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7화>
87. 고놈 후손이 맞구나.
‘채가 놈아. 문파를 세웠으면 좀 반듯하게 세울 것이지.’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무너진 전각을 보면 원래도 큰 규모가 아님을 짐작됐다.
천무백은 입안이 씁쓸했다.
‘하기사, 집안 재산 거덜대면서, 제 가족이며 친우들이며 다 같이 정마대전에서 죽어 나자빠졌으니…….’
성화문의 전신은 채가장(蔡家莊)이었다.
그저 평범한 무가였지만, 그래도 흉중에 품은 뜻만큼 넓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자마자 그는 채가장을 성화문으로 개파하고, 곧장 마교와 전쟁에 돌입했다.
몇몇 거대 문파도 정마대전에서 몸을 사렸지만, 그놈만큼은 부족한 무공실력에도 불구하고 초개처럼 몸을 던졌다.
대전에서 형제며, 스승이며 모두 죽어 나갔다. 집안 재산을 들어내면서까지 무장을 갖추고 제자를 길러 내면서 싸웠다.
천무백도 아주 잘 기억했다.
실력 하나는 부족해도 싸움에선 물러서지 않던, 행운이 따르는지 가장 격렬한 전투에서도 매번 살아남던 놈.
천무백은 그를 몇 없는 친우 중 하나로 여겼었다.
한데…….
‘좀 씁쓸하군.’
세상사가 원래 이렇고, 강호에 발을 걸친 문파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 잘 알고 있다.
다만 친우가 의기양양하게 세웠던 문파가 무너지고, 고작 흑도 나부랭이들한테 핍박받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속된말로 열불이 확 솟았다.
“누, 누구냐!”
덕종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천무백은 냉막한 시선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덕종도지지 않고 마주 눈을 부라렸다.
흑도들은 절대 눈싸움에서 지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
눈싸움에서 지면 기세 싸움에서 한수 접어주는 거니,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하나 덕종은 단 일초도 천무백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니, 못 했다.
‘어린놈이 무슨 눈빛이 저리 살벌…….’
살벌해? 아니, 그렇게 표현할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자신의 뇌를 샅샅이 뒤지는 듯한 귀신 같은 눈이었다.
덕종은 이를 악물고 일갈했다.
“너, 정체가 뭐냐.”
“천무백이다.”
“천무백이 누군데!”
“네놈 모가지 따 버릴 저승사자.”
천무백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손목을 잘라 낸 것 치고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담담했다. 너무 담담한 탓에 오히려 괴기한 분위기가 풍겼다. 덕종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야.”
“……네, 넷?”
덕종은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옆에 수하들까지 천무백의 기세에 놀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 흑도 안 좋아해.”
“…….”
“그래도 좋아하는 흑도는 있어. 의리라도 갖췄거나, 아니면 흑도치고 세거나, 뭐 깡이라도 있거나.”
거기까지 말을 마친 천무백은 덕종의 얼굴을 한차례 훑더니 검을 뽑았다.
“넌 내가 좋아하는 흑도가 아닐 거 같다.”
“…….”
순간 천무백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의민 줄 알아?”
덕종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너 뒈진다는 소리야.”
* * *
“와. 더럽게 빨리 가더니. 뭔 짓을 저질렀습니까.”
“흑도 사냥.”
능허가 한쪽에 널브러진 시체 같은 흑도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한 놈만 팬 겁니까?”
“한 놈 패는 사이 나머지 도망가더라.”
“의리 없는 놈들이네요. 맞아도 싸지. 그런 놈들은.”
“적룡방이군.”
뒤늦게 도착한 곽천후가 멍이 든 채 알아보기도 힘든 덕종을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적룡방?”
“중경에서 가장 큰 흑도방파다. 이 복장은 그쪽거야.”
그 말에 능허가 소태라도 씹은 표정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니, 또 왜 괜한 흑도방파에 시비를 겁니까.”
“내가 안 걸었어.”
“안 걸긴요. 마음에 안 든다고 뒈지게 팬 게 딱 보이는데.”
“저…….”
그때였다.
능허는 뒤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미성(美聲)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채가령을 본 능허가 일순 당황했다.
사실 그는 여성의 미색에 면역이 깊다.
하남제일청루인 연화루의 루주가 아닌가. 그곳의 기녀들만 해도 하남제일미란 칭송을 받는다.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았으니, 오죽하겠는가.
웬만한 미색으론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 능허가 이번에 적잖이 놀랐다.
“여기 공자께서 저를 도와주셨어요.”
능허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췄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안색도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것으로 미색을 온연히 감추긴 어려웠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것이 묘한 매력을 피워 내는 미색이었다.
능허가 대답 못 하고 빤히 쳐다보자 채가령은 급히 소개를 덧붙였다.
“성화문의 여식인 채가령이라고 합니다.”
“아…….”
능허는 주위를 둘러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그리곤 천무백을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 이상야릇한 눈빛에 천무백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그 눈빛은.”
능허가 입술을 옹알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흠. 아닙니다.”
“…….”
천무백이 능허를 한 대 쥐어박을까 고민하는 사이.
곽천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비검문의 곽천후입니다.”
“……!”
채가령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연소운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경성에서 비검문의 위세는 두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비검문의 후계자인 투귀, 곽천후라니.
채가령의 눈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비검문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으니까.
“우선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성화문은 훌륭한 문파였지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천무백이다.”
