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3화>
93. 부전자전
어떤 분야든 10년을 파고들면 대가가 된다는 격언이 있다.
그 말이 전부 맞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합당한 이야기다.
천무백이 전생을 각성하기 이전까지.
무려 10년.
글자를 배우면서 천무백이 손에 잡은 게 바로 악기였다.
지잉. 지잉.
손가락이 현을 짚을 때 울리는 진동.
검을 잡을 때와는 다른 묘한 감흥이었다.
매번 경천혼공을 운기할 때마다 여러 악기를 썼고, 느낀 바도 많다.
천무백은 악기를 다루는 일련의 과정을 검을 쓰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기다란 오른손 검지가 춤을 추듯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처음은 부드럽고 천천히.
자세를 잡고 기수식을 취하고 검을 휘두르기 전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이내 손가락은 유려하게 춤추듯 움직였다. 다섯 개의 현을 천천히 오가면서, 선율이 미려해진다.
“……!”
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을 짚고, 퉁기고, 다시 놓을 때를 보라.
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현을 다 통제하에 놓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주다.
선율은 빨라졌다가, 이내 다시 급격하게 느려졌다.
천무백은 악보를 머릿속에 되뇌는 게 아니었다.
그간 수없이 써왔던 검의 형(形)과 식(式)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검이 움직인다. 선율이 다채롭게 변한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교는 없었다.
다채로운 박자에 담백한 기교였지만, 그만큼 묵직한 울림이었다.
설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건 보기 드문 연주라고.
갈수록 선율이 전하는 바는 강렬해졌다.
유명한 곡조였다.
오랫동안 장사를 하러 중원을 떠돌아다녔다가, 집에 돌아와서 무슨 별일 없었냐고 묻는 민간의 노래였다.
평범하고도 특별할 일 없는 민요가 천무백의 비파에서는 더 풍부해지고 강렬해졌다. 묵직하고 의미를 뚜렷이 담는다.
마치 천무백이 곡조 속의 장사꾼이 되고, 설아는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천무백의 손가락이 마지막 현을 뜯었다.
“…….”
천무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비파를 건넸다.
“답가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설아가 미묘한 얼굴로 비파를 받아들였다.
* * *
“진짜 이대로 갑니까?”
낙화루를 나오며 능허가 연신 뒤를 돌아봤다.
능허는 ‘이럴 리가 없는데.’ 작게 중얼거렸다.
“가서 좀 쉬자. 낮부터 적룡방주랑 싸우고 진이 다 빠졌다.”
“아니, 정말 순순하게 갑자기 마음이 넓어지신 겁니까?”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일갈했다.
“갑자기 득도하셨나. 무슨 부처가 되셨나. 답지 않게 왜 순순히 물러납니까. 이거 임홍이 들었으면 한탄을 할 겁니다. 그 양반은 장보도를 반냥에 안 넘겼다고 뒤질 듯이 맞았는데. 아주 그냥…….”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는데, 가야지 그러면.”
“네?”
천무백의 태연한 말에 능허는 고개를 갸웃했다.
얻다니, 뭘?
기껏해야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낙화루 최고의 예기라는 설아의 비파 연주를 듣고 온대 전부지 않은가?
“언제부터 그리 마음이 넓어지셨나. 참나.”
“군자의 뜻을 소인배가 어찌 헤아리오.”
“거참. 나 소인배 맞으니까, 군자이신 주군이 설명 좀 해 주쇼. 대체 우리가 뭘 얻었다는 겁니까. 적룡방주가 만난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못 알아내지 않습니까.”
“내가 처음 연주한 곡조가 뭔지 아느냐?”
“모릅니다.”
“중원을 떠돌며 오랫동안 집을 떠난 가장이, 별안간 돌아와서 그간 별 일 없었냐고 묻는 평범한 민간의 노래다. 힘들었거나 핍박받은 일이 있으면 다 말하라고. 자신이 해결해 준다고 허세를 떠는 못난 남편의 노래지.”
“그래서요.”
능허의 얼굴이 뚱해졌다.
“하니 그 기녀가 불러준 답가가 무엇인지 아느냐.”
