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7화>
97. 울타리 안, 그리고 밖.
천무백은 채가령을 대동하고 독기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 근방의 마을 사람들부터 살폈다.
조금은 긴장한 기색이었던 채가령은, 환자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착한 얼굴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건 병이 아니라 확실히 중독 증상이에요.”
“무슨 독인지 알겠어?”
채가령이 입을 오므리면서 검지를 턱에 갖다 댔다.
“음, 기본적으로 두통을 호소하고 있어요. 기맥도 메말랐고요. 아직 확실히 결론 내릴 수는 없어요. 다만 몇 가지 떠오르는 건 있는데, 그래도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채가령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천무백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고 믿음직했다.
같은 증상이어도 증세가 겹치는 독이 수도 없이 많다.
단편적인 증세만 보고 어느 독이라고 단정 내리는 건 성급한 짓이다.
천무백이 채근하는데도 오히려 침착하게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채가령의 모습이 옳은 행동이었다.
하니 천무백은 채가령이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봤다.
한 식경이 지나고, 환자들을 다 살핀 채가령은 그들에게 간단한 약을 지어주곤 곧장 말했다.
“현장으로 가요.”
“아가씨, 괜찮겠어요? 저희는 무인이지만…….”
연소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천무백의 눈치를 살짝 봤지만, 채가령이 현장에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은근히 강조했다.
성화문의 여식이니, 기본적인 내공 심법을 익히긴 했다.
아주 미약하나마 내공을 쌓긴 했다.
다만 그건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기본적인 호신과 건강을 위해 익힌 정도다. 침을 놓고 의술을 펼치기에 적합한 정도.
이미 다 타버린 독이라도, 독기에 장시간 노출되면 여기 마을 사람들처럼 중독될지도 모른다.
무인인 천무백과 능허, 그리고 연소운은 괜찮지만 채가령에겐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하나 연소운의 만류에 채가령은 오히려 깜짝 놀랄 반응을 보여 줬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언니!”
연소운은 뜻밖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가령의 어조가 높아졌다.
“이제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벌였는지 겨우 꼬리를 잡았는데,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데. 당연히 가야죠!”
“아가씨…….”
“복면으로 얼굴 코하고 입 막으면 어느 정도 괜찮을 거예요.”
채가령은 연소운에게 자신이 너무 화를 냈다고 여겼는지 급격하게 쭈그러진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 천무백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네? 아니요, 저 갈 수 있어요.”
천무백이 거절하는 것으로 느낀 채가령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이 담담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내 곁에만 붙어 있어라.”
“……네?”
순간의 정적.
“그럼 바로 가자.”
천무백이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채가령이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자, 천무백이 고개를 휙돌렸다.
“뭐 해? 옆에 붙어 있으라고.”
“……네, 넷.”
* * *
섭진문에 도착하자마자 천무백은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독기가 침투하지 못하게 눈에 보이지 않은 얇은 기막이 천무백과 바로 옆에 굳은 얼굴로 바싹 붙어 있는 채가령까지 덧씌웠다.
“대단하시네요, 저분.”
“크으. 생각보다 기술이 좋단 말이지.”
연소운과 능허는 천무백이 기감을 퍼뜨려 기막을 형성한 걸 미약하게나마 느꼈다.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능허의 말대로 단순히 기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난이도의 작업이었다. 공력을 다루는 능력은 둘째치고도, 수양이 아주 깊어야 했다.
“하여간. 잘생겨지고 봐야 해.”
“……기막을 만드는 거하고 잘생긴 거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능허는 연소운의 물음에 그저 히죽 웃어 보였다.
기본 심법만 익힌 채가령은 기막으로 보호하기 위해 천무백의 곁에 서란 걸 몰랐다.
그냥 옆에 서라니, 섰을 뿐이다.
하나 그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 졌는지, 천무백은 전혀 몰랐다.
“여기 잿더미를 잘 살펴보거라.”
“네? 네네.”
“편한 대로 움직여라. 내가 옆에 붙어 있을 터이니.”
천무백의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지만, 채가령은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어라 할까.
두려운 거나 무서운 걸 보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간혹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저렇게 자신을 대할 때가 있었다.
워낙 완고하신 분이라, 가문의 진전을 이은 막냇동생만 귀여워했던 아버지다.
한데 그런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어딜 외출할 때나 하면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있으라는 말을 아무런 감정 없이 말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 곁에 있으면 뭔가 절로 든든했다.
누가 와도 아버지가 지켜주리라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으니까.
불현듯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이 천무백과 겹쳐…….
“왜.”
“아, 아니에요.”
천무백의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은 휙 사라졌다.
겹쳐 보이긴. 저 얼굴이 어떻게.
아버지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비빌 걸 비벼야지.
왠지 모르게 얼굴 한쪽이 화끈해지는 걸 느낀 채가령은 급히 심호흡했다.
오늘따라 괜히 머릿속이 아리송했다. 옆에 딱 붙어 있으란 말을 들어서일까. 아니면 서로 호흡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일까. 채가령은 애써 손부채질하며 열을 식혔다.
‘집중하자, 집중.’
채가령은 그리 되뇌며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기도, 천무백이 했던 것처럼 잿더미를 살짝 맛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도중.
