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91화 (91/318)

<검신재생 91화>

91. 자기반성

스스스슷!

적룡방주의 검에서 검풍(劍風)이 일었다.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검풍은 검기와는 다른 종류다. 상대를 끝장내는 필살의 기술이 아니다. 상대가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적극적인 방어기술이다.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면 몸에 자잘하게 피해가 누적된다.

‘싸울 줄 아는군.’

그저 내공만 가득하고, 좋은 무공만 가진 겉만 번지르르한 놈이 아니다.

어떻게 싸울지 아는 놈이다.

천무백의 검이 미끄러지듯 부딪쳤다.

검을 통해지는 내력의 수준.

‘혈사문주 놈보단 적다.’

당연한 일이다.

혈사문주 도문탁은 흡정마공으로 어마어마한 내공을 갈취했었다. 그는 내공의 총량만 놓고 보면 강호를 통틀어서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적룡방주는 확실히 그보단 부족했다.

그러나 그것이 적룡방주가 약하단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적은 내공으로 이만한 기세를 내뿜는다는 건 내공을 잘 갈무리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

‘그렇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총량은 약점이 된다.’

적의 약점을 물고 늘어뜨리는 것.

그것이 싸움의 기본이었다.

천무백은 적룡방주의 공격을 한차례 퉁겨 내고 곧장 공세를 취했다.

깔끔한 베기가 하단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가소로운!”

적룡방주가 코웃음 치며 가볍게 막아냈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됐다.’

상대가 수비를 취했다.

‘이젠 내 시간이다.’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설령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동작과 동작 사이에는 찰나의 끊어짐이 있다.

천무백은 그것을 노리며 검을 찔렀다.

적룡방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설마?’

천무백의 검이 매섭게 적룡방주의 허리를 찔렀다. 비틀어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벅지를 베었다. 간신히 막았다.

‘면면부절?’

면면부절(綿綿不絕).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매끄러운 공격의 흐름.

‘끊김이 없다!’

허리를 막으면 허벅지, 허벅지를 막으면 옆구리, 옆구리를 비틀면 어깨.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끊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강대한 내가고수는 아니다. 날카로운 초식과 임기응변으로 상대하는 유형인가?’

적룡방주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매섭고 날카롭지만, 검에 담겨 있는 내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흑도인으로 내공의 약점이 있는 적룡방주에게는 그리 무서운 유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대체 뭐지?’

적룡방주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막기 버겁다.’

숨이 턱턱 막혔다.

천무백의 연속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빨라졌다. 막고, 피해내는 게 점점 버거울 정도로 강렬했다. 그러다 보니 적룡방주는 답지 않게 내공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러지 않다면 막기 어려웠다. 피하기 힘들었다. 오로지 내공을 써야만 막고, 피하기가 가능했다.

발목을 노리던 검이 갑자기 손목을 찔렀고, 손목을 노리던 검이 목젖을 찔렀다. 목젖을 찌르는가 싶으면 허리춤을 베었다.

‘쾌검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공격에 적룡방주는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공격, 내공을 쓰지 않고서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위력과 속도. 이 자식……!’

적룡방주는 천무백의 눈을 봤다.

무심한 듯 당연한 눈빛.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내공을 강제로 소모하게 하고 있다!’

적룡방주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천무백은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이 바짝 따라붙었다.

까가가강!

천무백의 검이 춤을 추듯 뒷걸음질 치는 적룡방주를 쫓았다.

뒤로 빠진 다음 공세로 전환하려던 적룡방주는 급급하게 수세에 몰렸다. 어쩔 수 없이 내공을 사용해 피하고, 막았다.

‘내 약점을 파악하고, 어떻게 싸울지 바로 대응 방법을 쏟아낸다고?’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분명 처음 일합을 나눌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적룡방주 정도의 위치라면 강호의 정세에 민감하다.

그는 천룡검협이 어떻게 유명해졌고,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대충이나마 소식을 접했다.

‘화려한 무공과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검무에 가까운 검.’

하지만 지금의 천무백은?

쩌저저저저정!

‘오로지 내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지독함.’

