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92화 (92/318)

<검신재생 92화>

92. 선율 위에 강호는 흐르고

적룡방에서 거하게 칼춤을 춘 천무백은 쉬지도 않고 능허를 데리고 움직였다.

피가 채 다 식기도 전에 도착한 곳은 낙화루.

“하오문에서도 못 건든 곳입니다.”

“루주 뒤에 누가 있나?”

“듣기론 고위 관료가 있다고 합니다.”

“하면 하오문을 경계할 만하지.”

천무백은 능허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이 온갖 하류인생들이 모인 곳이라지만, 그렇다고 밑바닥 인생들 전부가 하오문도인 건 아니다. 기녀나 건달이나 점소이 전부가 하오문이면, 누가 기루를 방문하겠는가.

누가 객잔에서 맘 편히 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겠는가. 누가 기루에서 술 마시면서 은밀한 얘기를 나누겠는가.

하여 하오문에서 작정하고 밀어 줘서 규모를 키운 기루가 아니면 오히려 하오문을 경계하기도 한다.

가령 지금의 낙화루가 그렇다.

“여기 취업 조건에 하오문도는 절대 금지라는 조항이 있답니다.”

“그걸 어떻게 걸러?”

“뒷배가 관아 쪽이란 얘기라는 거니, 꽤 신빙성 있는 거죠.”

관료들만큼 하오문의 귀를 무서워하는 놈들은 없다.

언제 투서가 감찰관들에게 전해질지 모르니까.

낙화루는 애당초 관아를 뒷배로 두고, 하오문과 거리를 뒀다.

그러니 오히려 성황을 이룬다. 은밀한 만남과 하오문에게 행방이 발각되기 싫은 이들. 고위 관료들이나 강호인들이 찾아드니 불야성을 이룬다.

적룡방주가 이곳에서 만난 것도 그런 이유다.

오히려 적룡방에서 만나면, 개방의 정보망에 잡혔으리라.

“그래도 하오문이 대단하긴 하죠. 개방도 놓친 행적을 찾았으니까.”

당시 만남에서 정확히 누굴 만났고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하오문도 얻지 못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기 기녀들이 퍽도 잘 말해 주겠습니까?”

“글쎄······.”

관아가 뒷배라니, 귀찮은 존재가 붙어 있네.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라지만, 결국 이 땅은 관의 것이 아닌가.

괜히 척을 졌다간 이것저것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특히 청성표국이 있지 않은가. 표국 업무를 위해선 관이 협조적일수록 좋다.

“일단은 부딪쳐야지.”

“적룡방주 개새끼. 그냥 말하고 뒈지면 얼마나 좋아.”

“혈귀곡인 건 확실하니, 이것만 해도 큰 성과다.”

피로 물든 계곡의 귀신들.

적룡방주는 아마 천무백이 겁을 먹으리라 생각하고 내뱉었겠지만, 천무백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했으니, 이제 천무백은 거리낌이 없었다.

“예약 하셨습니까?”

아직 초저녁이건만 낙화루는 벌써 불을 밝힌 채 손님을 받고 있었다.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소?”

“아, 저희 낙화루를 처음 방문하시는군요. 3층부터는 예약한 손님만 입장 가능합니다.”

“3층부터라면?”

“저희 기루 최고의 풍류지요.”

문지기가 썩 당당하게 말했다.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루 루주인 만큼 어떤 체계인지 눈치 챘다. 슬쩍 전각을 보니 2층까진 붉은 등이 올라가 있었다.

홍루란 얘기다.

하지만 3층부터는 푸른 등이 올라갔다. 청루였다.

즉 3층부턴 음악과 서화를 즐기는 손님들이니, 고위관료일 확률이 높았다.

적룡방주가 은밀히 방문했을 정도라면, 아마 3층이 아니라 그 이상일 텐데······.

예약을 해야만 가능하다면 지금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능허가 슥 천무백을 뒤돌아봤다.

어찌할 것이냐는 물음.

사실 능허는 살짝 걱정하다가 그게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맨 처음 연화루에 천무백이 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냥 안하무인 미친놈이지. 직진밖에 모르는.’

그리고 천무백은 능허의 생각대로 빙빙 돌아가는 걸 질색하는 성향이다.

“루주를 만날 수 있겠소?”

문지기가 순간 당황한 듯 천무백을 위아래로 쭉 훑어봤다.

다짜고짜 루주를 찾는 사람.

그만한 위치와 직위, 힘이 있단 얘기다.

‘너무 어린데?’

문지기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은 당연했다.

