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5화>
95. 우리는 한배를 탔소.
‘거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구나.’
천무백은 곽용의 늙은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보통 강호인들하면 나이보다 어린 외모를 떠올리곤 한다.
내공의 힘으로 노화가 늦게 찾아온다고 여기니까.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노화를 신경 쓸 틈도 없이 일평생을 싸우고 구른 무인이다. 넓은 중원의 거친 자연환경, 쏟아지는 햇빛, 칼바람 같은 바람.
그 속에서 평생을 싸운 사람들.
바로 곽용이다.
젊은 시절 칼을 잡은 시절부터 강호를 떠돌며 비무행을 했다.
정마대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싸워댔다.
끝나고도 여전했다. 세를 키운 흑도와 사파들을 때려잡는 데 평생을 보냈다.
때문일까.
천무백의 기억 속에 있는 곽용도 나이답지 않게 겉늙었지만, 지금은 더했다.
“혹시 곽천후가 손자입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더냐.”
“그래 보여서요.”
곽용은 토끼눈이 된 채 ‘허허허’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힌 듯한 표정이었다.
천무백은 전생 때처럼 스스럼없이 한 말이었지만, 당하는 처지에서 오죽할까.
새파랗게 어린놈이 되먹지도 않은 농담을 건네니.
그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곽용은 천무백의 눈을 보고 짐짓 긴장했다.
‘내가, 이 곽용이가 말인가?’
다시 보니 평범한 눈빛이었다. 굳건하고 다부진 기세는 느껴졌지만 그렇게 특별할 건 없는 눈이다. 하나 처음 마주쳤을 때, 희미하게 빛나던 안광을 보는 순간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강한 전율이 온몸에 퍼졌다.
‘이놈아. 비무행을 통해 싸우고 싸워서 실력을 늘린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만, 사람 눈을 보고 덤비거라!’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는 사람에게 비무를 걸었다가, 곽용은 처음으로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처맞았다.
하도 아파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노라니, 그 사람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그리 말했었다.
‘눈은 사람을 보여 주는 창이다. 눈을 보고 덤빌 상대인지, 가늠하거라. 내 눈을 보거라. 네놈이 감히 대거리할 상대로 보이더냐?’
그때 제대로 그 양반의 눈을 봤다. 똑바로.
그것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승복하고, 누군가를 경하던 순간이었다.
‘다르다.’
그때의 노회한 눈과 지금 천무백의 눈은 다르다. 완전히 다른 눈이다.
그러나 느껴지는 감정은 비슷했다.
‘이 곽용이가, 고작 저 어린 애송이한테 말인가?’
그러니 입만 달싹거릴 뿐,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무언가 면박을 주려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그런 그를 보며 천무백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앉으시지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함께 들지.”
“천후야. 너도 안 먹었으면 같이 들자. 능허 이놈은 일 시켜서 아직 안 왔다.”
“…….”
그렇게 작은 식탁에 건장한 사내 셋이 앉았다.
셋다 그리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기에 침묵이 맴돌았다.
묘하게 불편한 침묵이었다.
“크흠.”
결국, 불편함을 이기지 못한 곽용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아들놈에게 대충은 들었다. 안휘성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서 화산파가 갔다고?”
“예.”
“그리고 이쪽에는 그대가 왔고?”
“네.”
“혈귀곡이니 뭐니, 이상한 괴집단과 얽힌 문제라고 들었긴 했다만……. 만일 혈귀곡이라는 배후 집단이 있다면, 자네가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천무백이 담담하게 받았다.
“왜요. 기대했던 화산이 아니라 걱정되십니까?”
“소림을 치고, 대놓고 중소문파들을 멸문시키는 놈들이 배후라면 그 위세가 만만치 않은 건 자명한 일. 구파일방이 괜히 거대문파겠는가? 무공이야 우리도 밀리지 않아.”
곽용은 당당하게 말했다. 가슴을 활짝 펴는 모습이 진심으로 그리 여기는 듯했다.
