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0화>
90. 우두머리는 가장 앞에 서야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장원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천무백은 이 침묵을 즐겼다.
모두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겁에 질린 얼굴, 두려움이 깃든 눈빛, 그들 사이로 걸어가는 지금.
그의 칼이 거침없이 피를 탐하고, 머금을 때.
천무백은 생각했다.
‘날이 잘 들었군.’
칼날이 녹슬지 않음을 느낀다. 칼은 응당 이래야 한다. 검은 당연히 날카로워야 한다. 언제든 적을 벨 때 살벌한 예기를 갖춰야 한다.
천무백은 쓰러진 시체 위로 서며 말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분명한 어조였다.
“나는 천무백이다.”
“…….”
조금 전까지 저들에게 천무백이란 이름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머리가 휑하니 사라진 그 이름 모를 노인이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천무백이란 이름.
지금은 아니다.
천무백이 오연하게 선언하는 순간, 저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 한없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못 여성들이라면 얼굴을 붉힐법한 미소였고, 사내들이어도 감탄을 할 미소였다.
하나 지금 이곳의 흑도들에겐 저 미소는 그저 가슴이 서늘했다.
적에게 자비란 필요 없다. 적에게 필요한 건 지독한 공포다. 숨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독함이다.
지금, 천무백이란 세 글자가 저들에게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네놈들 대가리 나오라 해.”
“……!”
“아니면 다 뒈져.”
천무백의 어조는 평이했다. 특별히 감정이 깃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한을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사실 흑도란 게 한 놈, 두 놈, 세 놈이 칼 맞고 쓰러져도 독하게 이를 악물고 덤벼온다. 한 놈이 발을 잡고 늘어지고, 다른 한 놈은 팔을 잡고 늘어지고.
그렇게 몸을 던져 싸우는 게 잘 조직된 흑도다.
이 정도의 규모의 적룡방이라면 그런 놈들이 수두룩할 게 분명하다.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봤다.
천무백의 시선이 닿은 이들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거나 고개를 분분히 돌렸다.
고요한 정적.
간부들도 눈을 부릅뜨며 병장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지독함과 잔인함.
그리고 잔혹함을 저들에게 안겨 준다.
하면 저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덤벼들까?’
전혀.
흑도란 놈들은 똥 밭을 굴려도 이승이 낫다는 격언을 가슴 깊이 새기는 놈들이다.
아무리 독종이라도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해야 한다.
잔인하고, 또 잔혹한 모습을 보여 줬다.
독기를 잃은 흑도는 급격하게 약해지고 쪼그라든다. 그런 후 가장 강한 자가 대신 상대해 주리라 기대하고, 바란다.
적룡방에 있어 그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적룡방에서 가장 강한 무인.
바로 적룡방주다.
천무백의 의도가 그랬다.
적룡방주를 이 자리에 세우는 것.
그리고 그와 일대일 대결을 펼쳐 단숨에 끝장내 버리는 것.
그러나 그때 등장한 건 적룡방주가 아니었다.
부방주, 진량이었다.
코밑으로 입만 가린 복면을 대충 걸친 채 모습을 드러낸 그는 참상을 보고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천무백이라고? 설마 천룡검협 천무백이냐?”
“맞다.”
주위가 웅성거렸다.
천무백이란 이름은 몰라도 근래 강호를 진동하는 천룡검협이란 별호를 모르는 자는 없었으니까.
“네가 적룡방주냐.”
“부방주 적흑도(狄黑刀) 진량이다.”
“생긴 게 중원인이 아닌 것 같더니.”
천무백이 픽 웃었다. 진량은 광대뼈가 툭 불거진 게 중원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별호에 적(狄:오랑캐)이 들어간 걸 보니 새외 출신이었다.
“무슨 목적이냐. 천룡검협과 적룡방 사이 은원은 없는 거로 아는데?”
“어제 생겼다.”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진량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은원이 생겼다고? 무슨 억지를 부리느냐!”
“성화문, 채가령.”
“……!”
순간 진량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덕종이 이놈, 연락이 없구나!’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천룡검협이 성화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아니다.
