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9화>
79. 이제 내 차례인가?
“…….”
상대가 되지 않는다.
관중들이 느낀 감정이었다.
정말로, 수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
화산과 종남의 일대 제자들이 연속으로 두 번씩 패배했다.
하물며 그것도 완전히 정당한 대결이라고 볼 수조차 없었다.
삼파전.
홀로 두 명을 상대하는 비무.
서로 공방이 오가지도 않았다.
‘그저…… 마치 유람이라도 하듯이.’
검이 궤적을 그렸고, 상대는 쓰러졌다.
거기에 무언가 반박할 것도 없다.
상대가 무슨 특별한 수를 썼니, 화려한 변초를 섞었니, 기가 막힌 묘수를 썼니.
그 모든 가정이 쓸모가 없어졌다.
“압도적!”
관중에서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압도적이었다. 숨도 쉬지 못하게 몰아붙였고, 단숨에 끝내버렸다. 상대에게 공격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방어도 하지 않았다. 양쪽으로 쌍수검을 쓰면서 동시에 두명을 무너뜨렸다.
거기까지가 일반적인 관중의 시점이었다면.
“보셨소?”
“봤소.”
“저 사람은 몸이 절반으로 나뉘어 있단 말이오?”
“어떻게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기 다른 검을 쓴단 말이오?”
화산의 장로들은 모두 탄식을 터뜨렸다.
그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왼손으로 펼친 검식과 오른손으로 펼친 검식이 완전하게 판이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마디로 왼손으론 다른 검술을 펼쳤고, 오른손으로도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검술을 펼쳤단 얘기다.
“그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이오?”
“보여 주지 않았소. 가능하다고.”
“아니, 그렇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에 장로들은 모두 넋을 놓은 듯했다.
그런 와중에 국보는 검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무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매화를 논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낮고 굳게 깔리는 목소리.
청현진인이 다소 굳은 얼굴로 배웅했다.
반대편에서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전현이 성큼성큼 올라왔다.
“천 공자,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소?”
무려 3연전이다.
물론 모든 비무가 정말 차 한 잔 마시기도 전에 끝났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공이란 게 순간적으로 힘을 쏟아내면 시간과 상관없이 지치는 게 당연한 일.
하나 천무백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휴식은 모두 끝나고 취하지요.”
“……알겠소. 곧장 시작하지.”
천무백의 시선이 양측에 향했다.
국보는 냉막한 얼굴로 목검을 잡았고, 전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천무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쪽은 협상 안 하오?”
“협상?”
뜻 모를 말에 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까 뒈지게 처맞은 놈은 화산하고 같이 싸우자고 협력하자고 하던데. 그쪽은 안 하나?”
천무백의 말뜻을 깨달은 전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내심 홀로 싸우기에는 쉽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문제는 깨달았다고 해도 쉬이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았다.
하물며 설령 협력해서 이긴다고 한들.
‘젠장’
그게 자랑스러운 승리가 되겠는가?
선근경이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오늘의 비무전은 종남의 예상대로 잊혀지지 않으리라.
호사가들은 오늘 얘기를 떠들 게 분명하다. 천룡검협을 상대하기 위해 종남풍검과 매화일검이 손을 잡았다고.
“삼파전에서 둘이 손을 잡고 협력하는 것도 규칙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요. 같이 싸우시겠습니까? 소도장.”
“……음.”
국보가 먼저 제안해 왔다. 전현이 흠칫한 얼굴로 국보를 바라봤다.
국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 공자를 이기진 못해도 어느 정도는 버금간다고 자부했습니다. 한데 오늘 보니, 또 그것도 아니군요.”
“…….”
“저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수련하고 있으나, 그 시간 동안 천공자도 계속 정진 중이었습니다. 하니, 약자의 권리를 챙겨야지요. 강자를 잡기 위해 약자는 때론 비겁해질 수 있는 법입니다.”
국보의 말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면 나도 강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해야지.”
“…….”
전현은 이를 악물었다.
천무백이 스스로 강자라고 말하는데,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비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혼쭐을 내주리라 장담했건만.
막상 마주서니 알겠다.
‘강하구나. 나보다 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다.
두 명의 눈빛이 바뀌는 걸 보며 천무백은 호흡을 골랐다.
‘제대로 해 줘야겠구나.’
강자의 권리.
그건 곧.
“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지.”
상대를 경시하지 않음이다.
* * *
파앗!
선공은 전현이었다.
전현의 눈에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구나.’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
천무백이 아니었다면 쉬이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그래도 허명은 아니었구나.’
종남풍검 전현.
나이를 뛰어넘어 배분을 무시하고 일대제자를 넘어 장로까지 달았던 이유가 지금 드러났다.
