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6화>
86. 증조 할애비 친구다
성화문(成和門)은 중경성에서 대략 한 갑자, 60년의 역사를 지닌 문파였다.
사실 60년이 결코 적은 연혁이 아니다.
강호에서 문파가 백년이 넘게 역사를 유지한다는 건, 대문파를 제외하고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성화문은 나름 튼실한 중소문파 중 하나였다.
인원은 적고 규모는 작았지만 독문무공인 채가검(蔡家劍)을 바탕으로 중경성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졌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독문무공의 위력이 썩 나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성화문의 개파조사가 정마대전에서 활약한 무인이란 점도 유효했다.
이는 중경성에서 성화문을 감히 적대하기 어려운 강점이었다.
현재 중경성을 주름잡은 문파는 비검문이다. 그리고 비검문의 문주가 투신 곽용, 정마대전의 영웅이었다. 성화문을 개파한 개파조사와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성화문을 건드는 건, 곧 곽용과 인연이 있던 이들을 건드린다는 의미도 가졌다.
굳이 곽용과 비검문의 위세가 성화문을 지켜준 건 아니다.
작금의 강호에 이르러 정마대전에 참전한 무인들은 뭇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으니까. 이미 성화문은 존중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하여 성화문은 중경성에서 차츰 입지를 다지며 견실하게 내실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 혈사가 벌어지기 전까진.
“······.”
성화문의 여식인 채가령은 외가에서 머무르다 급히 연락을 받고 성화문에 돌아왔다.
“아가씨, 아무래도······ 근방 객잔에서 잠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무사인 연소운이 침울한 얼굴로 채가령의 어깨를 잡았다.
혈사를 전해 듣기만 했지, 실제로 두 눈으로 목격한 성화문은 끔찍했다.
담벼락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곳곳엔 혈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말라 버린 검붉은 색의 핏자국과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전각. 불타 버린 기와까지.
“······하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채가령은 끝내 폴싹 주저앉았다.
“아가씨!”
“어떻게요. 언니······.”
채가령은 흐느끼며 마른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소운은 그런 채가령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성화문의 장녀(長女)라지만 아직 어린 나이다.
이제 스무 살인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끔찍한 일이 분명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의연한 게 이상한 일이었지.’
연소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채가령을 내려 봤다.
여린 체구의 채가령은 소식을 접하고도 의연했다.
하나 어찌 괜찮을 수가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 같던 무사들이 모조리 죽었는데.
막냇동생이 너무 슬퍼할까 봐 일부러 의연한 척함을 연소운을 잘 알았다.
하나 아무리 어른스럽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해도 채가령 역시 이제 방년의 나이에 불과한 어린 여자애였다.
무너진 성화문을 목격한 순간, 그간 참아온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간신히 흐느낌을 멈춘 채가령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작은 입술을 꽉 앙다문 얼굴.
하나 결연하기보단 오히려 안타까워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과 주먹 쥔 가느다란 팔이 파르르 떨렸으니까.
“사람들 좀 모아 주세요.”
“네?”
“우리 가지고 온 돈 좀 있죠?”
“그야······ 네.”
“인부들을 모아서 일단 치워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일단 객잔으로 가시지요. 제가 인부들을 고용하겠습니다.”
“아니요, 우리 돈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저도 팔 걷고 나서야죠.”
“아가씨.”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한 몸이긴 해도, 그래도 무가의 여식이에요. 제 몸 하나는 건사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밤새며 장례를 치르고 여기까지 오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 않으셨잖아요. 일단 객잔에서 잠시 쉬고······.”
연소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채가령이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땅을 다지고, 할아버지가 기둥을 세우고, 아버지께서 지붕을 올리신 장소에요.”
“······.”
“적어도 무너진 기둥 정도는 저도 치울 수 있어요.”
연소운은 고작 며칠 새 철이 든 듯한 채가령의 모습에 안타까움과 기특하다는 상반된 감정이 들었다.
뜻만큼은 아름다워 연소운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리하진 마세요.”
“네. 고마워요. 그리고 하오문이나 개방에 선을 대 줘요.”
연소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흉수를 찾으실 생각입니까?”
“네.”
“하지만······.”