그랬으면 진즉 나타났을 거다. 그러니까 성화문을 그 정체 모를 이상한 새끼들이 멸문시켰을 때 말이다. 성화문이 무너진지 한달 가까이 됐는데 이제 나타났다고? 그것도 적룡방을 찾는다고?
이상한 게 한 둘이 아니다.
‘하면…… 아뿔싸. 채가령이, 고년이구나!’
진량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그 천룡겁협이 채가령이의…….
“혹시 채 소저의 낭군이신가?”
“…….”
천무백의 얼굴이 순간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낭군은 무슨.
친구의 증손녀인데.
하나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천무백이 침묵하고 그저 표정만 일그러뜨린 걸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진량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복수하러 온 거 같은데.’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는 부방주 자리에 있는 만큼 정보에도 밝았다. 천룡검협이 화산, 종남과 삼파전으로 한번 거하게 붙었다는 사실도 들었다.
심지어 매화일검과 종남풍검을 동시에 쓰러뜨렸다는 믿기 힘든 소식까지도.
그 소식의 절반만이 진실이라고 해도, 부방주 입장에서 천무백을 상대하는 건 쉬이 할 짓이 아니다.
질 것 같다고?
진량은 솔직히 말해 잘 몰랐다. 강호의 소문은 대부분이 과장된 게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다. 천무백이 강한 건 분명하다. 지금 적룡방 앞에서 당당하게 내뿜는 기세가 그걸 증명한다.
진량은 순간 한발 물러섰다.
아까 오면서 들었던 외침.
‘대가리 나오라고 했다 이거지?’
그래. 이거다.
저놈, 방주가 시킨 짓으로 오해한 거야.
진량은 슥 웃었다. 흑도답게 잔머리는 기가 막히게 굴리는 사람이 바로 진량이다.
“그건 적룡방주의 명이었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어차피 그 양반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방주가 천무백과 싸운다. 방주가 이긴다? 이긴다 해도 치명상을 입으리라. 그러면 다음 서열인 자신이 자연스럽게 적룡방을 차지한다.
‘흠.’
하나 그 생각을 천무백이 못 읽을 리가 없다.
채가령과 객잔에서 적룡방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나눌 때 들었다.
하오문과 개방의 보고서에도 적힌 내용이다.
방주와 부방주의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다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천무백이 진량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어울려 주는 게 좋겠군.’
진량이 천무백을 이용한다면, 천무백도 진량을 이용한다.
진량을 족치는 거? 그거야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지금 더 중요한 건 바로 방주와 대면이다.
천무백은 진량의 뜻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네놈들 대가리 나오라고. 아니면 다 뒈진다.”
천무백의 목적과 의도는 적룡방주와의 일대일 대면.
그리고 진량의 목적 역시 적룡방주를 대신 내세워 자신은 몸을 빼는 것.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던가.
천무백과 의도가 일치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진량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방주님 모셔와.”
진량은 내심 목소리를 깔고 제 수하한테 명령했다. 지금껏 잠잠했던 적룡방주도, 부방주가 심각한 얼굴로 찾는다는데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리라.
폐관에 든 적룡방주를 불러낼 수 있는 이는 여기서 오직 부방주, 진량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들은 적룡방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처구니가 없군…….”
낮게 깔린 목소리. 흡사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처럼 위세가 담긴 어조였다. 천무백은 씩 웃었다.
겉에서 느껴지는 기세.
‘강하군.’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감탄했다.
‘이게 흑도라고?’
무슨 흑도 새끼가 이리 강해.
영약을 밥처럼 처먹지 않고서야.
천무백은 곰곰이 떠올렸다.
‘전현이, 국보 두 놈보단 강하고. 혈사문주? 그쯤 되려나.’
겉으로 느껴지는 기세와 분위기는 그렇다.
물론 진짜 실력은 붙어봐야 한다. 또 무공마다 서로의 상성이 있으니, 절대적인 무력 수치는 없다. 하지만 적룡방주가 강하다는 건 확실했다.
“집단의 우두머리란 건 말이다.”
쾅!