적룡방주의 얼굴에 점점 당혹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천무백의 공격은 그야말로 호쾌했다.

‘상대를 분석하고, 그걸 맞게 검을 변형하는 것. 어쩌면 천둔검법을 쓰는 데 가장 좋은 순간이구나.’

천무백의 눈이 끊임없이 상대를 훑었다.

천무백의 천둔검법은 초식을 탈피했다. 가장 본연의 의미를 담은 검이 바로 천둔검법이다. 좋게 말하면 이렇지만, 나쁘게 말하면 초식이 없다.

하지만 검에 담긴 위력과 현기는 어떤 식으로 쓰느냐에 따라 더 강력해지고 배가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천무백은 내공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했다.

‘상대가 강력한 내가고수면 단숨에 몰아치고, 상대의 내력을 역이용해 무너뜨린다. 하지만 이놈처럼 내공을 적절하게 갈무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놈에겐 내공 자체를 강제로 소모시킨다.’

지금 천무백의 시야는 깊어졌고 넓어졌다.

‘단순히 강력한 무공을 쓴다고 해도 상대를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는 살(殺).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천무백은 이 순간 처음 검을 잡을 때의 시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도 늙었었구나.’

천무백은 불현 듯 그런 감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던가.

한 일곱 번째 삶 이후부터였던가. 모든 강호인들이 응당 그렇듯 천무백은 더 강력한 무공, 더 많은 내공, 더 좋은 영약을 탐했다.

그것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게 뭐가 문제겠는가. 강호인이라면 당연한 일을.

하나 천무백은 그런 생각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전생을 거쳐 어느덧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던 게 문제였다.

‘나는 효율적이었는가?’

지금 천무백은 거의 내공을 쓰지 않고 있다. 아주 최선의 일부를 가지고 상대의 호흡을 읽고, 퇴로를 예상하고, 검로를 미리 읽어 몰아붙인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더 빠르게 움직여 상대가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카가가가강!

천무백은 적룡방주를 밀어붙이면서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회상과 반성.

‘나도 별 다를 바 없었군.’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매달린다.

혈사문주를 상대할 때도, 비무전에서 전현과 국보를 상대할 때도.

천무백은 분명 무공이나 내공적인 측면에서 진일보했다.

그러나 과연 효율적이었는지를 묻는다면, 답하건데, 아니었다.

‘쓸데없는 데 내공을 소모했었군.’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깨달음은 아니었다.

다만 통렬한 자기반성쯤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명백했다.

천무백은 창천검신(蒼天劒神)이었다. 그쯤 되는 경지에 오른 이가 스스로 반성하고, 그걸 검에 다시 담는다면야.

쐐애애애앵!

적룡방주가 한걸음 물러선 뒤, 공력을 있는 힘껏 밀어 넣은 검을 쭉 찔러왔다.

순식간에 내공이 소모된 그에게 거의 일격필살의 의지가 담긴 공격이었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내공이란 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쓰는 것. 전투의 흐름을 읽어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바로 지금, 천무백의 상단전이 활짝 열렸다. 백회혈을 타고 전신으로 압도적인 공력이 뻗어나간다.

쿠구구구구구!

번쩍! 하고 천무백의 눈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진다.

천무백이 검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쳤다.

새하얀 검기가 소용돌이치듯 천무백의 검을 둘러쌌다.

꽈지지징!

지금껏 아껴 놨던 내공이 일제히 쏠리면서 적룡방주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그 여파는 어마어마해서 적룡방주는 끈 떨어진 연처럼 공중에서 몇 번 돌면서 저 멀리 바닥에 처박혔다.

꿈틀거리며 입안에서 새빨간 핏물을 한줌 왈칵 쏟아냈다.

“…….”

좌중이 침묵하는 사이, 천무백은 그에게 다가가 명치 위에 발을 척 올렸다.

금세 죽을 것 같은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살, 살려 주시오.”

아주 모기만 한 작은 목소리.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쥐어짜 그는 목숨을 구걸했다.

이것이 흑도였다.

만일 마도였으면, 여기서 담담히 죽음을 택했으리라.