한쪽이 요란스러워지더니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일전에 천무백을 이곳에 안내해 준 비검문의 무사와 뒤에 의원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면이 있는 무사가 천무백을 보곤 포권을 취했다.
능허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섭진문이 독으로 멸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주께서 다시 재조사를 명하셨습니다. 우리 비검문에 상주하는 의원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하.”
능허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채가령이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비검문에서 데리고 온 의원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셨어요?”
“어어? 가령이가 아니더냐. 무취의방에서 배우던 게 엊그제 같던데, 여기서 보는구나.”
사내는 다소 애매한 나이였다.
서른이 간신히 넘었을까.
하나 그것만으로도 생각보다 괜찮은 의원이란 증명이다.
비검문에서 아무나 상주하며 의원 짓 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채가령과 같은 무취의방 출신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떨떠름한 채가령의 얼굴을 보고 딱히 사이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 너도 이번 혈사를 조사하러 나온 것이냐?”
“네.”
“흠. 내 기억엔 넌 침술에 조예가 깊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리 말하며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는 게, 누가 봐도 채가령을 비꼬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침이나 놓을 줄 아는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하는 타박처럼 들렸으니까.
채가령이 짐짓 입술을 깨물었으나, 그래도 제보다 선배인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하기야, 그래도 무취의방 출신이면 이 정돈 해야지. 그래, 알아낸 게 뭐 있느냐?”
“아직…… 판단 내릴 수 없어요.”
“그러느냐? 흐흠.”
모두 들릴 수 있게 혀를 쯧 차는 모습에 채가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곁에 있던 능허가 ‘허’하고 탄식했으나 끼어들진 않았다.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채가령도 꾹 참고 있는데 명백히 외인인 능허가 나설 수야 있겠는가.
“그래. 열심히 하거라. 그래도 의술을 익혔으니까 뭐라도 해야지. 이젠 의술로 먹고살아야 할 터인즉…….”
“이봐.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순간 연소운이 눈을 부릅뜨며 나섰다.
연소운의 날카로운 기세에 의원은 짐짓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그도 어느 정도 내공을 쌓았는지 기가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어허, 내가 말실수 한 것 같구려. 내 사과드리리다. 가령아, 사형의 말실수를 용서해다오.”
입가에 살짝 미소가 드리워진 게 절대 진심이 묻어난 사과는 아니었다.
채가령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아요. 의술을 배웠고, 앞으로도 의술을 펼쳐가면서 살 것인데,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흠흠. 그래. 그래도 이왕이면 더 의방에서 가르침을 받는 게 낫지 않겠느냐? 계집의 몸으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름 잘 하지 않았느냐. 뭐, 못 버티고 도망치듯 나갔지만 돌아오면 그래도 좋아할 사람이 한 둘은 있겠지.”
채가령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연소운도 그런 채가령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때 의원은 아슬아슬한 선을 넘었다.
“그래도 네 스승이신 활력의(活力醫)시라면 널 받아주지 않겠느냐. 여의원을 받지 않는다는 의방의 규칙까지 깨시면서 널 이끌어줬는데, 그때보다도 지금 훨씬 자라고 아름다워졌는데 말이다. 아, 그 전에 활력의가 먼저 무취의방에 돌아오셔야겠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연소운은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아니,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묵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순간 좌중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천무백이 터벅터벅 의원에게 걸어갔다.
순간 의원은 압도당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 천무백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이 새끼가. 뒈질라고.”
* * *
천무백은 웬만해선 남의 집안 사정에 끼어들기를 꺼렸다.
‘귀찮으니까.’
그것만큼 귀찮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는 그런 천무백을 냉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전생, 전전생, 아니 숱한 전생에서.
천무백은 매번 그 시대의 최강자였고, 가장 높은 명성을 자랑했으며, 강호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런 천무백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의 명성 하나만으로, 이름 하나만으로 웬만한 일이 척척 해결됐다.
하니 천무백은 웬만하면 사람들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약자고, 누가 봐도 악랄한 악인이 보여도,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사정이 아닌가.
천무백이 무슨 민간에서 모시는 신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천무백이 끼어드는 기준이 있다.
‘울타리.’
천무백은 주위의 사람들을 두 분류로 구분했다.
천무백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그 안과 밖으로.
울타리 안의 사람은 천무백이 간섭해서라도 보호한다.
가령 지금의 청성표국, 연화루, 흑심방이 이 울타리 안에 들어서 있다. 흑심방은 울타리를 지키는 경계병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울타리 밖이다.
화산이나 소림이나, 강호행을 하며 인연을 맺은 이들 모두.
조금 전까지 채가령도 마찬가지였다.
천무백에겐 울타리 밖의 사람이었다.
하나 지금 천무백은 채가령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오랜 친우의 후손이란 점도 충분히 고려되었다.
하나 결정적인 건 바로 지금 상황 때문이다.
“내 일 도와주는 사람한테, 아주 미쳤구나?”
천무백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적어도 다를 때라면 모를까. 채가령은 전심전력으로 천무백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 물론 그게 채가령 본인의 일이고 했지만, 어쨌건 도움을 청한 건 천무백이고 채가령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하고 있다.
즉, 그 말은.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다. 넌 그걸 건드린 거야.”
천무백의 눈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