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80화>
80. 자, 이제 내놔.
‘대체…….’
그건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전현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바닥에 목검을 박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매화가 나에게 왔다.’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국보의 매화가 아니다. 천무백의 검끝에서 펼쳐나온 매화는 국보의 매화보다 더 지독했다.
그가 가진 상식을 벗어난 상황.
비상식을 마주한 전현의 눈빛이 크게 떨렸다.
‘강호는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곳이라더니…….’
그러나 언제까지 가만히 경악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떨리는 눈빛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쇄애애액-!
천무백이, 움직였다.
검이 쏟아진다.
전현은 곧장 몸을 구르며 간신히 피했다.
쾅!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천무백의 검기가 벽을 때렸다.
벽이 폭음과 함께 무너졌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확인한 전현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이번엔 매화가 아닌, 전혀 다른 폭발력.
누구보다 어떤 힘인지 잘 아는 전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대양화검?’
자신이 쏟아낸 대양화검의 양기.
어떻게 그걸?
전현의 눈이 경악으로 떨리는 사이, 반대편에서 몸을 추스린 국보의 칼날이 쏟아졌다.
매화십이검이었다.
“차앗!”
국보가 기합과 함께 천무백의 뒤를 노렸다.
수십 개의 꽃봉오리가 일제히 터지며 꽃잎이 흩날렸다.
분홍빛의 매화가 주위를 감쌌다.
향긋하다.
더없이 향긋하다.
향긋한 아름다움 속에 숨겨져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법!”
천무백이 감탄을 터뜨리며 칼을 빙그르르 돌렸다.
스스슷!
순간 그의 발이 허공을 밟듯 살짝 떠올랐다.
“……!”
건곤창응보(乾坤蒼鷹步).
창공을 나는 매처럼 표홀한 움직임 속에서 천둔검법이 펼쳐졌다.
패검도, 중검도, 그렇다고 쾌검도 아니다.
‘그저 검.’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가 무엇인가.
정의할 수 없다.
검도(劍道)를 갈고 닦아, 그 길을 걷는 수많은 검객도 명백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모두가 다르니까. 어떤 누구도 검을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 했으니까.
하나 천무백은 단호하게 답을 내놓았다.
‘검은 그저 살(殺)이다.’
그것이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다.
오로지 죽이기 위해 태어난 무구.
강호가 태동하던 시절, 삼재검성이란 전설을 남겼던 천무백에게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는 그러했다.
아름다운 매화 꽃잎 사이로 지독한 살초가 갈랐다.
지독한 폭력이었다.
“……!”
국보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만개하듯 개화하던 매화가 짓밟혔다. 천무백의 검이 무참하게 꽃봉오리를 가르고, 찢고, 파괴했다.
한데도 이상한 것이, 그것이 무섭지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짓궂은 마음에 꽃을 짓밟는 듯한, 그런 묘한 순수함도 깃들어 있었다.
저 지독한 살초에 말이다.
모든 매화가 짓밟히고 찢어졌다. 천무백의 살초에서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열기는 매화를 태우고, 끝내는 국보의 검마저 집어삼켰다.
‘대체, 어떻게?’
어째서 전현의 양기가 천무백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가?
카가가가강!
국보가 간신히 몸을 비틀며 피해 냈다.
비단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무백은 동시에 둘을 상대했다. 왼손으론 전현을, 오른손으로는 국보를.
관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집중했다.
“이 미친!”
전현의 입에서 끝내 경악이 터졌다.
이번에 천무백의 좌검에서 매화가 피어올랐다.
“어찌!”
“도대체 저게 뭐란 말이오!”
“타인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것으로 받아치다니!”
끝내 관중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하나 어쩌겠는가.
천무백의 천둔검법은 오로지 본연의 의미만 가졌다.
즉, 살초를 뿌리기 위해서 그 어떤 형식도 벗어날 수 있음을 뜻했다.
그에게 전진성단에서 얻은 초식 따위는 아무 의미 없었다.