천무백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활용할 수 있는 건 다 활용하는 편이었다.

가령.

“천룡검협, 천무백이오.”

자신의 명성 같은 것도.

* * *

기루 입장에서 강호인들은 중요한 손님이기도 하지만, 껄끄러운 불청객이기도 했다.

기루 장사에 있어 강호인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술과 여자, 음악을 풍류처럼 여겼으니까. 돈 쓰는 일도 물 쓰듯이 썼다. 평생 칼밥만 먹고 살아 그런걸까. 금전 개념이 많이 부족했다.

불청객이기도 했다.

수틀리면 칼부림이 일어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기루에서도 자체적으로 무사들을 고용했고, 이에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더 강한 무사를 고용할수록 많은 지출이 생긴다.

돈값을 제대로 하려면 높은 명성을 지닌 무사를 고용해야 한다.

낙화루에 고용된 철조응(鐵造鷹)도 절정의 무사로 중경성에서 이름 높은 무사였다.

낙화루주 당소가 철조응을 불러 캐물었다.

“천룡검협, 정말로 소문처럼 강해요?”

“갑자기 천룡검협은 왜 그렇습니까?”

“그 작자가 날 찾아왔어요.”

그 말에 철조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당소를 바라봤다.

미간을 좁혀 주름이 잡혔지만, 그래도 미색은 젊었을 적 여전한 당소였다.

표정을 보건데 짓궂은 장난은 아니었다.

“천룡겁협 그자가 정말 지금 찾아왔다고요?”

“일단 방에 모셔놨어요. 다름이 아니라 날 찾더라고요.”

“맙소사. 그거 아십니까? 적룡방주가 오늘 낮에 죽었습니다.”

“네? 적룡방주가요?!”

당소가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적룡방주가 죽었다니. 그 괴물 같은 놈이 말인가? 투신 곽용이 설치는 중경성에서 깡만큼은 안 밀리는 그놈이?

“설마······.”

“예. 맞습니다. 천룡검협이 죽였답니다.”

“······!”

“대낮에 당당히 쳐들어가 박살을 내버렸답니다.”

“아아.”

“강호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소림을 구하고, 매화일검과 종남풍검을 박살 낸 소문이 저도 과장된 거라 여겼지만, 천룡검협은 진짜입니다. 적룡방주를 죽였으니까요.”

당소는 이마를 짚었다.

“그 사람이 적룡방주를 죽이자마자 왜 갑자기 날······헉!”

당소는 얼마 전 적룡방주가 낙화루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음을 떠올리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철조응.”

“네, 루주님.”

“상대할 수 있어요?”

“차라리 칼을 물고 자결하겠습니다.”

“으음!”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당소는 고운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당소가 은퇴하기 전에도 낙화루에서 일하던 철조응이다.

신의 하나만큼은 믿을 만하고, 실력 하나도 좋은 무인이다.

그래서 단호하게 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당소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날 적룡방주가 만난 자리에 대해 캐물으러 온 거예요.”

“그 자리엔 루주님이 계셨습니까?”

철조응은 다소 걱정스런 기색이 묻어났으나, 그래도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진 않았다.

그 목소리에 적잖이 위안을 얻은 당소가 대답했다.

“아니요, 적룡방주가 그때 전각을 통째로 빌렸어요. 우리 얼마 전에 휴업한 날 있잖아요.”

“아, 그때였습니까.”

“네. 애기들 다 내보내고, 저까지 모처럼 얻은 휴일이었죠. 전각 하나 빌린 만큼 돈은 지급했으니까요.”

“하면 그 점을 강조하시지요. 소문대로의 천룡검협이라면 의로운 인물입니다. 솔직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면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철조응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도 칼밥 먹는 사람으로서 잘 안다. 강호인은 뜻대로 안 풀리면 칼부터 꺼내는 족속들이라고.

하나 가끔은 오히려 강호인들이 다루기 쉬울 때가 있다.

강호에서 얻은 명성을 천금과도 같이 여기는 족속들이다.

특히 정파의 인물이면 더욱.

천룡검협.

불가의 팔부신장에서 따온 천룡(天龍)이요, 검으로서 협객이다.

그런 자가 하류인생인 기루를 못살게 굴까. 하물며 실제로 들려온 풍문에 의하면 죄다 영웅적인 행보가 아니던가.

그래도 당소의 얼굴은 펴지지 못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애가 있어요.”

“네? 다 휴가 보낸 거 아닙니까?”

“얘기 나누는데 적적하다고, 가장 기예가 뛰어난 아이를 불러 현이나 곁에서 뜯으라고 했죠.”

