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9화>
89. 지독하게, 잔인하게, 잔혹하게
곽천후는 소식을 듣고 황망한 얼굴이었다.
“내 이름으로 백도문파를 끌어들였다고?”
“네 이름이 여기서 먹히잖아?”
“미친 새끼.”
이거 진짜 미친 새끼다.
곽천후의 이름을 판다는 거. 그게 뭐겠는가.
비검문의 이름이다. 중경의 사람들에게 비검문은 곧 곽용과 곽천후 두 이름과 일맥상통했다.
그러니까 근방 백도 문파에게 곽천후의 이름을 팔고 적룡방을 치겠다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어차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면서?”
“그래도 그렇지. 적룡방과 전면전을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어.”
“어차피 무사들은 보조일 뿐이야.”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떻게 움직일지도 이미 머릿속으로 그려놨다.
하나 강호란 게, 그리고 싸움이 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천무백도 현장에서 직접 일단 부딪쳐 볼 생각이다. 도중에 적룡방주를 놓치거나, 또는 일이 복잡하게 흐르면 이쪽에도 사람이 더 필요하다.
자칫 전면적으로 격화될 수도 있으니까.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하나 천무백은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내가 끝낼 거니까. 너도 도와.”
“허…….”
“아버지한테 어깨 으쓱일 만한 업적 하나는 갖고 가야지.”
“이 무슨, 적룡방이 어디 동네 흑도 건달인 줄 알아? 이렇게 급하게 친다고?”
“대놓고 준비하고 치면, 그게 기습이냐?”
천무백이 태연하게 말하자 곽천후는 혼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별수 있겠는가.
이미 천무백은 결정을 내렸고, 일은 돌아갔다. 채가령은 자신이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지 호위무사를 데리고 근방 백도문파에 빠르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물쩍거려도, 이미 일은 시작됐다.
“계획은?”
곽천후가 정색하며 물었다.
천무백은 씩 웃었다.
“적룡방주와 일대일로 대가리를 깐다.”
“뭐?”
“나라고 아수라나 야차가 아니다. 수백 명은 족히 넘은 적룡방 애들을 어떻게 다 처리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면서.”
뒤에서 능허가 작게 중얼거렸다.
맞다.
그렇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만 목적이 다르지 않은가.
적룡방의 완전한 절멸? 그거야 비검문이나 근방 백도의 목표이자 바람이지. 천무백과는 상관없다.
천무백은 정의심에 투철하여 마음속에 협의가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적룡방을 치는 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혈귀곡과 연관성이 뚜렷한 점.
그리고 친우의 후손인 성화문을 핍박한 점.
딱 그것뿐이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적룡방을 다 죽일 필요가 있나?
엄청 번거로운 일이다. 하니 천무백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대가리만 까면 다 술술 불게 되어 있어.”
“그 대가리만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다고? 뭐 은신이라도 해서 잠입 후 암살하려는 속셈이냐?”
“그것도 못 할 건 없는데…….”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시간이 다소 걸린다. 위치를 파악하고 여러 환경을 알아야 했으니까.
시간이 걸리는 건 질색이다. 천무백은 단박에 몰아쳐서 끝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니까.
“잘 들어. 네 말대로 방주 놈 대가리를 일대일로 까는 건 어렵지. 가자마자 우르르 몰려들어서 이 새끼 죽여 버려! 하고 칼질할 테니까. 여기선 내 방식대로 한다.”
“그게 뭔데?”
곽천후가 물었다.
그간 비검문은 적룡방과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전면전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면 이긴다는 자신은 있었지만 피해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한데 천무백은 계획이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지독하게, 잔인하게, 잔혹하게.”
“……?”
“지옥을 보여 준다.”
왜일까.
곽천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저 착해 보이는 청량한 미소가, 왠지 모르게 두렵게 느껴졌다.
* * *
적룡방은 상가들이 밀집된 곳에 있지 않았다.
언덕 하나위에 무슨 황족들의 별장처럼 커다란 장원이 불쑥 올라가 있었다.
“거 기분 나쁘네.”
“왜요?”
“흑도 새끼들이 쓸데없이 좋은 데 살아서.”