‘탈피한다.’
형식을 파괴하고 벗어난다.
칼이라는 본연의 의미로 돌아간다. 오로지 검이 가진 순수한 의미만으로 검술을 펼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저 흐를 뿐.’
검의 궤적엔 그 어떤 법칙도, 힘도, 기운도 깃들지 않는다.
그저 흐를 따름이다.
‘변하고, 또 변하고, 또 변한다. 본연의 의미만 가지면.’
검으로 매화를 피워 내든, 불길을 일으키든.
아무 상관 없다.
그것들도 그저 천둔검법이 가진 ‘살(殺)’이 표현되는 방식 중 하나.
따라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정의할 수 없다.
경천혼공이 가진 무한한 포용성, 상단전이 가진 극한에 달한 오감, 그걸 넘어선 새로운 감각.
경천혼공과 합쳐진 천둔검법은 이 세상에 유일하고도, 가장 위험한 검이 되었다.
“……!”
“사, 사형.”
풍군검군 종리홍.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단후는 종리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긴장했다?’
그가 지금껏 봐 온 종리홍은 그야말로 검군이란 별호처럼 위대한 무인이었다.
강자를 만나도 기죽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을 뽐내며 웃음을 터뜨리는, 호방한 위인이다.
한데 지금.
검집을 잡은 채 부르르 떨리는 종리홍의 손과, 이를 악물어 새하얗게 질려버린 종리홍의 얼굴.
단후는 그 긴장감을 이해했다.
“천…… 무백!”
괴이한 일이다.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남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걸 제 것으로 쓴다니.
그딴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지독한 흡정마공도 저러지 못한다. 저럴 수는 없다.
그것이 일방적인 상식이다.
불가능한 일을 마주친 단후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술이다! 저건 사술이 틀림없어!”
“아니다.”
하나 그런 단후를 제지한 건 종리홍이었다. 종리홍은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 것 같이 이를 바득갈며 말했다. 흡사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 탁한 목소리였다.
“저건, 그저 검이다. 그냥, 순수한 검이다.”
그 역시 검군이란 별호답게, 검으로서 경지에 오른 한 명의 검객.
그는 천무백이 가진 검의 의미를 꿰뚫었다.
그러므로 그는 긴장하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이해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검이다.
무념무상이란 말이 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 일체의 생각과 상념을 모두 잊어 본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간혹 사람들은 무공을 익히다 무념무상에 빠진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생각을 비운다는 건 엄청난 의미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하나 그것이 쉬이 가능할 리가 없다.
검을 들 때 수많은 잡념이 깃든다.
아무리 오래 수련한 무인이라도, 각자가 가진 가치관과 상념이 검에 깃든다.
오히려 수없이 검을 갈고 닦은 사람들일수록 그 경향은 더 짙다.
고집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평생의 가치관이 검에 담기기 마련이다.
종리홍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있어 검은 바람이다.’
바람처럼 휘날리고, 태풍처럼 몰아치고, 폭풍처럼 쏟아진다.
그에게 검이란 그런 의미였다.
종리홍은 자문했다.
‘나는 그 의미를 버릴 수 있을까?’
답은 불가다.
하여 그는 천무백의 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꿰뚫어 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검.
‘나는 이길 수 있는가.’
종리홍은 눈을 감았다.
* * *
천무백은 마음껏 천둔검법을 펼쳤다.
전현과 국보.
그 둘은 천무백이 마음껏 검을 펼쳐도 될 만한 실력자들이었다.
덕택에 천무백은 기꺼웠다.
천둔검법을 얻고, 깨닫고, 그걸 다시 내 것으로 체득한 모든 걸.
펼쳐대고, 시험하고, 평가할 수 있었다.
‘여기선 더 빠르게.’
그의 눈이 검 끝을 타고 주위를 훑었다.
‘여기선 기운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인다.
