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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84화 (84/318)

<검신재생 84화>

84. 자, 적으로 돌릴 거요?

천무백은 거침없이 전각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꽝!

예의가 아니었다.

여기가 화산이고, 종남은 화산의 손님 자격으로 전각에 머무르는 중이다.

한데 그 전각을 특별한 연락도 없이 찾는 게 우선 예의가 아니다.

거기에 다짜고짜 문을 쾅 박차고 들어가는 행동에 뒤따라가던 능허와 곽천후가 아연실색했다.

“야, 네 주군 말이다.”

“뭐, 인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냐?”

“한개다.”

“근데 왜 저리 안하무인이냐?”

목숨이 한 개인데, 무섭지도 않은가.

능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 개인 목숨을 누가 건들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곽천후가 입을 쩍 벌렸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곽천후가 짐짓 걱정된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강호는 넓다. 저러다가 고수 만나면 칼 맞아 뒈진다.”

“그 고수가 죽겠지.”

“······.”

곽천후는 차마 능허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비무전에서 보여준 엄청난 무위에 곽천후는 사실 천무백에게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저 천무백이 죽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 벽에 똥칠할때까지 살지 않을까.

‘그래도 그렇지 이 안하무인은······.’

곽천후의 우려대로 종남의 일대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 무슨 예의 없는 짓이오!”

“예의는 지랄.”

“······!”

좌중이 입을 쩍 벌렸다.

거침없는 모습을 종종 보여 줬던 천무백이지만 지금의 언행은 상식을 벗어났다.

특히 비무전에서 보여 준 압도적인 활약에 알게 모르게 천무백을 흠모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천무백의 날 것 같은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무백은 앞을 막아 둥글게 원을 형성한 인의 벽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

분명 길을 막고 있건만, 천무백이 움직이자 인의 벽도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묘한 대치상황.

누구도 천무백의 앞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이쯤 되면 한 명쯤 나와서 손님 안내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미리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예의는 없소.”

“서로 연락하고 지낼 정도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돌아가서 다시 약속을 잡으시오.”

“미안하지만 곧 화산을 떠나야 해서 시간이 없어.”

“목적이 무엇이오?”

“그쪽한테 말해봤자 말 안 통해. 대장로 얼굴 좀 보자고 해.”

“이 버릇없는······!”

“거 그냥 얼굴 좀 보자는 건데, 보기 힘드네.”

“돌아가시오. 더는 참지 않겠소.”

스르릉!

일대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태연자약하던 천무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겁을 먹었다고 느꼈는지, 사적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대가 강한 건 알지만,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없지. 돌아가시오.”

천무백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꺾었다.

“너 나한테 안 처맞았니?”

분명 비무대에서 꽤 두들겨 팬 거 같은데.

“……이익!”

“너무 약하게 때렸나. 정신 못 차렸네.”

사적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검을 뽑은 채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천무백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진검 들고 덤비는 놈 안 살려놓는 게 나야. 선 넘지 마.”

사적유는 땅에 박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기세 좋게 한 발짝 나섰지만 천무백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마치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 무슨······.’

비단 자신뿐만 아니다.

아홉 명의 일대제자들이 모두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검자루를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새하얗게 변했다.

천무백의 기선제압에 종남파의 일대제자 아홉 명이 일제히 몸이 묶였다.

쉬이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이쯤 되면 나올 만한데. 안에서 음모를 꾸미느라 바쁘신가.”

완벽한 무시였다.

사적유는 온몸을 꽁꽁 얽매는 기세를 억지로 이겨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엔 자신을 포함해 아홉명의 일대제자가 있다.

고작 한명을 막지 못해 아홉명이 물러설 수는 없다. 종남의 이름이 걸려있지 않은가.

사적유는 거칠게 일갈하며 발을 내디뎠다.

“이노옴!”

발을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사적유는 천무백의 얼굴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싸늘한 웃음.

“……!”

아니, 정확히는 입꼬리만 올라갔다. 눈은 그대로였다.

천무백의 나른한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움직였네?”

천무백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적유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그 손가락이 우아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 금을 뜯는 듯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움직임.

하나 이어지는 결과는 단순히 우아하다고 여길 수만은 없었다.

픽! 픽! 픽! 픽!

열 개 손가락에서 순서대로 쏟아지는 탄지공(彈指功).

새하얀 탄지공이 검자루 부분을 때렸다.

촤르륵!

“……!”

사적유를 비롯해 아홉 명이 모두 검을 놓쳤다. 하지만 그들은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지도 못했다. 보지 못했다면 막을 수도 없단 아기다. 막아? 아니 피할 수도 없다.

심지어 정확히 아홉 명의 검자루를 맞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한 공격이었다.

그 정밀한 공격이 만일 목이나 이마 정중앙을 노렸다면?

식은땀이 등 뒤로 주룩 흘러내렸다.

특히 사적유는 정면에서 천무백의 오른손 검지에 모인 새하얀 내공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아홉 개의 탄지공이 모두 검을 놓치게 했고, 남은 저 하나.

그 하나가 사적유의 머리를 겨눴다.

천무백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비켜.”

천무백은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사적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무백이 지나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릉.

천무백은 검집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 전각의 내부로 들어갔다.

서로 앙숙이라지만 화산은 종남을 충분히 대접해 꽤 좋은 전각을 내줬다.

넓었고, 깨끗했다.

노을이 지고 있기 때문일까. 내부는 어스름한 주황빛이 스며들고 어두웠다.

그 사이로 천무백의 웃음이 번졌다.

“거.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으셨나. 우리 종남 장로분들.”

* * *

“방문이 요란하군. 천룡검협.”

