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4화>
94. 투신(鬪神) 곽용
“음.”
하루가 지나고 천무백이 객잔 일층으로 내려왔을 때,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채가령과 능허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천무백은 멀찍이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째, 못난 삼촌하고 조카 같군.’
차마 딸과 아비 같아 보인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생긴 게 너무 다르니까.
때마침 채가령이 능허에게 뭔가를 건네주곤, 연소운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천무백이 능허에게 다가갔다.
“뭐냐.”
“아, 이거 말입니까. 저 아이가 줬습니다.”
“뭔데? 음, 단약인가?”
“네. 듣자하니 저 아이는 독문무공을 익히지 않고 일찍이 의술을 익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 자신이 제조한 약이라고…….”
작은 보자기 안에 놓여 있는 건 약간 지독한 향을 풍기는 단약이었다.
쓰면 쓸수록 좋은 약이라고 하지만, 고아한 향이 아니라 이런 향이라면…….
“흐흐흐. 조금 조악한 거 같죠? 응? 우리한텐 약선이 만든 단약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한들, 약을 제조하는 건 또 다른 분야니까.
하물며 천무백은 소림에서 받아온 약선의 단약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바르기만 해도 상처가 낫고, 먹기만 해도 내상이 치료되는, 거의 영약 수준에 근접한 단약이다.
“아직 일을 다 해결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평소 악연이 깊었던 적룡방을 무너뜨려 줘서 주는 거랍니다. 감사하다고, 전해달래요.”
능허는 쭈뼛쭈뼛하며 약을 건네던 채가령이 귀여운지 노인네 같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천무백은 그런 능허를 보곤 가볍게 대꾸했다.
“내놔.”
“……네?”
“적룡방 무너뜨린 건 난데, 네가 왜 받아?”
“아…… 물론 주군 드리라고 한거긴 한데, 제 몫도…….”
“내놔.”
“…….”
* * *
천무백은 능허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하오문과 개방에 접촉해. 태룡방의 근황과 움직임, 그리고 백모쌍귀에 대해 다 캐내 와.”
능허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움직였다.
천무백은 객잔에 주문해 일부러 정갈하게 식사를 마치곤 잠깐 고민에 잠겼다.
“주인장.”
“네, 나으리.”
천무백의 부름에 객잔 주인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바로 튀어나왔다.
천무백이 강호인인 걸 알았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연무장이 딸려 있소?”
“어……. 연무장은 없고, 뒷마당은 있습니다만요.”
객잔 주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천무백은 침음성을 내뱉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객잔의 뒷마당이라 하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알겠소. 혹여 날 찾는 이가 있으면, 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기다리라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천무백은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이건 내 방식이 아니긴 하다만…….”
천무백은 방에 들어와 검집을 풀어 한쪽에 놓았다.
대신 그가 손에 잡은 건 비파였다. 낙화루에서 연주한 것과는 달리 현이 3개인 삼현비파.
천무백은 비파를 잡았다. 근래 천무백은 비파를 잡은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경천혼공에 도움이 되는 건 피리와 같은 관악기였다.
내공 운기란 외부의 기를 받아들여 안에 축적함이 기본 골자다.
외부의 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바로 호흡이다.
천무백이 피리나 대금을 연주하며 경천혼공을 운기했던 이유다.
물론 악기를 연주하면 백회혈이 자극되어 상단전이 더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도 있지만, 관악기를 불면서 호흡을 조절하는 과정이 의외로 내공운기에 꽤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일까.
피리를 불던 것과는 달리 낙화루에서 비파를 연주했을 때, 무언가 새로운 실마리를 잡았다.
‘검을 쓰는 것과 굳이 다르진 않다.’
머릿속에서 악보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숱한 초식이 떠올랐다.
거기에 천무백은 어제 적룡방주를 상대하며 느낀 감각을 겹쳤다.
따다당.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현을 짚고, 퉁기며 선율이 흘러나온다.
선율이 흐름과 동시에 천무백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확 넓어졌다.
징-
현을 퉁기고, 다시 짚는 순간 머릿속에 가상의 적이 나타났다.