“전쟁이 아닌 전투라면, 구파일방과 자웅을 겨뤄도 우린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소수정예.
비검문이 지향하는 바였다.
실제로 소속된 무인 한 명의 무력이 대단한 수준이다. 다만 인원이 적어 구파일방과 비견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비검문이 바랐던 건, 화산파 같은 대문파의 인력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무공과 많은 숫자의 무사들.
이들이라면 충분히 이번 사건을 도와주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천무백 혼자 왔다.
“능허도 왔소.”
“그 친구는 또 누군데?”
곽용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능허 놈이 들으면 섭섭하겠네. 독안사라고 있소.”
“말장난은 그만하게. 내가 원했던 건 명문정파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정보력, 그리고 인력일세. 강력한 무공? 그거야 내가 있는데 무슨 필요인가.”
실로 광오한 말이었지만 곽용의 표정엔 단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다.
하니 천무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휘의 남궁세가는 오히려 안타까워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이더냐.”
“내가 아니라 화산이 왔다고 말이죠.”
“…….”
곽용은 입을 쩍 벌렸다. 자신보다 더 광오한 말이 아닌가.
일개 개인이 화산의 조력보다 낫다고 역설하는 꼴이라니.
한데 곽용이 뭐라 할 수 없던 게, 방금 봤던 그 안광이 천무백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왠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신뢰가 생겼다.
“그럼 그쪽이 정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가?”
“이미 어느 정도 도움을 드렸는데 말이지요.”
곽용이 고개를 갸웃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적룡방 말이더냐?”
“네. 눈엣가시 같던 놈들을 해결해 줬으니까요.”
“무슨 소리냐. 결국, 무사들을 이끌고 끝장낸 건 나와 비검문이다.”
“적룡방주를 죽인 건 나죠.”
“흥. 내가 적룡방주를 못 죽일 것 같더냐?”
“예.”
“……뭐라?”
천무백의 너무 당연한 듯한 어조에 곽용은 화를 내지도 못했다.
“못 죽입니다.”
“허. 내가 그놈보다 약해 보이느냐?”
“아니요. 세죠.”
세지.
그건 천무백이 아주 잘 알았다. 전생에서 그래도 자신의 제자였던 검존하고 제법 호각을 이룬 적도 한 두어 번 있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강호란 게 단순히 강하다고 모든 게 만사형통인 곳이 아니다.
숱한 은원이 인연으로 얽혀 있으니, 강호란 수렁과도 같다.
“그럼 왜 지금까지 적룡방주를 못 쳤습니까?”
“……!”
“적룡방주 뒤에 태룡방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곽용의 동공이 흔들렸다.
“숫자 앞에선 장사 없는 법이라고, 태룡방과 전면전을 펼치면 비검문으로선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곽용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강호의 풍문대로 무공 실력이 뛰어난 협의 넘치는 협객인 줄 알았건만.
‘강호판은 수십 년 굴러다닌 노회한 놈 같구나.’
단숨에 이야기의 핵심을 짚은 건 물론, 상대방이 뭐라 말할 수도 없게 쭉 파고드는 화술은 감탄마저 들었다.
“그러니 내가 도와준 거 아니겠습니까. 그쪽이 못 건든 적룡방주, 내가 죽였습니다. 태룡방주의 원한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
곽용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 따지면 비검문은 이미 천무백의 도움을 받았다.
하나…….
곽용이 염세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태룡방주가 그리 호락호락 한 놈 같더냐? 직후에 우리가 적룡방을 쳤으니, 비검문과 네놈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겠지. 비단 원한이 너에게만 향하겠느냐? 아니다. 우리에게도 향한다.”
“맞습니다. 근데 어쩌겠습니까. 적룡방이 혈귀곡하고 연관된 것도 확실하고, 심지어 태룡방하고도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은 태룡방이 이번 혈사와 관계되어 있단 말이냐?”
천무백은 어제 낙화루에서 얻어낸 정보를 풀어냈다.
