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6화>
96. 독은 전문가에게
천무백은 능허를 대동하고 곧장 섭진문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비검문의 무사 한 명이 안내역으로 붙었다.
섭진문은 비교적 제법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문파였다.
하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을 보면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꽤 성세를 자랑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외원도 따로 있었다. 내원과 구분되는 담장 터도 있었다.
다만 모두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이 실로 처연했다.
“거, 숨쉬기 어려울 정돈데요.”
“음.”
능허가 불평을 터뜨릴 정도로 공기질은 좋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고 시간이 오래 지났건만 아직도 잿가루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만큼 문파 하나를 통째로 태워 버린 셈이니까.
“여기까지입니다. 저희 비검문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했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습니다.”
“알겠소. 고맙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가볍게 축객령을 내린 천무백은 잿더미가 된 섭진문을 꼼꼼히 살폈다.
“이야, 태워도 다 태웠네. 어쩜 이렇게 다 태웠지.”
“흔적이 남으니까.”
“시체만 치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체에 남은 상처를 보고 고수들은 이게 대충 어떤 무공을 썼는지까지 알더만.”
“시체를 치우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이놈들은 벽이나 건물에 남은 흔적까지 싹 다 지웠다.”
한바탕 죽고 죽이는 전투가 있으면 건물과 벽에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벽에 튄 핏자국이나, 서로 부딪쳐 파이고 베이고 무너진 자국들.
그걸로 무얼 알아낼 수 있겠냐 하겠지만, 천무백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가령 핏자국이 분사형처럼 튀었느냐, 아니면 줄줄 흘러내린 자국이냐에 따라 어떤 싸움이었지 대략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 칼에 베였는지, 찔렀는지. 하면 적들의 무공이 대충 어떤지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누가 우세였고, 누가 열세였는지.
바닥에 남은 발자국의 깊이나 보폭을 통해 검을 쓰는지, 창을 쓰는지, 보법을 주로 활용하는지까지.
능허는 그런 얘기에 입을 쩍 벌렸다.
관아에서 나온 조사관도 그리 자세히 알지는 못하리라.
천무백은 꼼꼼히 하나씩 살폈다. 잿더미 안으로 손을 쭉 집어넣어 몇 번 뒤집기도 했다.
능허도 그런 천무백을 따라 눈치껏 행동했다. 눈을 크게 뜨고 뭐라도 하나 발견할 생각으로 샅샅이 뒤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 해가 저물기 시작할 때쯤에야 천무백은 간신히 무언가 발견했다.
의외로 능허의 불퉁한 중얼거림이 단서가 됐다.
“킁킁, 어휴. 이놈의 잿가루 때문인지 목이 컬컬합니다. 머리도 영 어지럽고.”
“……잿가루?”
천무백이 별안간 손에 묻은 잿가루의 냄새를 맡았다. 눈이 반짝였다.
냄새를 맡던 손가락을 콕 찍어 혀를 살짝 갖다 댔다.
잿더미 특유의 독한 향기와 식감.
그러나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유별한 무언가.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으엑, 뭐 하는 짓입니까.”
“허. 이것들 머리 좀 쓰는구나.”
천무백의 감탄에 능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애당초 흔적을 지운 게 아니라, 흔적을 숨긴 거다.”
“지운 게 아니라고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한 것이거든.”
“강렬하다고요?”
“은밀하기도 하지.”
능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는 하나의 가정.
“독입니까?”
“그래.”
천무백의 얼굴에 떠오른 건 확신이었다.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잿가루가 대기 속에 떠다니면서 탁할 수야 있지. 하지만 말이다. 너 정도 되는 내공을 가진 놈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고? 고작 잿가루에 몇 시진 노출되었다고 말이냐?”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긴, 그랬다. 능허가 천무백 옆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지금의 능허는 웬만한 절정고수와 자웅을 겨룰만한 실력자다.
그도 소림에서 영약을 얼마나 처먹었던가. 그중엔 약선을 하도 졸라 받아낸 상급품도 있다. 그러니 실력은 둘째치고 내공만큼은 대단한 능허다.
“잿가루 사이에 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다. 화마라도 차마 없애지 못할 정도의 극독이.
천무백은 별안간 휘적휘적 걸어 외원 밖으로 한참 걸었다.
잿더미를 벗어나서도 한참 지난 뒤 그는 바닥을 훑어봤다.
“이것들 봐라.”
능허는 천무백의 말에 급히 바닥을 살폈다.
바닥은 그야말로 메마른 것처럼 잡초만 듬성듬성 군데군데 있었다. 한데 다 시든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축 쳐져 있었다.
천무백은 거침없이 더 멀리 나아갔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 점차 울창한 나무와 숲, 그리고 산림이 펼쳐졌다.
파삭 말라버린 듯한 나무들로 이뤄진 산림이었다.
“독기가 여기까지 뻗쳤구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기존 섭진문의 장원에서부터 보통 멀리 떨어진 게 아니다.
섭진문에서 독을 사용했다면, 여기는 직접적인 영향이 끼치는 장소가 아니다.
한데도 나무와 수풀이 가뭄 속 메마른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다 죽은 풀과 나뭅니다. 허, 이럴 수가.”
“그래. 화마로 태워 버렸음에도, 그 남은 독기가 대기로 퍼져 이 정도다.”
“끔찍한 독입니다.”
능허가 혀를 내둘렀다. 독이란 밀폐된 공간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뻥 뚫린 곳이라면 공기가 통해 금세 흩어지지 않는가.
바람속에 흩날려 정화되는 게 바로 독이다.
한데도 그 독이 공기를 타고 여기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건, 정말 극독이란 얘기다.
