.
휘이잉 펑!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시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안간 폭죽이 터졌다.
“눈치챘나.”
“쩝. 뭐, 이미 다 우리만 아는 명승지에 왔으니 그래도 구경은 실컷 하시구려.”
“명승지라. 과연 노을 지는 게 아름답구나.”
천무백이 태연히 말하자 장우가 조롱했다.
“거기 숙부가 칼 좀 쓴다고 믿는 거 같은데, 여기 강 위요.”
“숙부? 뭐야. 아직도 연극을 믿고 있어? 너희들 그리 눈치가 없는데 어떻게 수적질 해 먹고 사냐?”
“…….”
천무백의 웃음에 장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려는 찰나.
그보다 선배인 중늙은이가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검을 뽑았다.
아니, 뽑으려는 찰나였다.
콰직!
“……!”
피보라가 몰아쳤다. 장우는 얼굴에 확 튀는 핏물에 차마 고개조차 들리지 못했다.
신음 하나 나지 않고 이내 무언가 곁에서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우가 덜덜 떨면서 간신히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봤다.
머리가 통째로 사라진 중늙은이의 시신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새하얗게 질린 장우가 천무백을 봤다.
앉은 채 그대로, 술잔을 던져 머리를 깨뜨렸다.
장우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놈들. 저, 저기 보이지 않느냐. 우리 배들이 오고 있다. 네놈들, 무사할 줄 알아?”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노을이지는 강 너머.
두 척의 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오히려 천무백은 웃었다.
‘웃어?’
이 상황에서 웃는다고?
일이 틀어지자마자 혹시나 해서 불렀던 수적들이 오는데도, 웃는다고?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너, 너희 뭐야? 너희 여기엔 왜 온 것이냐!”
천무백이 뚱하게 대답했다.
“말했잖냐. 유람하러 왔다고.”
천무백이 껄껄 웃으며 몰려드는 배를 바라보며 외쳤다.
“자아! 뱃놀이 한번 거하게 즐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