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82화 (82/318)

<검신재생 82화>

82. 똑같이 전해 주시오.

천무백은 선근경을 얻고도 화산을 떠나지 않았다.

능허가 운신하기 힘드니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했다.

또 혈귀곡에 대해 협의할 게 남았다.

거기에 천무백을 귀찮게 하는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하오문의 임홍이 비무전이 끝나고 전한 얘기.

‘거지새끼들이 산 곳곳에서 동냥질 중입니다.’

개방이 접근해 왔단 사실에 천무백은 잠시 고민했다.

‘개방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하오문과 거래를 통해 충분한 정보망을 얻은 상황이다.

거기에 현곡으로부터 화산파의 도움도 당부받았으니 정파의 협력도 충분했다.

여기에 개방으로부터 조력을 받으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다.

‘받은 만큼 줘야 하지.’

개방도 정파의 일각이지만, 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다.

화산파처럼 적당히 속세에 관여하며 도를 닦는 것과는 아예 다르다.

혈귀곡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친다고 해도, 받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향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건 하오문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미 암진혜검의 끊긴 구절을 전해 주기로 했으니 거래는 끝.

여기서 굳이 개방의 협력을 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우선은 개방은 배제한다.’

어차피 추후 혈귀곡에 대한 정체가 드러나고, 그들이 정녕 정도무림이 일치단결해서 싸워야 하는 적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개방은 어쩔 수 없이 협력해 올 수밖에 없다.

하여 천무백은 개방과의 접촉을 아예 피했다.

물론 피한다고 해서 다 피해지는 게 강호가 아니긴 했다.

천무백은 곽천후가 가지고 온 일로 현곡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거지를 만났다.

* * *

“어서 오시오, 천 공자. 그리고 곽 공자.”

현곡이 조용히 천무백과 곽천후를 반겼다.

천무백은 장내를 슥 둘러보았다. 오대장로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대장로와 청현진인.

그리고 도움을 청하러 온 곽천후.

천무백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은, 확연히 다른 복색의 남자였다.

여기저기 해진 옷에 지저분한 차림.

삼결(三結)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개방도였다.

시선을 느낀 개방도가 씩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천룡검협에게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개방의 육걸개라고 합니다.”

“천무백입니다.”

“저 역시 비무전을 잘 봤습니다. 오히려 소문의 명성이 부족한 감이 있더군요. 이거야 원, 그 나이에 사실상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과찬입니다.”

“……음.”

천무백은 담백하게 말을 일축하곤 시선을 뗐다.

일견 불쾌할 만도 한 모습인데, 육걸개는 개의치 않았다.

‘신기한 양반이군.’

오히려 육걸개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실제로 그리 불쾌하지도 않았다.

천무백에게 흘러나오는 묘한 분위기 덕택에 싸늘해 보이거나 버릇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또 그걸 받아들이는 주위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천무백의 시선이 향하자 현곡은 조용히 말했다.

“여기 비검문주의 대공자께서 얘기한 내용을 조사해 봤습니다.”

천무백이 흘깃 곽천후를 쳐다봤다.

천무백이 비무전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곽천후를 화산측에 소개했다.

곽천후는 그 자리에서 원래 목적을 말했다.

정파측 인물이 문파 몇 개를 잔혹하게 멸문시켰단 얘기에 화산은 그야말로 기함한 뒤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끔찍한 참사가 중경성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더군요.”

현곡이 슬쩍 육걸개를 쳐다보곤 말했다.

“안휘성에서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휘성 말입니까?”

“흉수 중엔 정파의 유명한 명숙들도 있었지요.”

“이런…….”

같은 사건이 안휘성에서 일어났단 얘기에 곽천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정보는 여기 개방의 육걸개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다음 설명은…….”

“제가 하겠습니다. 장문인.”

육걸개가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천무백은 이 자리에 왜 개방도가 왔는지 이해했다.

‘개방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거군.’

아니면 개방이 먼저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개방 정도라면 그만한 사건에 화들짝 놀라 이미 주도면밀하게 살피고 있었으리라.

그런 와중에 화산이 알아보려는 움직임을 눈치를 채고 먼저 접근한 것일 수도 있다.

‘하면 나는 왜?’