“흑도는 비싼 데 살고 비싼 거 먹으면 안 됩니까?”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남의 돈 갈취해서 저 지랄 하는 꼴이잖냐.”
“으흠. 그렇긴 하죠.”
천무백은 괜히 심성이 뒤틀렸다. 그만큼 적룡방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얼핏 보기에는 쇠락한 소림보다 훨씬 더 크고 휘황찬란했다.
언덕 위에 궁성을 지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대문과 흡사 성을 보는 듯 높은 담장.
천무백은 능허와 곽천후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둘 다 일단 내가 하는 거 그냥 지켜봐. 천후 너는 얼굴 가리고.”
“……?”
“네 얼굴쯤이면 적룡방에서 다 알잖아?”
“알겠다.”
곽천후는 순순히 따랐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곽천후도 결심했다. 적룡방을 무너뜨리겠노라고.
하면 그토록 까다로운 아버지 앞에서 어깨를 펴고 당당할 수 있으리라.
천무백은 거침없이 걸어가 문지기를 쳐다보곤 소리쳤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귀검사랑이시다.”
“……?”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천무백을 쳐다봤다.
“태룡방의 귀검사랑을 말하는 게냐?”
“그래.”
“귀검사랑 뒈진 지가 언젠데.”
“스승님이시다.”
문지기가 멈칫했다.
하나 천무백은 한없이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쯤 되자 문지기도 ‘혹시?’ 하는 마음이 생겼다.
태룡방의 자세한 사정 같은 걸 일개 문지기가 알 리가 없으니까.
문지기는 이런 일을 몇 번 겪은 적이 있다.
흑도란 것들은 아주 다들 심성이 뒤틀려 제멋대로다. 자기 혼자 판단해서 내쫓거나 안에 들이는 일을 해선 안 된다.
“기다려라. 상부에 보고하겠다.”
“됐다. 내가 보고할게.”
“뭐?”
천무백이 곧장 검을 뽑았다.
문지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급히 검을 뽑으려는 순간, 천무백의 검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새하얀 광채가 흩뿌려지더니, 강철 대문이 쩍하고 쪼개졌다.
쿠구구궁!
“이, 미, 미친!”
문지기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 주춤 물러서다 이내 꽁무니 빠지라 도망갔다.
세상에.
강철대문을 검으로 자르는 미친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문지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님을 느꼈다.
천무백이 대문을 쪼개고 들어가자 어슬렁거리던 흑도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내 한손에 검을 든 모습을 보고 모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다가왔다.
그냥 다가온 것도 아니다.
“살다 살다 말미잘 같은 새끼란 소린 처음 들어보네.”
무슨 중원 제일 욕쟁이 자랑이라도 하나.
온갖 험악한 욕을 내뱉으며 달려오는 꼴이 영락없는 흑도다.
배알이 뒤틀린 천무백이 툭 말했다.
“능허야.”
“네.”
“지금 욕하는 새끼들 얼굴 다 기억해 놔.”
“뭘 기억합니까. 어차피 그전에 다 죽일 거면서.”
“아니, 죽이긴 죽이는데 더 잔인하게 죽여야지. 하초를 끊어 버린다거나.”
능허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흘깃 옆을 보니 곽천후의 얼굴도 창백했다. 흠칫하며 천무백으로부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능허가 곽천후에게 물었다.
“야. 너 조금 전에 미친 새끼라고 욕했지?”
“내, 내가 언제 그랬나.”
“조심해. 너 수위 아슬아슬해.”
“크흠.”
둘의 대화를 한쪽 귀로 흘리며 천무백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널찍한 외원(外苑). 그리고 안쪽에 또 내성처럼 담당이 높이 서 있었다.
완전히 그냥 하나의 성이었다.
‘이러니까 비검문이 함부로 도모할 생각을 못 하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정마대전 이후 흑도가 성장했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태룡방의 동생격이 이 정도인데, 흑도의 큰형님인 태룡방은 어쩌겠는가.
천무백은 괜히 고약한 심성을 부리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소림보다 더한 성세를 자랑하는 꼴이 퍽 마음에 안 들었다.
천무백은 칼을 꽉 쥐었다.
순간 일변한 기세에 달려오던 흑도들이 주춤 멈춰 섰다.
