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5화>
85. 오성물(五聖物)
“내가 여기서 자네의 목숨을 끊어 입을 막아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주위에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조용히 뒤에 있던 능허와 곽천후가 침을 꿀꺽 삼키며 검에 손을 올렸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천무백을 노려보던 단후도 검을 당장이라도 뽑을 듯 움켜잡았다.
하나 천무백은 그런 긴장감에 영향도 안 받는 듯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화산 안에서? 퍽이나 잘 되겠소.”
“화산이 종남의 행보에 관여할 수는 없다.”
“화산의 손님으로 와서 화산의 손님을 죽인다고? 어디 해 보시오. 내 하나 말하지. 종남은 그럼 구파일방에서 사라질 것이오.”
종리홍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구나.”
“그것보다 내 입 막겠다고 날 죽이는 것부터가 성립이 되지 않소.”
“내가 네놈을 못 죽일 성 싶더냐?”
“그럼 내가 그짝을 못 죽일 성 싶소?”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냐.”
항복 선언이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소림면패를 다시 품에 넣었다.
소림면패의 위력이었다.
천무백은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놈들을 용서할 만큼 성격이 좋지는 않다.
그렇다고 종남을 상대로 대가리를 깨고 다니긴 영 부담스러운 일이다.
수백 년간 비축한 정파의 힘은 단순히 무력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강호 전체로 퍼져 나간 속가문파와 속가제자.
그리고 수많은 은원으로 얽히고설킨 인연들까지.
하나의 문파를 상대한다는 건 그만한 각오를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종리홍은 이미 천무백의 무력을 목격했던 터.
단순히 뒤통수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고 준비하지는 않으리라.
천무백은 접근해온 육걸개를 탈탈 털었다.
그에 향응하는 대가를 내놔야 하지만, 육걸개는 오히려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천무백에게 흔쾌히 개방에서 구한 정보를 내놓았다.
그렇게 얻은 정보로 종리홍을 압박했다.
‘이미 증거는 있고, 소림면패까지 제시한 이상. 더는 수를 쓰지 못하겠지.’
그 대단한 종리홍도 소림면패가 지닌 위력을 경시할 수 없었다.
“중원오재(中原五災)라는 말 아실 거요.”
중원의 다섯 가지 재앙.
“…….”
“일재(一災)는 마교요, 이재(二災)는 대막의 늙은 늑대들이요, 삼재(三災)는 황제요, 사재(四災)는 곤륜에 숨어든 산송장들이요, 오재(五災)는……”
“소림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지.”
언제부터였던가.
강호 중원에 통용되는 다섯 가지 재앙을 이르는 말이다.
강호인들에게 중원오재는 건드려선 안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소림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 오재의 하나에 있다는 건,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피해야만 하는 일이란 얘기다.
지금 소림이 쇠락해 구파일방에 속할 만한 무력이 아님은 강호인들이라면 다 안다.
하나 소림의 상징성.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상징성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일례로 화산이 혈귀곡 추적에 나서는 이유도, 소림이 습격당한 점이 가장 큰 명분이기 때문이다.
소림면패를 지닌 자를 습격하려 했다?
이 사실이 강호에 퍼지는 순간 종남파는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리라.
종리홍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내 사과하지. 선근경에 눈이 멀어 추악한 욕심을 부렸다네. 그대를 습격해 선근경을 강탈할 생각이었고…… 하지만 그대를 죽일 생각은 없었네.”
종리홍은 상황판단이 빨랐다.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혔다.
괜히 차기 장문인으로 꼽히는 위인이 아니었다. 앞뒤가 막히자 허리를 구부리는 유연성까지 갖췄다. 덕택에 천무백은 오히려 경계심을 강화했다.
‘종남이 훗날 화산보다 더 위에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선근경에 대한 비밀이 분명 있다면, 저 녀석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면 말해 줘야겠소. 선근경에 대해서 말이오.”
종리홍의 미간이 좁혀졌다.