“이런……. 설아입니까?”

“네. 설아가 들어갔어요.”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그 아이만 알겠군요.”

“네.”

당소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예 모르면 모를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천룡검협의 곁엔 개방과 하오문이 붙었단 소문이 자자합니다.”

“음!”

“곧 설아가 혼자 방에 들어갔다는 건 알게 될 겁니다. 끝까지 숨기실 요량입니까?”

당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아무도 안 들어갔으면 오히려 당당하게 나설 수 있지만, 이미 글렀다.

하지만 낙화루는 단순히 술만 파는 기루가 아니다.

애당초 하오문과 연계를 끊었다는 걸 내세우는 낙화루가 아닌가.

그런 곳에서 비밀리에 나눈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갔다고 알려지게 된다면, 낙화루의 장점을 잃게 된다.

그렇다고 낙화루를 후원해 주는 고위층에게 부탁할 것도 뭐한 게,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요. 괜히 얽혔다가 천룡검협이 뒤집어 버리면 어쩌겠는가.

당소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별 수 없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죠. 그 자가, 별호대로 대협이라 부를 만한 협객이라면 이해해 줄 거예요.”

당소의 선택은 정공법이었다.

* * *

“죄송하지만, 공자께서 원하는 정보를 저희는 내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

능허는 옆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천무백은 표정 변화 없이 당차게 말한 당소를 쳐다봤다.

그건 노려보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감정이 깃든 시선도 아니었다.

한데 그래서일까.

당소는 대차게 말했지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생각보다 너무 어린 외모에 당황도 했고, 살짝 얕보는 감정도 생겼지만, 과연 천룡검협이구나 싶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몸이 완전히 굳는 기분이었다.

천무백이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옆에 대동했던 철조응이 끼어들었다.

“검협,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날 적룡방주가 전각을 통째로 빌렸고 누굴 만났는지는 모릅니다. 여기 설아만 들어갔지만, 천 뒤에서 현만 줄창 뜯어 대서 얼굴도 못 봤답니다.”

당소가 덧붙였다.

“하니 우리 사정을 이해해 주세요. 공자님, 아니 대협.”

그 얼마나 절절한지 옆에서 한번 윽박지르려던 능허도 뻘쭘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도 연화루를 운영하는 만큼 사정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도 그렇지, 이 양반이 한번 마음먹은 건 다 엎어버려서라도 가지는데.’

적룡방과 연계성을 확인하자마자 대낮에 적룡방주를 때려죽였다.

원하는 정보를 다 얻지 못하자, 쉬지도 않고 낙화루로 곧장 찾아왔다.

과감하다 못해 저돌적이기까지 했다.

하니 천무백이 여기서 순순히 물러설 리가…….

“이해하오.”

“엉?”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만드는 목소리였고, 입가에 살짝 맺힌 미소 역시 보기 좋았다.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화톳불이라도 킨 듯이 온화해졌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당소와 철조응은 예상외의 상황에 놀랐지만, 이내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다.

천무백의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미미한 외기가 어느새 방안의 감정을 쥐락펴락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원하는 걸 갖고자 남을 핍박해서는 안 될 일이니까요.”

“과연…….”

“대협……!”

당소와 철조응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옆에 있던 능허는 그저 입을 쩍 벌렸다.

‘이 미친놈. 임홍을 두들겨 패서 장보도를 반냥에 강매한 새끼가 누군데?’

천무백은 능허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협.”

“아닙니다. 아, 다만…… 그거 오현비파(五絃琵琶)인가요?”

“네? 넷.”

갑작스레 지목받은 설아가 화들짝 놀라며 한쪽에 놓인 비파를 잡았다.

그날 현을 뜯었다고 이 자리까지 대동해왔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겁에 질린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천무백이 갑자기 지목하니 놀라다 못해 얼굴이 붉어졌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미소였다.

“하면, 제가 한번 연주해 봐도 될까요?”

“네?”

“악기를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왕 낙화루에 왔으니 서로 음악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자연스레 비파를 받았다.

설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비파를 건넸다가 이내 놀랐다.

비파가 쉽게 다루는 악기가 아니다. 한데 천무백이 비파를 잡고 자세를 취했는데, 그 자세가 범상치 않았다.

옆에 있던 당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퇴하기 전에 낙화루에서 가장 악기를 잘 다루기로 유명했던 기녀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만큼 천무백은 자연스러웠다.

그의 긴 손가락이 춤을 추듯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현을 뜯는 순간.

찡-.

방안의 모든 이가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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