적룡방주였다.
따당, 땅.
조금은 날카롭게, 쭉 째지는 듯한 비파 소리.
가상의 적룡방주를 향해 천무백의 검이 급변하며 내뻗어진다.
징-징-징-
현을 퉁기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무의식의 상념속에서 천무백의 검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적룡방주가 암기를 뿌리고 기습적으로 중검을 던지듯 뻗어오며 파고든다.
징!
순간 선율이 멈추듯 진동했다. 급격한 정지.
천무백의 검이 검집 안에 들어갔다.
납검(納劍).
적룡방주가 품속까지 파고들고, 중검이 복부에 박혀드려는 순간.
천무백의 검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발검(拔劍)이었다.
지잉!
비파의 음율이 거세게 진동했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적룡방주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것은 관(貫).’
천무백이 본래 검을 익힐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개의 검이 있었다.
천무백이 삼재검성으로 살 때 만든 삼재검이 바로 이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삼재검을 찌르기, 가로베기, 세로베기로 여긴다.
그래서 삼류무공으로 취급받지만, 숱한 사람들이 삼재검성의 후인들이 펼쳤던 삼재검만큼은 다르다고 입을 맞춰 얘기했다.
천무백의 삼재검은 단순 찌르고 베는 게 아니었다.
전신의 공력을 검 끝에 압축하고 또 압축한다. 검기를 발출하진 않으나 내지르는 순간 모든 걸 뚫어 버리겠다는 일념을 싣는다.
그것이 관(貫)이었다.
벼락처럼 발검하여 적을 꿰뚫어 버리는 관통이었다.
따당, 땅.
비파의 선율이 천천히 다시 흘렀다.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마가 꿰뚫린 적룡방주가 다시 서서히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는 혈사문주 도문탁이 나타났다.
띠딩, 띵.
선율이 서서히 치닫는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불안한 음색.
긴장감이 고조된다. 천무백의 검 역시 선율에 맞춰 적을 경계한다.
왼쪽에서 혈사문주가, 오른쪽에선 적룡방주가 치닫는다.
징징징징.
선율이 순간 화려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쏟아냈다. 화려한 기교가 더해져 음악은 더욱 더 다채로워진다.
어깨와 팔꿈치, 손목, 손가락, 그리고 검끝까지.
일자로 쭉 뻗어나간 검.
검은 정지했다.
그러나 어깨부터 팔꿈치 손목, 손끝에 이르기까지.
근육이 뒤틀렸다.
념(捻)이다.
념은 회전력이다. 검은 정지해 있으나, 동작에서 움직임이 바뀐다. 일자로 뻗은 팔이 내부에서 비틀려지고 꼬아진다. 그 회전력이 온전히 검에 담긴다. 거기에 공력이 실린다.
찡!
선율이 찢어지듯이 고음으로 치달았다.
양옆으로 육박해 오는 도문탁과 적룡방주의 목이 잘려 허공으로 치솟았다.
선율이 잠잠해졌다.
이제 여기서 연주를 끝낼까. 천무백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천무백의 검이 아직 아니라는 듯 진동했다.
딩딩딩.
음률이 다시 고조됐다.
목이 잘린 적룡방주와 도문탁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서 국보와 전현이 각기 자신만의 검을 펼쳤다.
천무백의 상단전이 한계까지 열렸다. 비파의 현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요동쳤다. 그 위로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위기를 알리는 듯, 찢어질 듯한 고음이 마구 쏟아졌다.
머릿속이 선율에 맞춰 핑핑핑 돈다.
관을 검에 담는다. 한 명의 머리를 꿰뚫으나, 나머지 세 명의 검이 몸을 파고든다.
불가하다.
념을 검에 담는다. 두 명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치지만, 뒤에서 두 개의 검이 등을 파고든다.
불가하다.
하면.
‘창(漲)이다.’
전신의 공력이 모두 검에 담긴다. 압축하고, 또 압축해도 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공력이 쏟아진다. 결국 넘쳐난다. 넘쳐나는 공력은 거센 기세로 발출된다. 내공이 유형화되어 주위로 퍼져나간다.
