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3화>
83.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지.
“다 나았냐.”
“뭐,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그럼 가자.”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갑니까?”
“아니, 중경성.”
능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옆에 있던 곽천후에게 향했다.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지? 네가 중경으로 가자고 꼬드긴거지?”
곽천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천무백을 가리켰다.
“이 양반이 내가 가자고 꼬드긴다고 갈 사람이야?”
“그건 그렇지. 주군, 왜 중경성입니까?”
“혈귀곡하고 연관성이 발견됐다.”
“설마 혼자서 문파 하나 멸문시키는 괴상한 놈들이, 그 혈귀곡…….”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니런 썅. 그놈들은 무슨 중원 전체에 퍼져 있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담담하게 대답하는 천무백을 보며 능허는 스멀스멀 불길함이 피부를 타고 올라옴을 느꼈다.
‘혈귀곡 이 새끼들…….’
하남에 이어 섬서, 그리고 안휘성과 중경성.
중원전도를 펼쳐 놓고 보면, 활동 범위가 무척이나 넓다.
“이놈들 단일세력입니까?”
능허의 질문에 천무백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능허야. 처음으로 널 데리고 다닌 것에 후회가 들지 않았다.”
“썅. 딱 보면 보입니다. 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도 자기가 위치한 성 하나에 영향력을 끼치는 게 전붑니다. 그런데 성을 넘어 이렇게 활동한다는 건…….”
“단일세력이라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
“만일 그렇다면 어마어마하다는 얘기죠?”
“그래.”
천무백은 중원전도를 내려다 봤다.
무려 네 개의 성에서 혈귀곡의 흔적과 연관성이 발견됐다.
하나의 단체가 네 개 성을 거쳐 일을 벌인다는 건 광활한 중원을 떠올리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강호에는 때로 이처럼 중원 전체에 영향력을 떨쳤던 수많은 집단들이 출현하곤 했으니까.
“점조직이면 이해가 되지.”
“점조직이라…….”
천무백은 혈귀곡의 흔적이 발견된 성을 손가락 하나씩 짚었다.
“모두 연관성이 없거든.”
하남에서 소림을 습격한 놈들, 안휘성과 중경성에서 혈사를 벌인 사건까지.
긴밀하게 연관된 사건이 아니다. 혈귀곡에 대해 몰랐으면 각자 별개의 사건처럼 보일 정도다.
“아마 이쪽일 확률이 높다. 고위층 몇을 제외하면 서로가 같은 조직원일지도 모를 정도로 점조직으로 나뉘었다면, 넓게 활동할 수 있지.”
“음.”
“그리되면 우리도 얘들 추적하는 데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겠지.”
“……그러면 이 혈귀곡이란 놈들. 목적이 뭐야?”
곽천후가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천무백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
천무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관성이 없다. 혈사문을 이용해 역병을 퍼뜨린 거. 중경성과 안휘성에서 문파들을 멸문시킨 거. 소림을 공격한 거. 소림의 표물을 빼앗은 거…… 음?”
순간 천무백이 말을 멈췄다.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생각에 생각지 못한 점을 발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생각에 잠겼던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일단은 확인해 봐야지. 그래도, 중경성에서 일 벌인 놈들. 혈귀곡인 애들일 확률이 높아.”
능허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으니까.
도대체 무슨 맹점을 발견한 건진 몰라도, 천무백이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표정이라면 사실상 확실한 일이다.
천무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능허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뭡니까. 벌써 갑니까?”
“아니. 볼일 보고.”
“볼일이요?”
“종남에 다녀오마.”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저지르긴, 대화 좀 하련다.”
천무백이 휙 돌아 나갔다.
능허는 왠지 모르게 또 일이 터질 것 같단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썅. 빨리 중경성으로 도망가야겠네.’
* * *
‘아름다웠다.’
전현은 가부좌를 튼 채 상념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하나의 기억이 되풀이되었다.
‘천룡검협.’
며칠 전 비무대에서 맞닥뜨린 천무백과의 비무전.
그때의 모든 과정과 움직임, 그리고 결과까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엔 그저 고통스러웠다.
‘무참한 패배였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치욕적이고 지독한 패배였다.
매화일검 국보와 손을 잡아 협공까지 펼쳤건만 결과는 처참했다.
완벽한 패배.
이미 섬서 무림에 소문이 자자했다.
-종남풍검과 매화일검을 천룡검협이 쓰러뜨렸다!
-둘이 손을 잡았는데도, 천룡검협을 이기지 못했다!
당일 비무에는 수많은 관중이 몰렸다. 소문이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룡검협의 위명이 하늘을 찌를 듯했었다.
거기에 비무전의 결과까지 전해지니 천룡검협은 섬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우뚝 섰다.
비단 섬서뿐이겠는가.
근방의 성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천무백이란 이름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고수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으니까.
하물며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만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튀어나오고 있다.
‘백대고수…….’
전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백대고수.
종남의 장로직에 있어도 얻지 못한 이름이다.
물론 백대고수란 게 정확한 서열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름이 오르니, 마니하는 얘기가 도는 것만으로도 중원에서 천무백의 명성은 확실했다.
하물며 그의 나이가 약관도 채 되지 않음을 떠올리면야.
그래서 좌절했다.
머릿속에서 떨쳐 내려고 할수록 더 뚜렷해지는 잔상.
천무백의 검에서 쏟아지는 붉은 화염과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매화.