어쩌면 천무백이 굳이 곽천후를 옆에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자신의 성향과 비슷해서일지도 모른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춰야 한다. 칼은 피를 머금고 날카롭게 벼려진다.’
검이 가진 본연의 의미에 가까우므로.
천무백은 깨달은 바를 몸으로 체득하며, 다시금 부족한 점을 냉혹한 눈빛으로 하나씩 머릿속에 새겼다.
천무백은 지금 이 비무를 천둔검법의 장점과 약점을 분석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흡족했다.
‘이대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
천무백의 몸이 짧게나마 전율했다.
지금까지 천무백이 행한 건 과거의 무위를 되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창천검신이 가졌던 무위를 한걸음씩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무학의 세계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로써 천무백은 나아갔다. 당장 가진 무위는 전생을 따라잡는데 바빴으나, 적어도 그가 가진 무학의 세계관만큼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천무백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럼 더는 볼 것 없군.’
더는 찾을 약점도 없다. 이제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다시금 나아가면 끝이다.
하니 지금의 비무는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걸 계속하는 것도, 이들에겐 실례지.’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새하얗게 뒤집힌 눈동자가 전현과 국보를 훑었다.
동시에 천무백의 주위로 새하얀 광채가 쏟아졌다.
그걸 목도한 순간, 전현과 국보 둘 다 자신이 가진 최선의 수를 꺼냈다.
“타앗!”
전현의 목검이 일순 터져나갈 듯 부풀었다.
새빨간 기운이 불타듯 원을 그렸다.
“폭염천래(暴炎天來)!”
관중석에서 누군가 비명처럼 내질렀다.
종남을 상징하는 검.
하늘을 가르는 붉게 타오르는 검줄기가 허공을 꿰뚫었다.
동시에 국보의 검도 단 한 송이의 꽃을 피워 냈다.
지독히도 붉은 매화.
마치 핏물을 머금은 듯 붉디붉은 꽃잎.
이번엔 화산 측에서 신음처럼 탄식을 토했다.
“운해(雲海)……!”
매화운해(梅花雲海)
붉게 피어오른 꽃봉오리가 일순 터져나간다. 그리고 그 위로 하늘을 뒤덮었다. 매화로 뒤덮은 구름과 바다.
“아아.”
“과연 중원제일의 후기지수들이라더니……!”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각 문파를 대표하는 절정의 기예.
하나 천무백의 얼굴은 담담하다 못해 오히려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이…….”
천무백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순간 천무백의 양손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단숨에 공간을 갈랐다.
콰아아앙!
붉게 타오르는 검줄기가 가장 먼저 깨져나갔다. 폭염천래는 하늘을 가르기도 전에 찢어졌다.
콰앙!
하늘을 덮었던 매화가 일제히 천무백의 검식에 한낱 연기처럼 흐려졌다.
꽃이 졌다.
그 충격의 여파가 전현과 국보를 말 그대로 날려 보냈다.
둘은 피를 왈칵 토하며 말 그대로 실신했다. 각자 가진 최고의 절기를 쏟아내려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역류당했으니 내공이 진탕됐으리라.
“……!”
하나 화산파 장문인과 종남파 풍운검군은 침음성을 삼키며 오히려 벌떡 일어나 천무백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 알 길 없는 행동에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무렵.
화산파 장문인, 현곡이 입을 열었다.
“고맙소. 덕택에 두 후기지수가 목숨을 부지했소.”
“종남도 그대의 손속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다른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저 둘만큼은 천무백의 마지막 검격을 이해했다.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그저 겉핥기 불과한 최강의 절기였다.
두 후기지수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문파의 절기를 소화해 내기엔 그 둘은 어렸고 부족했다.
하니 겉만 번지르르하게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자칫 잘못 했으면, 내공의 역류로 둘 다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한데 천무백이 그걸 막아 낸 것이다.
현장에 모인 가장 강한 두 명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천무백은 담담하게, 그리고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끝났으니. 내꺼 내놓으시오.”
“…….”
감사는 됐고.
물건이나 내놓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