“내 나름 예의를 갖췄는데, 못마땅하다면 사과드리지.”

단후가 발끈했다.

“이 오만방자한 놈을 보았나! 네 이놈! 네놈의 사문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기본적인 예절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더냐!”

“예절은 갖출 만한 사람에 지키는 것이지. 내 뒤통수치려고 이상한 짓 꾸미는 놈한테 지키는 게 어느 나라 예절이요?”

“……!”

단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백이 말갛게 웃었다.

“왜. 화산에 하산하는 놈 뒤통수를 치고 선근경 빼앗으려 작당한 게 들켜서 식겁했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수양이 부족하시네. 얼굴에 다 드러나. 종남산에 돌아가서 도를 더 닦는 게 어떠신가?”

천무백의 조롱에 단후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귀화가 타올랐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재주가 있소? 크으. 역시 도사가 다르긴 달라.”

그때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종리홍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알았느냐?”

“강호란 칼날 위를 걷는 삶 아니겠소. 여차하면 칼에 베이는데, 경계해야지.”

종리홍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신기하군. 누가 그대를 열일곱의 어린아이로 볼까.”

“우리 아버지랑 누님이 그리 보시지.”

“사문이 어떻게 되나?”

“문답하자는 건가?”

“그래. 서로 궁금한 게 한두 가지 있는 듯하니 문답을 나누지.”

“사문은 없소.”

종리홍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작부터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난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오.”

“풉.”

그때 뒤에서 조용히 따라온 능허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천무백이 흘깃 뒤돌아보자 급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나이에 그만한 실력, 그만한 무공, 종남풍검과 매화일검을 동시에 상대해서 승리를 거둔 그 실력에 사문이 없다는 걸 믿으라는 건, 날 너무 허술하게 보는 거 아닌가?”

“하면 알아서 조사해 보시오. 개방이든 하오문이든.”

“…….”

종리홍은 천무백의 눈을 조용히 주시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동공.

오히려 바라볼수록 종리홍은 그 눈빛 속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득한 호수였다.

종리홍은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선근경을 차지하기 위해 천무백을 습격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던 차였다.

그걸 어찌 알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천무백은 굳이 따지면 적대관계다.

한데도 종리홍은 묘하게 천무백이 싫지 않았다.

저 당당한 태도와 그걸 뒷받침하는 실력. 하물며 배분 따위는 그냥 개나 줘 버리는 저 태도까지. 새하얀 얼굴에 드러난 미소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경계심이 풀릴 정도였다.

‘……뭐?’

순간 종리홍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분명 몇 시진 전만 해도 천무백을 어찌 처리하고 선근경을 가져올지 논의하고 있었건만.

지금 드는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뒤늦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종리홍은 저도 모르게 천무백을 떨리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순간,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아쉽구려.”

“……섭혼술이라도 익힌 것인가?”

“그냥 내 매력이라고 하지요.”

“풉.”

“능허야.”

“네. 조용히 있겠습니다.”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 그럼 내가 하나 물을 차롄가. 선근경이 뭔데 내 뒤통수칠 각오까지 하는 거요?”

“전진교의 성물이니까.”

“단지 그것뿐인가? 정말로?”

“그뿐이다. 전진의 개파조사인 왕중양이 직접 적은 도경. 그대도 알 텐데. 글자와 문장에 담긴 비범한 힘을 말이야.”

“확실히 현기가 느껴지는 문장과 글자지. 근데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그쪽이 탐낸다고 여겨지지 않거든?”

“그뿐이다.”

“그럼, 뭐 고작 그 이유만으로 내 뒤통수를 노렸다는 건데. 그게 어떤 의민지 아시려나.”

종리홍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크게 웃고는 천무백을 노려봤다.

“대종남파 앞에서 주름잡는 것인가? 고작 알량한 명성을 조금 얻었다고? 본좌가 바로 풍운검군, 종리홍이다.”

“나는 천무백이오.”

종리홍은 한참이나 천무백을 노려봤다.

단지 노려보는 게 아니었다. 방안을 가득 메우는 기세.

마치 거대한 산이 군림한 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천무백에게 쏟아졌다.

비단 천무백에게 쏟아지는 기세였으나, 방안에 뒤따라 들어온 능허와 곽천후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아시오?”

그때, 천무백이 기세의 틈을 비집고 불쑥 말했다.

가득 메우던 종리홍의 기세가 일순 바람처럼 흩어졌다.

종리홍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기세를 흩뜨렸다? 말 한마디로?’

호흡 사이를 절묘하게 끊어 버렸다.

그건 상대의 호흡과 기세, 내공의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자가 정녕 그 정도의 경지란 말인가?’

하나 종리홍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툭.

천무백이 품 안에서 꺼낸 무광의 검은색 패.

곁에 있던 단후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으나, 종리홍은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이건…….”

“소림면패요.”

“……!”

천무백이 웃었다.

“소림면패를 지닌 자를 습격하려 했다. 증거도 충분하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소?”

종리홍이 당황을 애써 숨긴 채 눈을 치켜떴다.

“종남이 소림을 두려워 할 것 같은가!”

“소림은 두렵지 않더라도, 소림이 가지는 의미는 두려워해야지. 소림면패를 지닌 자를 공격하는 건 소림을 공격하는 거요, 소림을 공격한다는 건 정도 무림을 공격한다는 것이니.”

천무백이 입가에 띤 미소를 거둬들이며 정색했다.

“자. 적으로 돌릴 거요. 아니면 한번 해 볼 거요?”

“······도대체 자네 뭘 믿나?”

“나 자신을 믿지.”

“······.”

“어때? 난 자신 있는데. 한판 떠?”

껄렁거리는 말투와 자세.

하나 종리홍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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