천무백의 냉막한 표정. 주위로 풍겨 나오는 위험한 기세.
그리고 묵묵히 걸어와 검을 바닥에 툭 꽂아 내려다보는 오연한 자세.
“…….”
그건 존재감이었다.
단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넓은 외원을 장악해버리는 분위기와 기세.
천무백이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다.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고 거칠게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천무백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못해 주위를 압도했다.
실컷 욕하며 달려오던 흑도들은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멈춰 섰다.
눈치라면 강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바로 흑도 하류 인생들이다.
당장이라도 요절을 낼 것처럼 달려들던 놈들은 둥글게 원을 형성한 채 침묵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지기의 소식이 전해졌는지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귀검사랑이 스승이라고?”
천무백은 속으로 감탄했다.
능허가 한 스무 살 더 먹으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였다.
그러니까.
‘진짜 흑도의 전형적인 얼굴이네.’
누가 봐도 저 늙은이는 흑도구나. 싶은 외모였다.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두 눈알은 움푹 팼고, 볼은 홀짝 들어갔지만 날카롭다 못해 깐깐한 인상.
슬쩍 뒤를 보니 능허도 감탄한 얼굴이었다. 저만한 흑도다운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니까.
천무백은 무심하게 말했다.
“맞다. 태룡방에서 왔다.”
“흘흘흘. 이 개새끼. 어디서 왈왈 짖어? 귀검사랑 형님은 뒈진 지 오래고, 제자도, 자식 놈도 없다. 자식 놈 하나 있었지만, 팔다리 다 뜯어먹히고 뒈졌지.”
역시.
흑심방과 달리 안 통하는군.
천무백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머릿속에 세운 계획 중의 하나였으니까.
귀검사랑을 사칭해 적룡방주와 일대일 대면은 물거품에 돌아갔다.
하면 곽천후에게 말했던 계획으로 선회한다.
“누구냐. 어디서 왔냐. 비검문이냐? 아니지. 비검문에서 이렇게 미친 짓을 할 놈은 없지.”
“천무백이다.”
“천무백? 여기 혹시 천무백이라는 얼굴 허연멀건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를 아는 사람 있나?”
노인네가 그리 말하자 흑도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싸움이다.
천무백의 존재감으로 기가 팍 죽어있던 흑도들이 순식간에 어깨를 폈다.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능허한테 말했다.
“야. 쟤 하는 짓 잘 배워 놔라. 너보다 훨씬 선배다.”
“마음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이왕 흑도로 살 거면, 저놈처럼 흑도의 전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천무백은 다시 한 발짝 걸어 나갔다.
“천무백아.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딴 짓거리를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내 가랑이 사이를 기면서 왈왈 짖으면 팔다리만 잘라서 쫓아내는 것으로 봐주마.”
노인이 조롱했다.
이게 그만의 기싸움이었고, 흑도의 방식이었다.
하면 천무백도 자신만의 기싸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흐흐흐. 어디서 괜찮은 무공 하나 배우고 공명심에 가득 차 흑도를 정벌하겠노라 온 것 같은…….”
퍼석!
“……?”
노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입 위로 통째로 날아간 탓이다. 흑도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누구도 비명 하나 내지 못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숨조차 쉬지 못하는 깊게 가라앉은 정적.
천무백의 쭉 뻗은 검을 거둬들였다.
검에서 튕겨 나간 검기가 노인이 반응하기도 전에 잘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천무백은 검을 거둬들이는 척, 다시 발출했다.
서걱!
바로 옆에 있던 놈의 머리통이 쩍 하고 쪼개졌다. 피보라가 몰아쳤다. 한명, 두명, 세명. 천무백이 날려보낸 검기는 단숨에 세명의 머리를 잘라냈다.
지독했다.
“끄악!”
옆에 있던 두 놈의 팔다리를 칼질 한방에 슥 잘랐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잔인했다.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 사이로 천무백이 귀신처럼 움직였다.
두려움에 물들어 급히 허우적거리며 물러서는 놈들의 등판에 칼침 한 방씩 들어갔다.
잔혹했다.
곽천후는 그제야 실감했다.
천무백이 한 말의 의미를.
‘지독하게, 잔인하게, 그리고 잔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