일종의 거래였다.
사과를 받아주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묻어 주는 대신, 선근경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는 것.
종리홍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자승자박이로구나.’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들…….’
보아하니 선근경에 대해 무엇인가 직감하고 있는 듯한 눈치다.
여기서 계속 도경이라고 우겨 봤자 통할 리가 없다.
‘하면…….’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에 종리홍은 이내 입을 열었다.
“전진 성물은 하나가 아니네.”
“여러 개란 소리는 얼핏 들었소.”
“정확히는 다섯 개다. 전진의 오성물(五聖物)이라고 불렸지.”
“선근경 같은 게 네 개가 더 있다는 뜻이오?”
종리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이 있던 시절부터 내려온 비사에 따르면, 성물은 다섯 개가 모여야 한다고 했지. 단지 그것뿐이다.”
“다섯 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오?”
“아는 바 없다. 기록이 없으니까.”
“하여 선근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종리홍은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난 종남의 차기 장문인을 노리고 있다.”
“그래 보이오. 얼굴에 야망이 드러나 있거든.”
“언젠가 종남은 다섯 성물을 다 모아 중원 도학의 정점임을 내세워야 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 그 같은 일을 내가 해낸다면, 차기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만한 대단한 업적 아니겠는가?”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 종리홍을 바라봤다.
“흠. 알겠소.”
천무백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전각을 나오며 천무백은 코웃음을 쳤다.
“어딜 수작을 부려?”
“무슨 수작 말입니까? 잘 해결된 거 아닙니까?”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습격하려던 저들의 계획을 미리 저지했다.
하물며 사과까지 받아 냈다.
그럼 뭐겠는가. 종남은 절대로 천무백을 다시 습격하는 계획을 세울 수조차 없다. 천무백에게 소림면패와 증거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종남이 선근경을 노리고 습격해 올 걱정은 내버려도 된다.
천무백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저 치, 숨기는 게 있다.”
“숨기는 거요?”
“알고 있는 눈치야. 다섯 개의 성물을 모아 업적을 세우겠다는 거? 그럴 듯하지만, 그건 아니야.”
“대체 뭔 소리인지…….”
“무림인의 눈이었다.”
천무백은 종리홍의 눈을 똑똑히 봤다.
그건 단순한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무인의 눈빛이었다.
무학을 탐구하고, 더 높은 경지를 탐하는 눈동자.
“한데 그냥 나오신 겁니까?”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진교에 성물이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은 천무백도 잘 알았다.
다만 다섯 개의 선물을 한 데 모아야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종리홍은 오성물을 모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고 했으나, 천무백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종리홍은 천무백이 전혀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천무백이 곧 강호의 역사였다.
자세한 비사까지 세세히 알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흐름과 수많은 이야기를 직접 듣고 겪어온 자가 바로 천무백이다.
오성물이라고 하니, 천무백도 머릿속에 짐작되는 바가 몇 가지 있었다.
오히려 오성물 운운한 건 천무백을 이용하려는 종리홍의 의도였다.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섯 개의 성물을 모으게 내버려 둘 생각일지도 모르지.”
“엥? 그건 종남에게 꼭 필요한 것들 아닙니까. 선근경, 그깟 낡은 도경도 아득바득 얻겠다고 눈에 불을 켠 놈들인데.”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내가 다 모아 버리면, 저들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날 죽이면 그만 아니더냐.”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오늘의 일이야 소림면패로 묵살하긴 했지만, 이미 그런 마음을 한번 먹었던 놈들이다. 야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그리고 그런 야심을 포기 못 할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
바로 선근경을 비롯한 다섯 개의 전진 성물.
“하면, 그걸 모으러 다니실 겁니까?”
“아니.”
천무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지만, 굳이 그걸 일일이 모으러 다닐 필요가 있을까.
당장 천무백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소용이 있는 일도 아니다.
물론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될 일이지만, 지금 급한 거 그게 아니었으니까.
