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1화>
81. 강호는 칼날 위를 걷고
“차 맛이 어떤가?”
“좋습니다.”
“차를 좋아하진 않는군.”
“즐기진 않습니다.”
“스승님의 함자가 어떻게 되나?”
천무백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코끝을 살짝 간질이는 향긋한 향. 좋은 차였다.
천무백이 가볍게 답변을 회피하자 노인, 화산파 장문인 천절검(天絶劍) 현곡이 희미하게 웃었다.
“청현에게 들었지. 창천검신의 후인이라고.”
“알고 계시는군요.”
현곡이 괜한 오해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 친구가 입이 싼 게 아니야. 내가 캐묻는데 어찌 대답 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하면 스승이 검존이신가?”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를 음미하는 듯 시선을 멀리했다. 청현진인과 소림의 혜량대사 앞에서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인정했으니, 검존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게 일방적이다.
하나 천무백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눈앞의 현곡이 누구인지 잘 알았으니까.
“역시. 아니군. 검신 어르신께서 다른 제자를 두신 건가.”
천무백이 반응하지 않자 현곡은 김이 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친우의 제자라면 내가 모를 터가 있나.”
“친우……말입니까?”
천무백의 어조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현곡은 헛기침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굳이 따지면 호적수였지. 음.”
천무백이 속으로 실소했다.
‘호적수는 지랄. 제자 놈한테 허구한 날 얻어터진 놈이.’
지금이야 화산파 장문인으로 떡하니 앉아있지만, 천무백은 그의 과거를 똑똑히 기억했다.
어디서 칼질하는 거 배웠다고, 제자인 검존하고 늘 투닥거리던 치기 어린 애송이 아니던가.
물론 결과는 늘 똑같았다.
호적수라고 불리기엔, 둘의 전적은 확연하게 검존에게 기울여졌으니까.
괜히 천무백이 검존을 제자로 거둬들인 게 아니다.
‘재능 하나는 특출난 녀석이었으니까.’
검존은 천무백의 전생을 통틀어서도 가장 빛나는 재능이었다.
굳이 따지면 여동빈 다음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재능이니 제자를 키우는 데 큰 관심 없던 천무백이 직접 거뒀으리라.
현곡도 충분한 재능을 가졌었다. 다만 검존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사실을 천무백은 분명히 기억했다. 호적수는커녕, 그저 만년 이인자나 다름없었다.
‘아니지, 투신 곽용이 놈도 꽤 한가락 했으니.’
“하여간, 검존 녀석이 제자를 길렀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네. 그래서 청현이 창천검신의 후인이 천공자라고 말했을 때, 약간 의심을 하기도 했었네.”
“그래서, 지금도 의심이 풀리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말해 모르겠네. 내가 봤던 검신 어르신의 무공을 보지 못 했거든.”
그야 천무백이 이번 비무전에서는 의도적으로 감췄으니까.
“그래도 하나는 알겠더군. 검에 담긴 순수함. 말일세.”
천무학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이만 처먹은 게 아니구나.’
검에 담긴 의미를 깨달을 정도면, 확실히 그냥 나이만 먹은 게 아니다.
하긴, 화산파 장문인 자리에 앉은 걸 보면 노력 좀 꽤 했겠지.
천무백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현곡은 그저 허허롭게 웃었다.
“선근경은 넘겨주겠네.”
“알겠습니다.”
“자네에겐 쓸모가 없는 물건일 텐데, 스스로 강호를 위해 희생하다니…….”
“……?”
천무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희생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선근경이 화산이나 종남 중 어느 한쪽에 있다면 분쟁이 끝나지 않을 일이지.”
“…….”
“정당하게 한쪽이 가져가도 말일세. 결국, 양측 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터, 지금 같은 정도무림이 공동의 전선을 펼쳐야 할 땐 문제가 생기겠지.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스스로 화산, 종남과 싸운 게 아닌가?”
천무백은 눈을 끔뻑거렸다.
도대체 이 말코 도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천무백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현곡은 씩 웃었다. 마치 기특한 손주를 보는 듯한 노인의 눈빛이었다.
“화산과 종남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분쟁의 원인을 품에 안으려는 계획이 아닌가? 천 공자.”
“음.”