곽천후가 청한 일이긴 하다만, 이번 일은 천무백과 관련이 없다.

한데도 현곡은 천무백을 이 자리에 청했다.

천무백은 시선을 돌려 육걸개를 쳐다봤다. 우연인지 육걸개도 천무백을 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고 천무백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자신이 현재 화산에 남은 이유는 혈귀곡에 대해 화산과 협력을 논하는 일.

하면 이 자리에 불렀다는 건…….

천무백이 단도직입적으로 직언했다.

“혈귀곡과 관련이 있습니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걸개가 담담하게 말했다.

“중경성에서 일을 벌인 다섯 명의 무사 중 셋이 정파의 인물입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호선자라는 별호로 불리는…….”

“화산 속가 출신이신 검객이시지요.”

청현진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맞습니다. 또 안휘성에서는 일곱 명이 나타났는데, 그중 두 명이 정파인이었습니다. 특히 한명은 남궁세가의 방계인 남궁진으로 밝혀졌습니다.”

“…….”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단 천무백뿐만 아니라 장내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의 방계가 어째서……?”

“남궁진이라면 유명한 협객이지요. 도를 아는 인물입니다.”

“확실한 겁니까?”

안휘성엔 남궁세가가 있다. 한데 남궁세가의 방계가 웬일인지 은원도 없는 문파를 멸문시켰다? 일대 사건이었다.

“확실합니다. 더구나 일을 치른 무인들은 비단 정파뿐 아니라, 흑도와 사파, 심지어 마도 쪽 인물도 섞여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군요.”

“예. 정사마흑, 상관없이 같은 목표로 문파들을 무너뜨렸다. 더구나 멸문된 문파간의 공통점도 없습니다.”

중인들이 미간을 좁혔다.

육걸개가 말을 할수록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 정사마를 초월해 포섭하여 일을 벌인 것입니다.”

“맙소사. 대체 어떤 놈이 그런…….”

“호선자 어른은 협객이십니다. 수양이 깊은 도인이기도 하시지요. 그런 분이 누군가에게 포섭을 당했다니…….”

천무백이 조용히 물었다.

“그 누군가가 혈귀곡입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청현진인이 말한 소림에서 도망쳤다던 혈귀곡 노인네 있지 않은가?”

현곡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예. 약선의 진법을 뚫고 도망친 위인이지요.”

“사실 선근경이니, 적혈검귀의 비급이니 바빴지만 내 따로 조사했네. 장문인 직속에 무력단체가 하나 있는데, 내가 미리 손을 좀 썼네.”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청현진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현진인이 감탄한 눈빛으로 현곡을 바라봤다. 화산이 적혈검귀의 비급과 선근경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혈귀곡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탄하던 청현진인이었다.

한데 장문인이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니.

그 눈빛을 읽은 현곡이 허허롭게 웃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오, 청현. 마음 같아선 화산의 전력을 총동원해 찾고 싶었지만…… 이 자리가 홀로 화산을 이끄는 위치가 아니니까 말이오.”

“흠흠.”

그 말에 대장로들이 괜히 헛기침했다.

혈귀곡을 뒤로 미뤄두고 적혈검귀의 비급을 먼저 찾자고 주장했었으니까. 괜히 부끄러움을 느낀 그들은 침묵했다.

“감히 정도무림의 기둥인 소림을 공격한 놈들이오.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내 있는 힘껏 조사하고 추적했지만, 추적은 실패했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고, 섬서성에 와서 본 현장을 보니 사람 찾는 게 요원한 일임을 깨달았으니까.

“그래도 성과는 있었네. 그 노인네, 백모쌍귀(白毛雙鬼)였네.”

“백모쌍귀!”

“그 마인이란 말입니까?”

“그래. 그 노인네가 백모쌍귀는 형이고, 이번에 중경성에서 목격된 놈 중의 하나가 동생 놈일세.”

“그런…….”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쌍둥이들인데, 이 정도면 혈귀곡과 연관성은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않은가?”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모쌍귀라…….’

사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전생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별호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니 대충 2~30년 전.

그쯤의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어찌 됐든 쌍둥이라면, 높은 확률로 혈귀곡과의 연관성을 의심할 만했다.

