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8화>
88. 기습의 묘
개방의 정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적룡방주 폐관.
흑도가 무슨 폐관수련을 하겠냐고 하겠지만, 적룡방 정도의 규모면 다르다.
적룡방은 정마대전의 용사인 곽용의 비검문과 중경성을 나눈 세력이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적룡방은 천무백이 장악한 하남의 흑심방 보다도 큰 규모였다.
“흑도의 큰형님인 태룡방의 동생격이니까.”
곽천후의 목소리엔 적개심이 깃들었다.
“실제로도 태룡방주와 적룡방주가 호형호제한다는 소문이 있다.”
능허가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툭툭 쳤다.
“흠. 여기엔 적룡방주의 무력이 최소한 절정에서도 최상급이라고 유추하는데요?”
“흥. 그래 봤자 우리 아버지에겐 안 된다.”
곽천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나 흑도방파의 방주가 이만한 무력이라면 경시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웬만한 거대문파의 수장격이다. 특히 쇠약해 버린 소림의 나한각주인 무소선사가 절정에서도 최상(最上)정도에 머물렀음을 떠올리면 만만치 않다.
“이런 무위라면 폐관을 거듭해야지.”
폐관 수련 없이 오르긴 쉽지 않은 경지.
하나 다음 하오문의 정보에는 다소 이질적인 내용이 있었다.
-적룡방주 낙화루에서 연회.
“폐관에 든 놈이 기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하오문과 개방의 상반된 내용.
“뭐, 둘 중 하나가 틀린 거 아니겠습니까. 개방이고, 하오문이고, 애들 다 정확한 거 아닙니다.”
능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이 상당하다고 한들, 그게 완벽히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도 분명 틀린 정보를 내놓을 때가 수두룩했다.
정보를 산 무인들과 몇 번 크게 마찰을 일으킨 적도 간혹 있다.
하나 천무백은 두 집단의 정보가 모두 틀리지 않다고 여겼다.
“적룡방주가 폐관에 들었다는 건 확실한 정보가 맞다.”
“그럼 하오문이 틀린 겁니까?”
“아니.”
“뭔 소립니까.”
“개방이 적룡방주의 움직임을 놓친 거지.”
낙화루는 기루다.
그리고 하오문은 기루와 밀접하다.
“은밀한 움직임이었을 거야.”
개방은 아직도 적룡방주가 폐관수련에 들어간 걸로 알고 확신하고 있다.
“그럼 폐관에 든 게 맞는데도, 은밀하게 기루를 찾았다는 뜻인가?”
“그래. 적룡방주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개방이 눈치챘겠지.”
“개방도 눈치 못 채게 움직였다라······.”
“하오문은 기루를 통해 적룡방주가 움직인 걸 알았을 테고.”
“그렇다면, 적룡방주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은밀하게 폐관을 깨고 움직였다는 건데······.”
“여기 날짜.”
천무백이 손가락으로 해당 문구를 가리켰다.
연회를 벌인 날짜가 적혀 있었다. 곽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흉사가 벌어지기 이틀 전이군.”
“교묘하지?”
“음······.”
“그리고 여기.”
-낙성문, 육가별장, 추가장 등에 적룡방 흑도들 목격.
-해당 문파의 독문무공 실전(失傳)
-적룡방에서 강탈한 것으로 추정
-성화문과 섭진문은 혈사가 벌어질 당시 비급을 보관해놓은 전각과 창고가 화재로 소실. 적룡방이 접근 하지 않음.
“음······.”
곽천후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너무 빠르지 않나?”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적룡방이 빠르게 움직였다.
흑도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가.
“무공의 깊이가 없죠. 그냥 강호에 굴러먹는 무공들 잡다하게 익히는 건데.”
“비록 중소문파라지만,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문파의 독문무공이면 탐을 낼 만하지.”
“그렇긴 하다만······.”
곽천후가 말끝을 흐렸다.
“비검문에서도 이 같은 적룡방의 움직임 때문에 적룡방을 의심했었다. 실제로 아버지께선 이 기회에 적룡방을 없애버리겠다고 노구에 칼 차고 나섰고.”
“근데?”
“한데 흉수 중에 호선자가 있다는 게 밝혀진 거야. 정파의 명숙인 호선자가 흑도의 수족이 됐다? 이상하잖아. 그래서 곧장 나를 섬서로 보낸 거고.”
하긴 비검문 입장에서도 혼란스러우리라.
흑도의 짓인 줄 알았는데, 흉수가 정파의 명숙임이 밝혀졌으니까.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쪽부터 치고 가는 게 좋겠어.”
천무백은 그리 말하고 능허를 바라봤다.
“내가 두들겨 팬 놈 있지?”