“하면 선근경은요?”
“잘 보관하거라. 언제고 써먹을 일이 있을 테니까.”
“뭐……네. 알겠습니다.”
천무백은 순순히 종남의 의도대로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새끼들. 네놈들 아주 딱 찍었어.’
그리고 오늘의 일도, 사과 하나로 퉁 치고 넘어갈 생각 역시 없었다.
* * *
화산을 먼저 하산한 건 청현진인과 국보를 비롯한 매화검수들이었다.
그들은 곧장 안휘성으로 향했다.
“일단 네놈 목적도 이뤘구나.”
곽천후는 천무백의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딱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외부의 조력을 구하긴 했는데…….’
본래 목적은 중경성에서 벌어진 흉사에 대한 도움이었다.
이룬 건 맞다.
다만 화산이 안휘성으로 향했다는 점. 그리고 중경성으로 오게 된 건 천무백이란 점이 조금 걸렸다.
‘이게 더 나으려나.’
하지만 더 생각할수록 화산이 중경으로 오는 것보다, 천무백이 같이 가는 게 왠지 모르게 더 든든했다.
물론 그의 아비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천무백은 이후 종남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다가, 딱히 별 움직임이 없는 걸 확인하고 곧장 중경성으로 향했다.
“천후야.”
“……?”
“중경성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
곽천후는 간혹 튀어나오는 노인네 같은 어조에 쉬이 적응되지 않았다.
저 어리디 어린, 새하얗고 작은 얼굴에서 툭 튀어나오는 늙은이의 어조.
아무리 봐도 반로환동을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불쑥 들 정도였다.
“우리 비검문이 백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흑도에선 태룡방의 동생 문파인 적룡파 애들이 세를 떨치고 있다.”
“단둘?”
“그래. 나머지는 작은 중소문파들이니까.”
“멸문당한 문파들의 특이점은?”
“특이점이라…….”
곽천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멸문당한 다섯 문파는 특별히 공통점이란 게 없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면…….
“제법 역사가 깊고, 그들만의 고유한 독문무공이 있다는 점?”
“역사가 깊다고?”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중경성에 터를 잡고 적어도 반백년 역사를 이은 문파들이다. 다섯 문파 모두.”
“흐음.”
천무백이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그건 공통점이라고 보기에도 좀 그랬다.
중경성은 거대 문파가 없다 보니 작은 문파들이 오랫동안 현판을 내리지 않고 잘 지내온 것이다.
그러니 그걸 굳이 공통점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아무래도 중경에 가서 직접 봐야겠군. 개방도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가면 뭐라도 건질 수 있겠지.”
“중경성에 들어서면 가는 길에 바로 멸문당한 문파를 확인할 수 있다. 둘러볼 건가?”
“음.”
잠시 생각하던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을 살피는 것도 필요한 일.
“더구나 여긴 생존자가 있다.”
“생존자?”
“문주의 어린 여식과 이제 갓 다섯 살 된 막내아들이 마침 자리를 비웠던 터라, 그 두 남매만 살아남았더군.”
“거.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 아이고, 불쌍한 것들.”
능허가 혀를 쯧쯧 찼다.
“그 어린 것들이 아이고오…… 그 남매들 빼고 다 죽은 거야?”
“안타깝게도 그리됐지.”
“문주가 무슨 원한이 깊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성화문의 문주는 인망 높기로 중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잠깐만.”
그때였다.
얘기를 나누던 능허와 곽천후는 순간 천무백의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했다.
능허는 고개를 돌려 천무백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뭐지?’
낯선 반응이었다. 천무백은 날선 목소리로 곽천후를 채근했다.
“멸문 당한 문파가 성화문이라고?”
순간적인 기세에 곽천후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마치 이를 악문 듯한 천무백의 낮은 목소리에 주위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능허야.”
“네.”
“지금부터 전속력을 다해 중경으로 간다.”
능허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천무백이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