창은 넘침이다.
압축과 압축을 해도 담지 못해 넘쳐나는 순간.
어마어마한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삼재검의 마지막.
창(漲)이 적을 뒤덮는다.
달려든 네 명이 쏟아진 공력에 전신이 난자당한 채 쓰러진다.
띵띵띵 지잉-!
찢어질 듯 고음을 내뱉던 비파가 뚝 끊긴다. 세 개의 현이 끊어졌다.
천무백은 사고를 정지하고 눈을 떴다.
천둔검법은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 오로지 순수함만을 담고 있다.
모든 초식에서 탈피해 천무백이 휘두르는 대로 가장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검이다.
여동빈의 천둔검법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검이다.
거기에 천무백은 그가 맨 처음, 검을 잡아 처음으로 나아갔을 때의 삼재검을 담았다.
천무백은 끊어진 비파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삶에서의 깨달음이 경천혼공과 천둔검법이라면.
숱한 전생 중 가장 중요했던 깨달음은 바로 삼재검이었다.
비파를 연주하며 경천혼공을 일깨웠고,
사고 속에 천둔검법을 휘두르며 검 본연의 의미를 되새겼으며,
마지막으로 관, 념, 창의 세 가지 삼재검을 담았다.
‘이번 생의 깨달음에, 과거의 깨달음을 담았다.’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촛불 하나 일렁이지 않는 그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환희에 찬 미소였다.
‘나는 나아갔다.’
한 발짝 더.
천무백의 안광이 새하얗게 빛났다.
* * *
곽천후는 곽용을 모시고 천무백이 머무르던 객잔에 도착했다.
끝내 곽용이 직접 찾아왔다.
적어도 이 중경성에서 곽용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배분만으로 따지면 전 강호를 통틀어서도 몇 없다.
하니 곽용이 자존심을 접고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건, 여기저기 알려진다면 크게 놀랄 일이다.
“끙. 빌어먹을 거지새끼들이 눈에 띄는구나.”
“천무백은 지금 개방과 협력하고 있으니까요.”
“저 거지 놈들이 오늘 일을 또 얼마나 떠들어댈지……끄응.”
곽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거렸다.
그는 강한 무공만큼 오만한 성격도 가졌다. 저보다 무위가 낮은 이들은 배분을 떠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현 강호에서 가장 높은 배분에 속했고, 명성도 갖췄으며 무엇보다 정마대전의 영웅이었으니까.
그런 아버지의 등을 보며 곽천후는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은 그딴 거 신경 안 쓰는데 말이지.’
그래도 화산파 장문인이나 높은 사람 보면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긴 하지만…….
글쎄.
불같은 아버지 성격과 잘 맞으려나.
‘하긴, 내가 걱정할 건 아니지.’
의외로 궁금하기도 했다.
천무백 그놈이 좀 아버지한테 기가 죽는 광경을.
“여깁니다.”
곽천후는 객잔에 도착해 들어가 천무백을 부르려고 했다.
한데 그때였다.
곽용이 미간을 좁힌 채 걸어갔다.
“이 방자한 녀석. 일부러 밖에서부터 기세를 줄줄 흘리면서 왔는데, 쳐다도 안 보네?”
“…….”
“애송아, 나오거라. 강호 선배를 만났으면 인사를 올려야지.”
낮지만 깊은 목소리였다.
지르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중후하게 객잔 전체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곽천후는 그것이 아버지만의 일종의 기선제압임을 눈치 챘다.
아니면 일종의 시험.
천룡검협이란 떠들썩한 명성에 맞는 놈인가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그때, 2층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천무백이 천천히 내려왔다.
천무백이 빙긋 환한 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불초 후학이 강호 선배이신 투신 어르신을 뵈옵니다.”
그 순간.
곽용은 침음을 삼켰다.
‘눈…….’
천무백의 희미한 안광이 닿는 순간.
곽용은 과거를 떠올렸다.
숱하게 전선을 따라다니며 그저 우러러 봤던 그 눈이었다.
‘검신 어르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