“네.”
“대충 깨워서 더 뒈지게 패라.”
능허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뭐 알아내라는 게 아니고 패라고요?”
“흑도는 맞아야 답이 나오더라.”
“거, 듣는 사람도 흑도인 건 아시죠?”
“응. 너도 맞아야 말 듣잖냐.”
“거참. 알겠습니다. 뒈지게 팬 뒤에 안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란 뜻이죠?”
능허가 잘 됐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 * *
천무백은 곽천후를 개방에 보내 적룡방의 움직임을 주시하게끔 했다.
그리고 능허는 천무백의 명대로 덕종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덕종도 덕종이지만 흑도에서 개처럼 수십 년을 구른 능허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같은 흑도인 능허가 더 수월하게 덕종을 다루고 캐낼 수 있으리라.
천무백은 직후 객잔에 왔다.
성화문의 참사 때문인지 근방 객잔은 문은 닫은 상태였다.
그나마 운영하는 객잔이 하나 있었는데, 천무백이 식사를 주문하자 때마침 2층에서 채가령과 연소운이 내려왔다.
객잔 한 구석에 떡하니 앉아 있는 천무백을 보고 채가령이 흠칫 놀랐다.
“······.”
“안녕······ 하세요.”
천무백이 인사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하고 푹 쉬어서 그런지 채가령은 전날 만난 것처럼 피곤해 보이진 않았다.
채가령은 천무백의 눈치를 슥 보곤 연소운과 쭈뼛거리며 한쪽에 앉았다.
천무백이 불쑥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채가령이 연소운을 흠칫 쳐다보곤 천무백의 식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천무백은 점소이를 불러 식사를 더 시켰다.
“아, 감사합니다.”
천무백은 살짝 기가 죽은 얼굴의 채가령을 빤히 쳐다봤다.
“일단 식사부터 해. 어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잤을 텐데.”
“이 은혜는…….”
“됐고.”
천무백이 질색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은혜는 무슨.
“증조부를 본적은 있느냐?”
“네? 아니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
천무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완전히 닮은 건 아니지만 묘하게 축 쳐진 눈꼬리에 약간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라있는 입가는 기억 속에 있는 친우와 똑 닮았다.
때문일까.
천무백은 성화문이 무너지고, 흑도에게 욕을 보고 있던 채가령의 모습에서 약간의 죄책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고놈 말고도 문파를 세운 놈들이 한둘쯤 더 있던 것 같은데…….’
정마대전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이 대다수 죽어 나갔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무공이 고강한 친우도 있었고, 부족하나마 품은 뜻만큼은 대하와 같은 친우도 있었다. 물론 천무백이 그들 모두를 책임져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 봐 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들의 후손이 어떻게 지내는지, 부족함이 없는지…….
그것이 천무백이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전우애이자, 의리였다.
‘흠……그러면 말이지.’
천무백이 작금의 강호를 둘러보며 느낀 바가 있다.
정마대전은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정파의 승리로 끝났다.
하여 작금의 강호는 정마대전 당시의 희생자와 영웅들을 기리다 못해 성역화하는 경향이 짙었다.
적어도 정파인들에겐 말이다.
그들의 후손, 그들이 소속되었던 문파.
‘하나로 묶으면?’
천무백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지금은 멸문당한 성화문도 채가검이란 괜찮은 독문무공이 있다.
‘작금의 정파는 비교적 손색이 있단 말이지.’
40년전, 그 치열한 시절의 정파도 역대 백도 무림 중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여 마교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고.
지금은 그때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해 더 수준이 낮아진 상황이다.
‘적어도 정마대전에서 살아남고, 싸워온 그들이 남긴 유산을, 온전히 소유한 후손들의 힘을 한 곳에 모으면 말이지.’
하면 성화문처럼 예상치 못한 적에게 공격당할 확률도 낮아지고, 설령 공격당하더라도 보복할 수 있다.
천무백은 거기까지 생각을 그치지 않았다.
정마대전 이후 유명무실해진 무림맹이 분명 백도무림엔 있다.
하나 정마대전 용사들과 후손들로 이뤄진 문파 연합체가 생겨난다면?
그리고 천무백이 창천검신의 후인을 자처하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면?
천무백은 종남파를 떠올렸다.
소림면패를 보여 그들의 야욕을 잠시 넣어놨지만, 그런 놈들이 어디 종남만 있겠는가. 정사마를 막론하고 충분히 많다.
‘세력이라.’
이전 전생에서 천무백은 창천검신이었다.
이미 홀로 굳건히 서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해야지. 아직 그 정돈 아니잖아?’
더구나 천무백에겐 청성표국과 가족이라는 지켜야할 게 있다.