채가령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복수하지 말라고는 말아 줘요. 저도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도 누가 벌였는지는 알고 있어야겠죠.”
연소운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소운은 작은 어깨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채가령의 아버지, 성화문의 문주는 채가령을 끔찍이도 아꼈다.
하여 그녀가 강호와는 벗어난 삶을 살길 원했다.
그러나 무가의 여식으로, 문파의 자식으로 태어난 채가령은 어느덧 강호에 발을 들이게 됐다.
역설적인 사실에 연소운은 검집을 꽉 잡았다.
저 어린 채가령에게 남은 건 그저 평범한 외가와 아직 일곱 살의 막내 남동생. 그리고 자신뿐이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야 한다.
연소운은 굳게 마음먹었다.
* * *
“그래서 그놈들이 저지른 짓이 맞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날 방주님하고 얘기하고 떠난 직후, 혈사가 벌여졌으니까요”
적룡방의 부방주 진량은 ‘흠’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대체 그놈들 정체가 뭘까. 갑자기 나타나서 문파 다섯 개를 폭삭 무너뜨린 놈들이.”
진량에겐 참으로 가슴 서늘한 순간이었다.
비검문이 너희들이 한 짓 아니냐고 칼을 겨누고 시비를 걸어왔으니까.
적룡방이 중경성을 비검문과 나눈 흑도방파라고 해도,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했다는 투신 곽용이 있다.
더구나 찔리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흉수로 의심되는 이들 중 하나가 혈사가 벌어지기 전 적룡방을 찾았다.
방주가 직접 만나 은밀히 대화를 나눴으니 진량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몰랐다.
아니, 만남 자체가 극비였다.
부방주의 직위가 아니었다면 진량은 그 만남을 아예 몰랐으리라.
다행히 비검문도 그 만남까진 파악하진 못했다.
“야.”
“네. 부방주님.”
“우리가 동시에 그 다섯 문파를 없애버리는 게 가능할까?”
진량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수하인 덕종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가능은·········합니다.”
“쉽지는 않지?”
“피해가 클 겁니다.”
“그래. 그런데 흉수는 다섯 명이라면서?”
“네.”
“하.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한명이 하나씩 없애버렸다.”
중경성에서 다섯 개 문파가 사라진 건 적룡방으로서도 경계를 강화해야 하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고수들의 등장 아닌가.
그들의 검이 만일 적룡방으로 향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또 있을까.
”아. 맞다. 멸문된 문파중에 성화문이 끼어있지?”
덕종이 씩 웃었다.
“네. 거, 꼴좋은 일이죠. 그렇게 체면 차리더니······.”
“끌끌끌. 거 우리가 사업장 넓히려고 할 때마다 방해하던 놈들이 사라지니 아주 그 정체 모를 흉수에게 고맙구만.”
“이 기회에 성화문이 보호하던 상가들 접수하겠습니다.”
“음, 그러지 마.”
“네? 아하……알겠습니다.”
덕종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본뜻을 이해했다.
정식으로 적룡방에서 접수해버리면, 뒷주머니 차기가 곤란하지 않은가.
진량이 실실 웃었다.
“개파조사가 정마대전 참여했다는 거 하나만으로 얼마나 으스대던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곽용이가 정마대전 참전 용사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성화문 놈들 채가검은 꽤 살벌했는데. 다 뒈졌으면 그것도 실전됐겠구나.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고 태워버렸다면서?”
그 말에 덕종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다 죽지는 않았답니다.”
“응? 생존자가 있어?”
“문주놈의 여식하고 막내아들이 외가에 가 있어 참사를 피했답니다.”
“여식이면, 채가령이? 크. 그 아이 아주 잘 자랐던데.”
순간 진량의 눈이 번뜩였다. 덕종은 바뀐 진량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음습하면서도 탐욕스러운 눈빛.
그는 진량이 끔찍이도 아끼는 수하인만큼 진량의 마음을 읽는 데 아주 탁월했다.
“네. 때마침 지금 돌아왔답니다.”
“오호라······.”
“어디, 제가 수를 좀 써볼까요?”
덕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량이 짐짓 호통을 쳤다.
“어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아무리 흑도라고 해도, 응? 내가 부방주 자리에 있는 만큼 보는 눈이 있는데, 어찌 그런······.”