“주군. 죄송합니다만, 전 평생 칼밥 먹은 무식한 놈이라 음악은 전혀 모릅니다.”
“쯧쯧, 풍류도 모르는 한심한 놈 같으니.”
능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요즘 저 놀리는 짓에 재미 들렸습니까? 어서 본론이나 얘기 하십쇼.”
“그 아이가 답한 곡조가 전쟁에 나간 친형님을 그리워하는 시조다.”
능허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전혀 답가 같지가 않은데요?”
“전쟁에 나간 형님을 그리워하다가,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는 내용이지. 결국 형님은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단 뜻이지만, 그냥 겉만 보거라.”
“겉이요? 형을 그리워하다 백발이 됐다……?”
능허가 감을 잡지 못하자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룡방주의 형이 누구냐.”
“그놈 외동인데요.”
빠악!
능허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눈물을 삼켰다.
“적룡방주에게 형이 어딨…… 아! 태룡방!”
“그래.”
적룡방주가 태룡방주와 호형호제 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 아닌가.
능허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님은 태룡방주고, 기다리다 백발이 됐다는 건……백모쌍귀를 말하는 겁니까?”
“맞다. 하면 그날 적룡방주가 만난 이는 백모쌍귀고, 그 만남을 주선한 건 태룡방주겠지. 아니면 태룡방주가 백모쌍귀를 내려 보낸 것일 수도 있고.”
전혀 주제가 맞지 않은 답가였으니 저 뜻을 전하기 위함이리라.
천무백의 결론에 능허는 입을 쩍 벌렸다.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참 소리 한번 기똥차구나! 하고 감탄만 늘어놓다니.
“낙화루에서도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으니 체면은 차렸지. 오히려 천룡검협이란 명성에 굴하지 않고 손님의 비밀을 지켰다고 소문이 날 것이니 그들로서도 남을 장사고.”
“이야…… 그런 깊은 뜻일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의 능허였다면 장난스럽게 비꼬았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상황에서 상대방 입장까지 배려했고, 얻을 건, 다 얻었다. 심지어 기발한 방법으로.
하물며 그 방법을 안다고 해도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무인들 중에 음공을 익힌 이들 빼곤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잠깐, 그러면 태룡방이 혈귀곡하고 관련 있단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
“니미럴…….”
감탄도 잠깐이었다. 능허는 냉혹한 진실에 얼굴을 구겼다.
태룡방은 단순 흑도라고 지칭할 단체가 절대 아니었다.
단순히 싸움 잘하는 흑도들이 모인 곳도 아니었다.
엄연히 하나의 문파였다. 강호 문파. 그것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도 함부로 건들기 힘든 태룡방이다.
지금까지 중경성에서 비검문이 왜 적룡방을 못 쳤나?
적룡방주가 강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비검문의 문주는 창천검신의 뒤를 쫓아 정마대전에서 활약한 투신 곽용이 아닌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적룡방을 몰살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적룡방이 태룡방과 밀접한 사이란 점.
그리고 적룡방주와 흑룡방주의 호형호제하는 개인의 친분까지.
그것들이 천하의 투신이 적룡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혈귀곡도 지금껏 드러난 꼬리만 봐도 절대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하물며 그놈들이 태룡방과 협력관계, 아니면 아예 뜻을 같이하는 놈들이라면?
“와 시바…….”
태룡방은 단순 흑도가 아니다. 흑도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질이 나쁜 사파에서도 큰형님 노릇하는 양반들이다.
“이거 정마대전이 아니라 정사대전 일어날 조짐 아닙니까.”
“더 자세한 건 캐 봐야지. 오히려 태룡방이 혈귀곡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왜 안 돼? 혈사문도 말 잘 듣는 개새끼로 만든 놈들인데.”
“거참…….”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이 머무르던 객잔에 도착했다.
객잔에는 곽천후가 피곤한 기색으로 먼저 와 있었다.
“일은 해결됐나?”
“됐다.”
“거기도 때려 부쉈나?”
“전혀.”
천무백의 담담한 말에 곽천후가 미간을 좁혔다.
“적룡방은 사라졌다.”