“선근경이 우리에게 없으니 화산과 종남은 더 싸울 일도 없고, 얼굴을 붉힐 일도 없지. 하면 자네가 얘기한 그 혈귀곡이란 놈들을 상대로 공동의 대응을 할 수 있을 테고. 자네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분쟁을 없앤 게 아닌가? 그저 혈귀곡이란 악적들을 잡기 위해서.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 말일세.”
점점 말이 많아지는 현곡을 보며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화산 장로들 뒤에서 늘 침묵만 지키기에 나이 먹고 과묵해진 줄 알았건만.
젊은 시절이랑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과연 검신 어르신의 후인답네. 그 어르신도 겉으론 투덜대도 결국 강호를 위해 싸우지 않았던가.”
글쎄.
그땐 그냥 다 죽어 나가니까, 안타까워서 나선 건데.
천무백은 굳이 오해를 풀 생각하진 않았다.
어찌 됐건 천무백이 선근경을 가져가게 되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도사도 아닌 천무백이 왜 도경을?
혹시 선근경에 뭐가 중요한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얘기들이 나올 법도 하다. 한데 화산의 장문인부터가 저리 오해해 준다면야,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다만 종남에서는 아직 선근경을 쉬이 포기하지 않은 눈치일세.”
“그런가요?”
“후. 하긴. 종남에게 전진교의 정통을 이었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하겠나.”
종남파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것이었다.
전진교의 정통을 이은 진정한 후계자란 점.
그것만이 섬서에서 같은 도문인 화산파를 상대로 앞서나갈 수 있는 무기였으니까.
‘한데, 꼭 그것일까?’
천무백은 비무대에서 보였던 풍운검군, 종리홍의 눈빛을 떠올렸다.
천무백이 전현과 국보를 쓰러뜨림으로써 비무는 한경기가 남았지만, 승부가 결정됐다.
천무백이 3연승을 거두면서 나머지 경기의 승패가 의미 없게 됐다.
화산에서는 깔끔하게 단념했다. 국보가 가르침을 배웠다고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화산도 천무백에게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일전에 천무백과 능허가 보여 준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물론 화산도 선근경을 중요시했다.
다만.
‘나와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거지.’
화산은 소림과 달리 속세에 가까운 문파다.
단순히 화산안에 숨은 도문(道門)을 벗어난지 오래다.
천하제일검문.
그게 바로 화산이고, 강호의 수많은 이해관계의 중심에 있다.
화산은 선근경이란 도경보단 천룡검협이란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반면, 종남은 안 그랬단 말이지.’
그에 반해 종남은 규칙을 바꾸거나 마지막 경기까지 하려고 시도했다.
그건 단순히 다섯 번째 비무에 나설 삼보진인 단후의 제자를 천무백이 무참히 패배시켜서 나온 반응이 아니었다.
‘선근경.’
천무백이 시선이 향했다.
“자. 여기 있네.”
손만 대도 부스러질 것 같은 책.
‘여기에 뭔가 있는 눈치였단 말이지.’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 * *
“그놈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단후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를 보며 종리홍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러는가. 그 아이는 단전이 깨진 게 아니지 않은가.”
“허어. 그것이 더 문제지요. 그 간악한 놈은 경고한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단전을 부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 마치 선심을 베푼 것처럼……!”
단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제자를 무참히 패배시키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한 것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쯧. 불같은 성격은 여전하군. 수양이 충분할만할 터인데.’
종리홍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그라고 선근경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었겠는가.
문제는 명분이었다.
이미 선근경은 천무백에게 돌아갔다.
단후는 마지막 경기까지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의미 없었다. 승패에 상관없었고, 괜히 단후가 나서봐야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화산 측에선 청현진인이 나오니까.
설령 이긴다고 한들 이미 지친 대로 지친 천무백을 상대로 이겼다고,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있겠나.
결국, 단념하고 비무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차라리 화산파도 그게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종남에게 넘어갈 바엔 천무백이 가지는 게 낫다고.
그 생각은 종남의 적지 않은 인원도 공감했다.
하지만 종리홍에겐 선근경이 필요했다.
“선계의 힘…….”
“예?”
한참 분노를 토하던 단후는 종리홍의 중얼거림에 시선을 돌렸다.