능허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독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이들은 강호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으니, 개방과 하오문을 동원하면 금세 추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 극독을 다루는 독인(毒人)이라면 강호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천무백의 머릿속에도 떠오르는 인물이 별로 없다.
작금의 강호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뚜렷한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하면 어쩌면 금세 꼬리를 잡을 수도 있다.
능허의 희망찬 발언과는 달리 천무백은 조금 딱딱한 얼굴이었다.
‘내가 모르는 독이다.’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일전의 혈사문 독도 금세 눈치챈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알고 있던 종류였으니까. 이미 한번 경험해봤던 독이니까.
하나 지금은 아니다. 머릿속에 수백년간 축적된 방대한 지식에도 없던 독이다.
당황스러운 사실이다. 이 정도의 극독이라면, 분명 머릿속 비고에 한 줄 정도의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한다.
아예 모르는 것이라면.
‘40년 이내에 개발된 독이란 거겠지. 어떤 독을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닌, 거의 처음으로 만들어진 독.’
당연히 그럴 수 있다.
40년의 간격은 하나의 세대가 말엽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세대가 전성기에 들어가는 시간이니까.
그사이에 이만한 독이 나온다고 해도 놀라운 건 아니다.
진짜 놀라운 건 이만한 독을 개발하는 독인이 나타났단 점이다.
그것도 적에게서.
“독이란 참 골치 아픈 놈들이지.”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정마대전 당시 백도 무림이 독에 얼마나 당했던가.
당문이 본격적으로 합류해 지원하기 전까진, 독에 당한 사상자 비율이 상당했었다.
“능허야, 근방에 독에 조예가 깊은 이들을 알아보거라.”
“직접 조사하시게요?”
“개방과 하오문에만 기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조작된 정보를 넘기면 어찌 되겠느냐? 정보란 건 한쪽에 의지해서만은 안 돼.”
정보가 독점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
하물며 독점한 측에서 그걸 자기들 이익을 위해 조작한다면?
하오문과 개방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문을 두 개나 만들어 둔 것도 그런 이유였고 하남에서 자체적인 정보망을 구축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개방과 하오문의 조력을 받되, 자신도 직접 움직여 조사하는 게 좋았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는 직접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근방 최고 전문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마도 의원중에 독을 잘 아는 이들이 있겠죠.”
* * *
천무백은 곽천후를 통해 섭진문의 멸문에 독이 사용되었음을 알렸다.
독이란 얘기에 비전문은 화들짝 놀라 근방을 다시 재조사했다.
그러자 섭진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최근 정체불명의 병으로 다섯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섭진문이 애당초 수양을 중심으로 하여 외진 곳에 있는 문파라 다행이었다.
만일 성화문처럼 도심 한가운데였으면 끔찍한 참사가 벌여졌으리라.
“아니지. 그래서 섭진문을 노린 것이겠지. 티가 안 나게.”
오히려 섭진문에 독을 사용한 게 바로 그런 이유일 거다.
문파가 멸문 당하면 관아에서는 무림의 분쟁이라 판단하여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 백성들이 독으로 대거 죽어나간다면?
관아는 무조건 관여할 수밖에 없다.
“저들도 관아를 꺼린다는 사실도 나름 소득이군.”
천무백은 그리 중얼거리며 객잔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능허가 근방에서 독과 의술에 가장 조예가 깊은 이를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천무백은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부터 능허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데…….
“뭐냐. 못 찾았냐?”
능허는 웬 할아버지 같은 어울리지 않는 웃음과 함께 객잔에 들어왔다.
옆에는 채가령과 연소운이 있었다.
아마 들어오면서 만난 듯했다.
천무백의 타박에 능허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소립니까. 지금 모셔왔는데.”
“……?”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다소 긴장한 기색의 채가령의 얼굴을 보고 ‘허’하는 감탄을 터뜨렸다.
“설마 그쪽이야?”
“네. 듣자 하니 근방에서 가장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가, 그 어디냐. 어디에서 의술을 배웠다고?”
채가경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호북의 무취의방에서 수학했어요.”
“크. 주군, 주군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무취의방에 대한 소문은 얼핏 들었는데.”
“안다. 무취의방. 약선이 한때 선생 짓을 하던 곳 아니냐.”
물론 과거지만. 약선이 거기서 제약에 관해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의술에 있어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었다.
천무백은 채가령을 쳐다봤다.
“무취의방에서 의술을 익혔다고?”
“네.”
“가문의 진전은?”
“아버지께선 생각보다 완고하신 분이셨거든요. 여자가 검을 잡는 것까진 문제 삼진 않았는데, 가문의 진전은 사내가 이어야 한다고 여기셨어요.”
안 그래도 처진 채가령의 눈꼬리가 더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 꼴을 보는 거 같아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답지 않게 완고하다 못해 고루했지.’
채가령의 증조부 되는 녀석도 그러했으니, 아마 집안 가풍으로 내려왔으리라.
그러고 보니 채가령에게 남동생이 있다고 하니, 그 아이에게 가문을 잇게 할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서 의술을 배웠다고?”
“네. 매번 집에서 아버지한테 된통 당해 무사 아저씨들이 의원에 실려 갔었거든요. 그래서 집에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의술을 배웠어요.”
채가령이 당차게 말했다. 처음 긴장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슬쩍 보니 옆에 호위무사인 연소운이 그런 채가령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거짓은 아니군.’
채가령이 경험은 부족해도, 작금 최신의 의술과 독에는 천무백보다 오히려 나을 것이다.
천무백에겐 40년이란 공백이 있으니까.
“하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채가령이 눈을 빛냈다.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네! 뭐든지요! 시켜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