비단 곽용뿐 아니라 옆에서 답지 않게 침묵하던 곽천후의 얼굴도 파르르 떨렸다.
“혈귀곡이란 배후집단도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태룡방까지 얽혀 있다면…….”
“어마어마하지요? 이제 실감이 나십니까? 지금 비검문은 위기에 빠진 겁니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곽용은 아무 말 못하고 천무백을 쳐다봤다. 기선을 제압하겠다고 당당하게 들어왔던 그는 어느새 천무백의 기세에 잡아먹혀 있었다.
“뭐라?”
“비검문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비검문도 날 좀 도와야겠습니다. 혈귀곡이란 공통의 적이 생겼으니까요.”
“그 무슨…….”
“혈귀곡은 홀로 상대할 놈들이 아닙니다. 같이 싸워야지요. 뭐, 싫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태룡방의 원한이 비검문으로도 향할 텐데, 싸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곽용은 입을 다물었다.
얽혔다.
함정? 아니 함정 같은 건 아니다.
그냥 천무백이 말하는 대로, 제대로 얽혀들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강호라는 이름의 수렁. 수많은 은원으로 얽힌 인연이 옭아매는 걸 느꼈다.
천무백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한배를 탔습니다. 비검문주님.”
천무백이 새하얗게 웃었다.
* * *
“비검문주랑 만났다면서요?”
개방, 하오문과 접촉하고 돌아온 능허는 곧장 보고했다.
“뭐, 태룡방의 움직임은 워낙 내용이 많아서요. 여기 보고서 잔뜩 있습니다. 대충 엄청 특별한 이상징후는 없습니다. 백모쌍귀도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
“네. 그 형 되는 놈은 소림에서 도망간 혈귀곡 노인네라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동생 되는 놈도 우리가 아는 정보랑 같습니다. 존재를 감췄다가 최근 혈사 때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요.”
결국, 영양가 있는 알맹이는 없었다.
태룡방과 적룡방, 그리고 혈귀곡.
이 세 단체가 관련되어 중경성과 안휘성의 혈사를 일으킨 건 확실했다.
여기서 더 캐낼 수 있는 건 바로 백모쌍귀의 동생.
그놈을 잡아 족치면 확실한 무언가 나올 게 분명했다.
문제는 행적도 묘연하니 여기서 더 파고들 순 없다.
하면 우회해야 한다.
“비검문하고 손잡았다.”
“손이요?”
“나는 여기서 이번 혈사에 대해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혈귀곡을 상대하는 데 비검문도 도움을 주기로. 뭐 일종의 동맹관계지.”
“화산과 소림에 이어 비검문이라…….”
“그쯤은 해야지.”
그렇다. 이쪽도 나름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천무백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이와 같은 규모의 싸움에선 숫자가 필요했다. 그것도 실력 있는 숫자가.
비검문은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하다.
우선 그 문주인 곽용부터가 천무백이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던가.
“하니 우선 여기서부터 일을 파고들자.”
“응? 섭진문 말입니까? 여기도 이번 혈사에 멸문당한 곳이죠?”
“그래. 아예 깡그리 사라진 곳.”
“왜 여길 조사합니까?”
“비검문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
“석연찮다?”
“불로 태워 버렸거든. 전부.”
능허가 눈을 끔뻑거렸다.
“왜요?”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겠지.”
능허가 팔짱을 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 불로 태워서라도 지워야 할 흔적이 남았다는 거네요? 다른 곳이랑 다르게?”
“크으. 우리 능허, 갈수록 잔머리 잘 굴려.”
오랜만에 칭찬을 들은 능허의 광대가 올라갔다.
천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흔적을 지우겠다고 다 태운 거겠지만, 그런다고 모든 흔적이 다 사라지겠느냐.”
“흠. 찾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그래서 비검문도 뭐 못 찾았지 않습니까?”
“그건 비검문이고.”
천무백이 씩 웃었다.
“난 찾는다.”
아주 조그만 한 흔적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