종리홍은 그런 단후를 보다 말했다.
“사제.”
“네, 사형.”
“아직도 천무백을 용서 못 하겠나?”
“제 제자 놈을 그렇게 쓰러뜨린 건, 절 모욕한 겁니다. 용서할 수 없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비무전은 끝났는데…….”
“비무전은 끝났지만, 강호의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단후는 의미심장한 종리홍의 말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강호는 칼날 위를 걷는 삶이지.”
종리호의 눈이 타올랐다.
* * *
“그래서 제가 그렇게 개고생해서 얻은 게 바로 이거입니까?”
“응.”
“진짜 볼품없어 보이는 책인데요.”
“수백 년은 됐으니까.”
“이야. 손만 대도 가루가 될 것 같습니다.”
“건들지 마라.”
“예예. 안 건듭니다. 제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요.”
능허는 온몸을 감싼 붕대를 은근히 천무백의 시야에 눈에 띄게끔 자리 잡았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괜찮냐, 몸은.”
“이야. 이걸 이제 물어보시네.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말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멀쩡하긴…… 진짜 뒈지는 줄 알았습니다.”
“애송이 목검에 맞고 뒈진다고 하면 되냐. 흑도의 자존심 어디 갔어?”
“흑도고 나발이고 정통으로 처맞으면 뒈지는 거죠.”
“이상한 데서 삶의 도를 깨달았구나.”
“나이 먹으면 그렇게 됩니다. 아직 어리신 주군이야 세상 일 잘 모르겠지만, 응? 어른들의 강호란 말이죠…….”
“칼날 위를 걷는 삶이지.”
천무백이 말을 끊었다.
갑작스러운 단호한 어조에 능허가 순간 흠칫했다. 천무백의 시선이 선근경을 향했다.
“능허야, 저게 그냥 단순한 도경으로 보이냐?”
“음, 대충 읽어봤는데 모르는 글자가 너무 많아서요.”
“도경이 맞다. 나도 하나하나 다 읽어봤는데, 정말 도경일 뿐이다.”
천무백의 눈이라면 도경 속에 숨겨진 의미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그 안에 절세의 무학이 담겨 있다면 천무백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다.
한데도 천무백은 도경 안에서 특별한 걸 찾지 못했다.
‘물론 담긴 뜻은 비범하다.’
단순한 도(道)를 넘어서 생사에 관한 비결이 담겨 있었다.
뜻 모를 말들이 여러 상징으로 함축되고 있었다. 단순히 해석하는 일에도 경전에 능한 도인들이 분분히 모여야 답이 나올 정도다.
‘선기가 느껴지긴 해.’
문장 한 줄, 아니 글자 하나하나에 깨끗한 선기가 담겨 있다.
단순히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과연 전진교의 성물이라 불릴 만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것만으로 그만한 욕심을 낼까.’
천무백은 종리홍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했다.
‘지독한 탐욕.’
도인의 눈이라고 볼 순 없는 강렬한 욕망이었다.
그렇다고 종리홍이 도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패도적인 기세가 가득했으나, 그의 표정에는 언뜻 분명 현기라고 볼 만한 것이 흘렀다.
즉 검뿐만 아니라 도인으로서 충분히 수양이 깊은 자였다.
듣기론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했으니, 도학에도 조예가 깊으리라.
그런 자가 잠깐이나마 눈에 불을 태울 정도면…….
‘단순한 도경이 아니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오랜 전생 동안 단 한 번도 천무백을 배신하지 않은 무형의 감각.
숱한 생을 넘어 어느 순간 자리 잡은 초인적인 감각.
상단전의 경천혼공이 깃들어져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감각으로 진화했다.
그 직감이 속삭였다.
‘뭔가 있다.’
단순한 직감은 아니다. 경천혼공이 이 도경을 외울 때마다 미세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종리홍은 무언갈 알고 있다.’
그러면 답은 나온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또 혼자 생각하고 혼자 무슨 소릴 합니까. 뭘 물어봐요?”
“선근경에 대해서.”
“누구한테요?”
“종리홍.”
그러자 능허의 얼굴이 소태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또 무슨 짓을…….”
“강호란 게 그렇지 않느냐.”
천무백은 칼날 위에 섰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종리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