그것이 강호인이니까.

흑도는 강호인이기 전에 흑도였다. 천무백은 그랬기 때문에 기꺼웠다.

살고자하는 욕망을 가진 놈이라면, 그걸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얼마 전 낙화루에 방문했었지?”

순간 적룡방주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두려움?’

글쎄.

이건 의왼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해야 하는 눈빛이어야 하는데. 두려워한다고?

천무백은 내친김에 궁금했던 바를 바로 물었다.

“거기서 누굴 만났지? 이번 중경성의 혈사를 일으킨 흉수들이 맞나?”

“…….”

적룡방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생기 잃은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대답해야…… 살려 주는가?”

“그래.”

“그러면…… 내 인생은 여기까지군.”

적룡방주는 그리 말하고 혀를 깨물었다.

천무백이 미간을 좁혔다.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가는 얼굴. 자결이었다.

‘자결을 택해?’

그때 적룡방주가 끊어지는 숨소리 사이로 가늘게 내뱉었다.

“피로 젖은…… 계곡의 귀신들이…… 널 노릴 거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됐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걸로 겁 안 먹어, 짜식아.”

* * *

“이런 개시발!”

부방주 진량은 적룡방주가 죽을 때 오히려 쾌재를 내질렀다.

남은 수하들을 잘 다독인 뒤 방주 자리에 취임할 생각으로 기뻤으니까.

실제로 천무백은 적룡방주를 처리하고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났다.

하지만 직후 칼 찬 무사들이 들이 닥쳤다.

“이 개자식들이!”

근방의 백도문파들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연합한 채 의기양양하게 들이닥치는 꼴이라니.

평소의 적룡방이었다면 그들의 도전을 오히려 가볍게 물리쳤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사기였다.

적룡방주가 죽어 버렸다. 그걸 모든 수하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사기가 곤두박질 친 상황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상황은 끔찍한데 저 멀리 무사들 사이로 솟구친 깃발을 보고 진량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곽천후가 여기 있었는데, 이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비검문의 깃발.

그리고 그 아래로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흉흉한 노인네가 있는 힘껏 달려오고 있었다.

투신, 곽용이었다.

* * *

“거하게 사고 쳤더구나.”

곽용은 눈앞의 곽천후를 바라봤다.

“내가 친 거 아닙니다.”

곽천후는 짐짓 고개를 치켜들고 대답했다.

곽용이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온몸에 피칠을 하고도,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이번 혈사에 조력을 구하고자 섬서로 떠날 때는 아직 애송이 티가 났건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강호는 넓다더니. 뭔가 느낀 게 있나보구나.’

곽용은 그게 내심 마음에 들었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네놈 이름으로 근방 백도 문파를 규합했다면서?”

“나랑 같이 온 미친놈이 그랬죠.”

그 말에 곽용은 한쪽에 죽어 버린 적룡방주의 시신을 바라봤다.

만만치 않은 놈이다. 물론 곽용은 이놈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시신의 꼴을 보니 어떤 식의 전투였는지 상상이 됐다.

‘수도 못 쓰고 당했군.’

이만한 고수가 말이다. 그것도 싸우는 방법은 제대로 아는 고수가.

소식을 접했던 곽용이 곽천후에게 물었다.

“천룡검협과 같이 왔다지? 어떤 놈이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곽천후가 대답했다.

“미친 새끼입니다.”

“…….”

곽용이 일순 당황했다. 그는 헛기침하곤 고개를 돌렸다.

만나보고 싶었다.

작금의 강호를 진동케 하는 그 이름을 보고 싶었다.

그 파천황적인 행보에서 과거 평생을 우러러 봤던 우상이 떠올랐으니까.

“그래, 어디 갔느냐.”

“천무백 말입니까?”

“이만한 사고를 쳤으면, 강호 선배로서 면식이나 한번 봐야지.”

“곧장 데리고 다니는 수하랑 낙화루에 갔습니다.”

곽용이 멈칫했다.

“낙…… 화루?”

“네.”

“그거…… 기루 아니냐?”

“네.”

담백한 대답.

곽용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미친 새끼가 맞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