‘세력화라……좀 더 생각을 해야겠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추가로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적룡방이 언제고 성화문을 직접 노린 적이 있거나, 그런 낌새가 있었나?”
“……사업장 문제로 몇 번 부딪친 적은 있어요.”
“단순한 마찰과 분쟁 정도?”
“네.”
“그 이상으로 번진 적은 없고?”
잠시 천무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채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대적으로 싸운 적은 없어요.”
“적룡방의 규모 정도면 성화문을 꿀꺽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맞아요. 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아실지 모르지만, 아니, 아시겠네요. 제 증조부는 정마대전에서 활약하셨어요. 그리고 중경성은 비검문이 백도를 대표하고 있죠. 비검문의 문주인 투신께서 정마대전 때 증조부님을 형님으로 모셨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어렴풋이 두 녀석이 아옹다옹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물론 그렇다고 비검문주께서 성화문을 특별히 챙겨준 건 아니었어요. 다만 적룡방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죠.”
거기까지 대답한 채가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흉수가 적룡방인가요?”
“아직은 모른다. 습격당한 문파들에게 무슨 특이점이 있는가 조사 중이야.”
적룡방하고 분쟁과 마찰은 있으나, 비검문의 눈치를 보던 놈들이다.
적룡방 단독으로 저지른 짓은 아니다.
특별히 멸문시킬 정도로 악감정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점이 없다. 왜 하필 성화문을 멸문시켰는가. 그에 대한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흉수 놈을 직접 잡아서 족쳐야 한다는 건데.’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마 접점이 보이는 적룡방을 치는 일이 지름길이다.
때마침 덕종을 족친 능허가 객잔에 들어섰다.
“식사 중이셨소?”
“그놈에게 캐낸 거 있나?”
“방주를 찾아온 놈들이 있답니다.”
“자세한 신상은?”
“놈뿐만 아니라 부방주도 모른답니다. 방주를 따르는 세력하고 부방주를 따르는 세력이 따로 있나 봅니다. 제가 족친 놈은 부방주파고요.”
“그런가, 능허야.”
“네, 말씀하십쇼.”
“밥 먹어라.”
“얼씨구?”
능허가 이 인간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왜 답지 않게 자상하십니까.”
“싸우기 전에 잘 먹어야지.”
능허의 눈이 커졌다.
“적룡방하고요?”
“별수 있냐. 여기저기 캐도 답이 안 나오는데. 확실한 놈 족쳐야지.”
개방과 하오문을 통했다. 그리고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채가령에게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한데도 더 나아갈 수 없다.
답은 결국 적룡방주를 직접 잡아놔야 나온다. 하니 천무백은 곧장 결정을 내렸다.
천무백의 표정을 본 능허가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의 고기를 입속에 와구 넣었다.
“언제 갑니까?”
“너 밥 다 먹고, 곽천후 데리고.”
“천후도 데리고?”
곽천후도 데리고 간다. 이거 전면적이란 얘기다. 그냥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적룡방을 뒤집어 놓겠다는 것뜻이다.
능허는 잠깐 그런 사실을 객잔 식탁에 앉아 당연하듯이 얘기를 나눈단 사실에 묘한 감흥이 들었다.
‘능허야, 흑심방 말단 간부였던 놈이 이제 태룡방 동생을 공격하니 마니 하고 있구나. 나도 출세했어.’
능허는 헐헐 웃곤 천무백을 쳐다봤다.
“그럼 밥 먹고 천후 오는 대로 간다는 건데, 그리 급하게 칩니까? 준비도 없이?”
“준비가 뭐가 필요해.”
그러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채가령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적룡방에 원한을 가진 백도 문파는 근방에 많아요.”
“음?”
“하면 무사들을 지원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아는 어르신들이 좀 있어요.”
능허가 옳다꾸나 손뼉을 쳤다.
“그래요. 전력이 너무 밀립니다. 적룡방이 어디 뉘집 개 이름입니까.”
“그러면, 어 채 소저?”
“네!”
“일단 근방 백도문파에 사람을 좀 청해 줘. 음, 곽천후 이름 대면 될 거야.”
채가령이 자신도 뭔가 도움이 될 게 있다는 게 기쁜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부진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당장 움직일게요.”
“능허야, 그럼 우린 바로 천후 찾아서 가자.”
“엑? 사람들 모을 때까지 안 기다립니까?”
“모든 준비 다 하고 치면 그게 기습이냐.”
“너무 정신없이 움직이는 거 같은데.”
천무백이 씩 웃었다.
“그게 기습의 묘다.”
치는 편조차 정신없을 정도로, 상대를 몰아친다.
그게 천무백의 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