그 속에서 번쩍이는 검은 떠올릴 때마다 전현은 몸을 떨었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그걸 다시 되새길수록 전현은 두려움과 좌절보다 경이로움이 들었다.
‘어찌 그토록 검이 아름다운가.’
검이란 자고로 강력하고, 패도적이어야 한다.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검은 수단이다.’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느꼈으며, 검을 휘둘렀다.
패도(覇道).
그것만이 종남이 섬서에서 화산을 넘어 우뚝 설 수 있는 비결이라 여겼다.
한데 천무백의 검은…….
‘아름다웠다. 진심으로.’
마치 화인(火印)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그때의 움직임, 걸음걸이, 손짓, 검로.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뚜렷해졌다.
전현의 멍한 눈초리가 하늘에서 이내 정면으로 향했다.
‘나도, 아름다운 검을 그리고 싶다.’
순수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검으로 우뚝 서 사람들 머리 위에 서겠단 본래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본 아름다운 검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흐릿했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천무백…….’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초점이 잡힌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이 타올랐다.
* * *
“뭐, 한판 붙자고?”
종남이 머무르고 있는 전각에 도달하자마자 전현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천무백은 이내 전현의 눈동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 봐라?’
천무백은 저런 눈을 잘 안다.
‘그새 뭔가 깨달았어?’
깨달음을 목전에 뒀을 때의 눈이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고, 또 이겨 낸다면 한 발짝 더 나아갈 순간이기도 했다.
‘국보보단 한 걸음 앞서가겠군.’
국보 역시 이번 비무전에서 어느 정도 배운 게 있으나, 극적인 깨달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좌절감을 느낀 듯 전체적으로 기가 죽은 모양새였다.
반면 전현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고난 욕망인가.’
패도를 추구하는 성정.
그 욕망이 좋게 발현되면 이처럼 빠른 발전을 불러오기도 한다.
“무슨 일로 오셨소, 소협.”
전현의 이전과 달리 꽤나 정중한 어조였다.
천무백은 슬쩍 고개를 빼고 전각을 쳐다봤다.
“대장로 계신가?”
“스승님은 처소에 계시오.”
“응, 그 양반 보러 왔어.”
“……..”
전현은 잠깐 천무백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소협.”
“뭐.”
“단후 장로를 조심하시오.”
“…….”
“스승님과 단후 장로님은……. 선근경을 포기하지 않았소이다. 그대가 화산을 곧 떠난다는 사실을 들었소. 그때를 조심하시오.”
천무백은 빤히 전현을 쳐다봤다.
“그걸 나한테 왜 얘기해?”
“……잘 모르겠소.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거든.”
“문파의 뜻을 저버리는 건가?”
불과 며칠 전 종남파의 위세를 등에 업던 전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현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결과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종남의 뜻이었지만, 지금은 잘못된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오.”
“단지 그뿐인가?”
천무백이 씩 웃었다.
전현은 순간 흠칫했다. 태연한 천무백의 눈빛을 마주친 순간 홀딱 발가벗겨진 채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천무백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 여겨졌다.
“이왕에 나한테 빚을 져 놓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화산도 속세적이지만, 종남은 도문이라기 보단 속세의 문파에 더 적합하지. 무슨 행동을 하든 계산적이란 말이야. 나한테 빚을 쥐여 주고 나중에 무언가 부탁하려는 속셈 아니야?”
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얼굴이 붉어졌다.
완전한 선의?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물론 어느 정도 선의를 가진 건 맞다. 하나 천무백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다.
이내 전현은 부끄러움을 떨쳐 내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스승님과 단후장로님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선근경이 중요하다고 한들, 그대와의 관계보다 중요할까.”
전현의 눈이 반짝였다.
장로에 이어 대장로, 그리고 미래의 장문인까지 꿈꾸는 전현이다.
그의 판단력만큼은 날카로웠다.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만한 무위다. 십 년, 이십 년 후에 천하제일이 될 기재다.’
전현은 질투를 버렸다.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야 질투와 시기심이 생기는 법이다.
전현은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국보와 협력해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격차.
그건 단순한 격차라기보단 마치 사이에 벽이 존재하는 듯했다.
선근경?
‘중요하지. 하지만.’
미래의 천하제일고수를 적으로 돌릴 만큼 중요한가?
전현은 그게 의문이었다.
그가 아는 스승님도 훌륭한 사람이다. 호불호는 갈리더라도 위대한 무인인 건 틀림없다. 단후 장로야 제자를 망가뜨린 천무백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고 해도, 종리홍이 그러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근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데.’
허나 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스승은 윗세대다.
반면 자신은 다음 세대다.
즉, 천무백이 천하제일고수가 될 세대에서 강호를 걸어나갈 세대란 애기다.
자신이 종남의 장문인이 됐을 때, 천무백을 적으로 만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니 전현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천무백과의 관계개선을 꾀했다.
천무백도 그런 전현의 생각을 읽었다.
‘좋은 판단력.’
아직도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으나,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발현된다면야.
‘혈귀곡이고 나발이고 간에, 언제든 도움이 되겠지.’
천무백은 그런 전현의 뜻에 그저 웃어줬다.
“조언은 고맙게 받지.”
“조심해야 할 것이오. 단후 장로는 청현진인만큼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니까. 그대라도…….”
“그러니 지금 온 거야.”
천무백의 무덤덤한 대답에 전현은 순간 흠칫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천무백의 허리춤에 향했다.
화려한 장식의 진검.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지.”
천무백이 섬뜩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