‘하면 대체 왜 문파를…….’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긴, 그 미친 귀신 놈들이 무슨 의도로 그딴 짓거리를 하는지는 평범한 생각으론 추측할 수는 없지.’

천무백은 평범한 추측을 멈췄다.

이미 혈사문을 이용해 역병을 퍼뜨리고, 소림을 공격한 시점에서 혈귀곡은 일반적인 상식과 추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괜히 천무백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광귀(狂鬼)라고 칭한 게 아니었다.

하니 여기 앉아서 머릴 굴려봤자 의미가 없었다.

“하여 화산은 안휘성의 남궁세가와 협력해 안휘성 쪽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할 예정이라네. 그리고 종남에서 섬서성을 맡아주기로 했지.”

종남도 썩 마음에 들진 않긴 했다만, 그래도 정파의 일인으로서 혈귀곡의 위협에 공감했다.

하여 화산이 자리를 비워 안휘성에서 남궁세가와 협력하는 사이. 종남이 섬서성을 정비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섬서성은 아직 역병으로부터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으니까.

천무백이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종남은 이번 일을 빌미로 섬서성의 영향력을 확대할 텐데요.”

종남이 순순히 협력한 이유 중 하나가 아마 이것이리라.

섬서성을 정비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그러자 현곡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라고 하게.”

“장문인!”

“어찌 그런…….”

대장로들이 황망해 했으나 현곡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네. 종남이 그래 봤자 우리는 화산일세.”

“…….”

“비록 우리가 소림처럼 정마대전 때 가장 앞서 싸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선배들께선 우리에게 한치의 부끄러움도 남기지 않았네. 오로지 강호를 위해 초개처럼 몸을 던졌지. 한데 혈귀곡이 무엇이 문제겠는가.”

현곡의 말에 대장로들은 일순 침묵했다.

은근히 질책하는 투가 담긴 어조였기에 몇몇은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천무백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일견 보기에는 의협심이 넘치는 명문정파의 거두다운 모습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소림이 가진 이름을 계승하겠다는 뜻이지.’

과거 소림은 정마대전때의 모습으로 뭇 강호인들에게 성역화 되었다.

아무리 세력이 약해졌다고 한들, 정도무림의 기둥, 중원을 지키는 지붕임은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산은 그 역할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다. 지금 혈귀곡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한들, 과거의 마교 정도는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

하면 그만한 피해 없이 이겨 낼 수 있고, 위기의 순간에 몸소 나선 화산의 명성은 높아지리라.

물론 이것만으로도 정파로서의 체면치레는 충분히 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명분과 명예를 얻기 위해 화산은 더 적극적이리라.

하니 천무백으로서도 상관없는 일이다.

화산이 정도무림의 수장이 되든, 소림이 되든 그에게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혈귀곡이 그리 만만한 놈들이 아닌 건 확실하니.’

오히려 화산은 예상보다 많은 전력을 소모할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면 저는 중경성으로 가야겠군요.”

“과연 천룡검협이군. 스스로 나서다니.”

천무백이 빙그레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니까요.”

“여기 개방에서 협력해 주기로 했소. 중경성에서의 일은 개방과 함께 움직이시면 되네. 천 공자.”

천무백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육걸개가 빙긋 웃고 있었다.

‘흐음.’

천무백의 눈에 순간 이채가 흘렀다 사라졌다.

* * *

화산과의 협의가 끝난 직후.

천무백에게 육걸개가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남을 조심하시오.”

“뭘 말이오?”

“종남은 그저 착하기만 한 정파가 아니오. 그들이 따르는 도는 전진교의 도보단, 오히려 패도에 가깝지. 때론 명분도 무시할 정도로.”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육걸개를 빤히 바라봤다.

육걸개는 천무백의 무표정에 잠시 흠칫했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 태연자약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소. 종남은 정파이긴 하나, 속세에 더 가까운 놈들이거든.”

“그래, 조언 고맙소.”

“…….”

“하면 그쪽에도 똑같이 전해 주시오.”

“종남 보고 천무백을 조심하라고 말이오.”

육걸개는 순간 가슴 한쪽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천무백의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경고를 하는 듯했다.

비단 종남뿐 아니라. 왠지 모르게 접근한 자신까지도.

“나도 그렇게 착하기만 한 협객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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