“아니, 그야 당연히 채가검의 비급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화문의 비전무공인 채가검을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진량이 씩 웃었다.
역시, 자신이 믿는 덕종다웠다.
“그래. 어디 한번 갖고 와 보거라.”
“곧장 대령해드리지요.”
채가검은 겸사겸사 말이지.
* * *
“음. 일단 정리를 다 끝내고, 비검문에 도움을 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제가 곧장 비검문하고 접촉해 볼게요, 아가씨.”
“고마워요. 언니가 없었으면 전······.”
채가령이 연소운의 손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연소운도 그 온기에 마주 웃었다.
냉면검녀란 우스운 별호가 붙은 그녀답지 않게 밝은 미소였다.
동생처럼 여기는 채가령에게만 보여 주던 미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가씨.”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서 그래요. 만일 저 혼자였으면, 전 아마 이곳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도 못 했을 거예요.”
아련한 미소였다.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피로와 슬픔, 그리고 잔해를 치우며 쌓인 먼지까지. 그것으로도 채가령의 수려한 미색을 숨기진 못했다.
지친 기색을 읽은 연소운이 말했다.
“아가씨, 이만하고 객잔에 가서 쉬세요.”
“······네.”
채가령은 어린 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나타났다.
“이거 참, 안됐구려. 채 소저.”
“······.”
열 명 안팎의 껄렁스러운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채가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소운이 그녀를 등 뒤로 밀어 넣으며 길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어허. 너무 날선 반응 보이지 마시오. 우리도 이웃인 성화문의 참사를 듣고, 조의를 표하러 온 것이오.”
덕종이 말했다.
하나 순진하게 말뜻을 받아들일 사람이 중경성에 얼마나 있을까.
특히 덕종은 사사건건 성화문과 부딪쳤던 놈 아닌가.
큰 싸움으로 번진 적은 없었으나, 서로 적개심이라면 충분했다.
오히려 성화문이 멸문했다고 술잔을 들어 올리고도 남을 놈들이, 조문을 왔다고?
“으흠. 성화문주는 훌륭한 분이셨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요.”
연소운은 흘깃 채가령을 바라봤다. 능글스러운 어조, 껄떡대는 자세,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니었다.
격장지계였다.
그녀는 걱정의 시선으로 채가령을 바라봤다. 여기서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하지만 그건 단순히 걱정에 그쳤다.
채가령은 의연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렇게 찾아 주셔서 고맙게 여겨 주실 겁니다.”
“음. 채 소저, 고생이 많소.”
“아니에요.”
“직접 나와 이렇게 몸까지 쓰다니 말이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실례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
“부방주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고 있습니다. 홀로 남으셨으니, 이웃 된 도리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으니, 초대에 응해주시지요.”
그 말에 의연했던 채가령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연소운이 화난 얼굴로 나섰다.
“돌아가시오.”
“음? 왜 이러실까. 우린 그냥 도움을 좀 주겠다는 것인데.”
덕종이 씩 웃었다. 어느새 그들을 중심으로 흑도들이 건들거리며 포위하듯 섰다.
연소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설마 적룡방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연소운은 이를 악물고 칼을 꺼내 들었다.
스릉!
“어허. 이게 무슨 짓이오? 조문을 온 문상객에게 칼을 꺼내다니.”
“개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라.”
“흐흐흐. 우리가 꺼지라고 하면 꺼질 놈들인가.”
덕종이 웃으면서 마각을 드러냈다.
빙 두른 흑도 하나가 채가령의 가느다란 손목을 홱 잡아챘다.
채가령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놓아라!”
연소운이 눈을 부릅뜨며 칼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콰득!
“······어?”
채가령을 잡아챘던 손목이 뎅겅 잘렸다.
채가령은 그 모습에 기겁하며 급히 물러섰다. 어느새 드리워진 그림자의 등이 보였다.
고작 자신의 또래나 됐을까.
한참을 달려왔는지 곳곳에 흙먼지가 묻은 차림새였으나, 새하얀 얼굴만큼은 깔끔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에 채가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천무백이 쯧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증조할애비 친구다.”
채가령은 침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미친놈인가.’
물론 당연한 오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