천무백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나 처음 듣는 이름인지 채가령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물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채가령은 천무백에게 은혜를 입었다.
천무백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적룡방에 끌려가 무슨 욕을 당했을지 모르니까.
천무백에 대해 자세한 소개는 능허가 대신했다.
“그 뭐시냐, 하남의 천룡검협이라고 근래 소문이 자자한 양반인데.”
“천룡검협!”
천룡검협의 명성은 이제 어느덧 하남과 섬서를 넘어 중경성까지 전해져 있던 것.
채가령도 그 별호를 익히 들었다.
소림을 구한 신진고수이며, 화산과 종남도 큰 은혜를 입었다는 소식은 꽤 떠들썩했으니까.
오히려 채가령은 지금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파가 한창 성세를 구사할 때도 이만한 손님이 찾아온 적은 없다.
한데 문파가 무너진 이래 이런 방문이라니.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채가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면, 어쩐 일로 찾으셨는지요?”
“비검문은 혈사를 조사 중입니다. 여기 천룡검협 역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
채가령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순간적으로 피어나는 미소에 얘기하던 곽천후마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그제야 능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래서 성화문이란 소릴 듣자마자 미친 듯이 경공 써서 날아온 거요?”
“뭔 개소리를 하느냐, 능허야.”
“흐흐. 아닙니다. 연화루의 애들이 이 사실을 알면 조금 슬퍼할지도 모르겠네요.”
“…….”
어떻게 때려 줘야 이놈이 또 당분간 조용할까.
그때 채가령이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건 무슨 얘기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제 증조부의 친구라는 그 말씀…….”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곤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 증조부와 그쪽 증조부가 친우란 얘기였지.”
채가령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천무백은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어차피 하남성하고 중경성은 멀다.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리라.
“여하튼, 여기 곽천후 말대로 조사를 하러 왔다. 그러니까 뭐, 이것저것 물어볼 거야.”
채가령이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그럼 우선 객잔 가서 쉬어.”
“네?”
천무백이 혀를 쯧쯧 차며 옆에 있던 연소운을 바라봤다.
“그쪽이 호위무사지?”
“에? 예.”
“데리고 가서 밥 좀 먹이고 씻기고 잠 좀 재워.”
그건 마치 어른이 아이를 걱정하는 듯한 어조였다. 천무백은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채가령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능허에게 말했다.
“능허야.”
“예, 예.”
“이쪽 객잔까지 잘 데리고 가라.”
“제가요?”
“보아하니 저 흑도 놈들 뭐 얻을 거 없나 하고 서성거리는 거 같은데.”
“…….”
능허는 잠시 멈칫했다. 천무백의 의도야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해서 자신을 붙여 두는 게 아닌가.
다만 능허가 어색한 건, 천무백이 누군가를 걱정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란 얘기다. 물론 가족 걱정은 하긴 하지만, 가족 외의 사람에게 저런 호의를 보이는 건 처음 봤다.
물론 뚱한 표정과 딱히 따뜻한 느낌 없는 담담한 어조는 그게 호의처럼 느껴지진 않아도.
능허는 알았다.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되는 게 있으니까.
‘하여간. 이제 제 또래 남자애로 보이는구만.’
물론 천무백은 몇 없던 친우의 후손이니 챙겨준 것이지만, 능허가 그 속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가서 하오문과 접촉해서 필요한 것들을 캐 봐.”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후야. 근방 개방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지시를 내린 천무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채가령과 눈이 마주쳤다.
천무백은 마치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꼬리를 보곤 피식 웃었다.
‘고놈 후손은 맞긴 맞구나.’
* * *
육걸개는 개방이 천무백을 도와 중경성에서 협력하겠다고 했었다.
확실히 그의 장담이 통했다.
개방은 천무백이 정체를 밝히자마자 그간 중경성에서 수집한 정보를 요약해서 넘겼다.
천무백은 그 정보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어 채가령을 객잔에 보내고 하오문과 접촉했던 능허가 돌아오자, 하오문에서 수집한 정보까지 서로 교차검증하기 시작했다.
“허……. 무슨 사람 한 명이 왔다고 중경성의 정보가 한손에 쥐어지는지.”
곽천후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비검문도 중경성에서 이만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상당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개방에게 정보를 구하려면 들어가는 대가도 적지 않다. 하물며 거기에 하오문의 정보망까지.
두 정보조직의 정보를 온전히 받아 낸 천무백은, 역설적으로 중경성의 근황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됐다.
곽천후는 내심 질린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게 저 인간이 만들어 낸 결과지.’
과정이 어찌 되든 천무백은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을 거리낌 없이 이용했다.
명성을 이용해 개방의 무제한적인 협력이자 투자를 이끌어냈다.
‘적으로 돌리면 위험한 놈.’
순식간에 한손에 정보망을 움켜쥐었다.
이런 종류의 사내는 개인의 무공 수위를 떠나 그냥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인사다.
곽천후는 살짝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찌 반응하시려나…….’
화산이자 종남의 조력을 구하러 떠난 아들이, 웬 애송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이번 혈사를 해결해 줄 사람이라고 말하면…….
다혈질에 오만한 성정의 아버지라면 글쎄.
‘에휴, 모르겠다.’
곽천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때 여러 정보를 교차 검증하던 천무백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적룡방 애들 말이다.”
“적룡방?”
“얘들이 의심스러운데?”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