“그래? 잘됐군.”
“아버지가 너 좀 보잔다.”
“그래? 기다리고 있나?”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2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객잔에 와 있느냐는 의미였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자신이 찾아가는 게 아니라 왔는지 찾아보는 게.
곽천후가 이젠 익숙한 듯 담담하게 받았다.
“아니, 이곳엔 없다.”
“날 불렀다고?”
“그래.”
“오라 해.”
“…….”
“용무 있는 놈이 찾아와야지.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싸가지 없는 게 아주 부전자전이에요. 부전자전. 음. 이건 못 들은 거로 하고, 보고 싶으면 아버님 모셔와.”
이미 제 앞에서 아비 욕을 해놓곤 못 들은 거로 하라니.
곽천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나, 이놈이나.
상대하기는 참 똑같이 곤란하다.
* * *
결국, 곽천후는 천무백을 대동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저 왔습니다.”
비검문은 중경성에서 가장 세가 강한 문파임을 입증하는 듯, 지역마다 거점을 두고 있었다.
그중 적룡방 근방에 거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 연무장에서 곽용은 수련 중이었다.
잘 짜인 그림 같은 등근육의 뒷모습을 보며 곽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의 영웅, 나의 우상, 나의 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곽천후의 아버지 곽용은 영웅이었다.
문파의 모든 무사가 아버지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건 윽박질러서 강제로 취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봤다. 진심으로 따르는 표정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나이가 하나씩 먹으면서, 또 무공을 익히면서.
그는 아버지의 무력을 체감했고 경악했다.
깊고 중후하고도 강대한 내공과 날카롭고 매서운 초식은 중경성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넌 내가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한 그 사람만큼 위대한 무인이 될 수 있다. 그만한 재능이 있다.’
하여 검을 잡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수련에 수련을 했고 숱한 비무를 치렀으며 어느덧 그에게 사람들은 투귀라는 별호를 붙여 줬다.
어느 순간부터 중경성의 최고 후기지수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를 지목해 남궁의 대공자와 매화일검과 비등한 고수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냉담했다.
‘멀었다, 부족하다, 정진해라…….’
단 한 번도 칭찬을 듣지 못했다.
기껏해야 ‘수고했다’는 한마디에 감동해서 운적도 있다.
그런 아버지가 못내 미웠고 싫었다. 그래도 존경했다. 강했으니까. 무인으로서 아버지는 한없이 대단하고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곽용이 검을 거둬들이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왔음을 진작 기척을 느꼈지만, 그는 수련이 다 끝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왔느냐.”
“네, 아버지.”
“그놈은?”
“안 왔습니다.”
“허, 맹랑한…….”
곽용이 혀를 차다 문득 곽천후의 눈을 바라봤다.
“어떻더냐. 매화일검이나, 종남풍검, 그 애송이들은.”
“강하더군요.”
“쯧. 강호는 넓은 걸 실감했느냐?”
“예. 고수는 많았습니다.”
“보아하니 제법 검 쓰는 게 날카로워진 것 같더군.”
곽천후는 대답하지 않고 빤히 곽용을 바라봤다.
순간 심장이 두근댔다.
그도 스스로 느꼈다.
천무백과 다니면서 보고, 느끼고, 체득한 바가 컸다. 섬서성으로 떠난 게 불과 한 달 전.
그 한 달 사이 곽천후는 성장했다고 느꼈다. 하여 기대했다. 저 냉담한 얼굴에서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가 나오기를.
하나 곽용은 여전했다.
“하지만 멀었다.”
“…….”
“적룡방주의 시신을 봤다. 천룡검협, 그 애송이 놈이 만만치 않더구나. 상처를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야.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느냐.”
“……네. 그렇지요.”
“그놈을 목표로 삼아라.”
칭찬 한마디 건네지 않는 삭막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도 잠시.
천무백을 가리켜 목표로 삼으란 말에 그는 승부욕이 타오르는 걸 느꼈다.
싸움을 즐기는 투신 곽용, 그리고 아들 투귀 곽천후.
‘그놈 말대로 부전자전이구나.’
곽용은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