천무백이 전각을 밟았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흑도들은 눈만 크게 뜨고 데구루루 굴렸다.
“수하들의 머리 위에서 지시하는 병신이 아니라, 가장 앞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게 우두머리다.”
천무백의 말에 적룡방주뿐 아니라 대치하던 흑도들의 얼굴도 묘하게 변했다.
적룡방주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룡검협이란 허명을 얻고 위세가 아주 등등하구나!”
적룡방주가 거친 기세를 마구 내뿜으며 걸어나왔다.
“오냐. 내가 이기면 네놈은 회를 떠서 내 수하들하고 술안주로 쓰겠다. 네놈 뒤에 있는 병신 같은 머저리 두 명까지도.”
“좋아. 능허야, 문 막아라.”
“네.”
“저 새끼 처맞다가 도망칠지 모르니까 문 막고, 천후야. 중간에 끼어드는 새끼 족쳐버려. 꼴에 우두머리라고 위험하면 구하고자 몸 던지는 병신 하나쯤은 있다.”
“……천후?”
“비검문의 투귀!”
“곽천후다!”
역시 곽천후야. 성능 확실하구만.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주위에 파문처럼 퍼져가는 분위기를 읽었다.
적룡방주와 싸우다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충신들 몇 놈이 끼어들 게 자명하다.
그러다 보면 천무백은 어느새 적룡방 전체를 상대할 수밖에 없다. 기껏 분위기를 다 몰아놨는데 말이다. 그 사이 적룡방주는 도망칠지도 모른다. 흑도가 싸움 중에 도망치는 걸 두려워하랴.
하나 천무백의 뒤에 있던 놈이 곽천후란게 밝혀졌으니, 저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다.
무려 투귀 곽천후가 아닌가.
강호에서 괜히 명성과 별호가 있는 게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거든.
분위기는 완벽하게 조성됐다.
천무백은 계획이 착착 이뤄지는 걸 느끼며 검을 겨눴다.
적룡방주는 소태라도 씹은 얼굴로 검을 잡았다.
천무백의 검보다 한치 반은 짧은 중검이었다. 천무백이 자비를 베푼다는 듯 툭 뱉었다.
“자. 선공은 양보하지.”
“이 건방진 새끼가!”
“싫어? 후회하지는 말라고.”
천무백이 픽 웃으며 바닥에 널부러진 검을 툭 차올렸다. 천무백에게 죽은 그 간부의 칼이었다. 발끝으로 칼을 차올린 뒤 천무백은 손을 뻗어 후려치듯 휘둘렀다.
이미 운공하고 있던 공력이 손끝을 타고 검신에 밀려들어갔다.
검이 순식간에 파공성을 내며 정면으로 벼락처럼 날아갔다.
쐐애애액!그 기세가 얼마나 가공한지, 적룡방주는 화들짝 놀라 품에 넣었던 손으로 급히 후려치며 막았다.
촤르르륵!
바닥에 수백 조각으로 나뉜 철편이 와르르 쏟아졌다.
암기였다.
떨어진 암기들을 보고 적룡방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중검 잡은 꼬라지 보니까 암기부터 던지고 싸우는 유형인 게 다 보이더라고.”
근육의 움직임, 이상하게 벌려진 양다리의 보폭, 검을 잡은 어깨선의 움직임.
표정과 눈빛.
그 모든 것을 종합해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
천무백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나 그걸 받아들이는 건 어떤 상대가 와도 똑같은 심정이리라.
‘천룡검협…… 허명이 아니구나!’
적룡방주는 이를 악물었다.
천무백은 그런 적룡방주를 보며 씩 웃었다.
천무백의 검이 살짝 진동했다.
‘강자와의 싸움은 늘 사람을 발전시키는 법이지.’
다른 목적으로 왔지만, 적룡방주의 기세를 읽으니 묘한 흥분이 떠올랐다.
화산에서의 비무전을 통해 천무백은 스스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나아간 바를 몸으로 체득해야 오롯이 본인의 것이 된다.
눈앞의 상대.
저 정도면.
“모든 힘 쥐어짜 싸우라고.”
싸울 맛 난다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