때문에 천무백은 기꺼웠다.
‘드디어.’
천둔검법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력이 현재의 강호에 얼마나 통하는지.
중원에서 제일가는 후기지수들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상대다.
우우우웅!
전현의 목검이 마치 타오르는 듯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목(木)에 양기를 담는다?’
열화와 같은 양기가 목검을 타고 오른다.
하나 목검은 한낱 재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무 안에 내기를 함축한다.
함축된 열기가 서서히 타오른다.
열기는 길게 이어진 검신을 따라 빠르고, 폭급하게 붙는다.
그것은 도도한 것도, 느린 것도, 중후한 것도 아니다.
막대한 내력이 함축되고 또 함축된다.
당장이라도 타고 터져나가야 할 양기가 함축되어, 역으로 그 안에서 끊임없이 폭발하고 함축된다.
‘타고난 양기로구나.’
그야말로 불길을 온몸에 두른 듯한 뜨거움.
어째서 종남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무리수를 쓰는지. 세간의 평판을 무시하고 더 강함을 추구하는지.
천무백은 이해했다.
이것이 바로 종남의 성질이고, 무공이다.
무당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기의 물결이 아니다. 화산처럼 향긋한 매화도 아니다.
단 한 번, 두 번, 세 번.
강력하게 터지고, 또 터져 나오는 폭발성.
하지만 터뜨리지 않는다. 폭발성을 검안에 함축하여, 지금, 단 한 번의 기회에 터뜨린다.
‘대양화검(大陽火劍)이라.’
비단 전현뿐만 아니다.
‘매화인가…….’
천무백의 눈이 반대편을 향했다.
반대편에선 국보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허공에 검영(劍影)이 하나둘 새겨지고, 그림자들은 이내 꽃으로 변했다.
한 송이, 한 송이 피어오르며 매화향이 진동했다.
휘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매섭게 파고드는 매화검법.
‘청풍십삼식(清风十三式)이군.’
좌에선 터져 나오는 화염이 천무백을 감싸고, 우에선 아름다운 매화가 휘날리며 천무백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뜨거움과 아름다움.
그 속에 담긴 칼날이 천무백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천무백!”
곽천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곽천후였기에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
지극히 위험하다.
전현의 양기(陽氣)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고, 아름다운 매화는 꽃잎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절대로 막지 못한다.
아니, 살아남지를 못한다.
지금 저 비무는 단순한 목검을 이용한 비무전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미 저들의 수준에서 목검과 진검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검을 통해 발출되는 기세.
그것만으로도 바위를 부수고 땅을 뒤집을 수 있으니.
‘천무백이라면?’
곽천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는 천무백을 지금껏 만나 겨뤄본 이들 중 최고로 쳤다.
치가 떨리도록 강하고, 그가 후기지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저토록 강렬한 공격 속에 버텨 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곽천후는 저도 모르게 이를 깨물었다.
‘중원은 넓구나. 정녕.’
거대문파 없는 중경성에서 투귀란 별호를 얻었건만.
곽천후는 중원이 넓고 고수가 많음을 진정 깨달았다.
그때였다.
천무백이 움직였다.
불길과 아름다운 매화 사이에서 천무백의 양팔이 마치 춤을 추듯 궤적을 그렸다.
궤적 안으로 기류가 바뀐다. 마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곽천후의 몸이 떨렸다.
천무백은 양쪽에서 쏟아지는 각기 다른 공격에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저 매화와 양기는 본래 전생에선 곁을 지킨 제법 든든한 공격이었다.
매화는 마교에 맞섰고, 종남의 양기도 비록 늦었지만 결국 마교를 향했다.
한데 그 공격이 이번엔 자신에게 쏟아졌다.
천무백은 불현 듯 이런 공격 속에서 아연한 표정을 짓던 마교도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막지 못했지.’
다만, 천무백은 다를 것이다.
어찌 막을 것인가?
솔직히 말해 막을 수 있는 선택지는 딱 하나가 있다.
귀곡광애.
그 엄청난 호신강기라면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는 힘이 있다.
하나 천무백은 그러지 않았다.
‘여동빈아. 네놈이 남긴 거, 내가 잘 쓰는지 지켜보아라.’
천무백의 양팔이 춤을 추듯 서로 교차했다가 다시 양쪽으로 뻗어졌다.
‘피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막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받아들인다.’
천둔검법은 파괴적이지도, 무겁지도 않아 패검도, 중검도 아니다.
그렇다고 표홀하지 않았고, 극도로 쾌속하지 않아 쾌검도 아니었다.
그럼 천둔검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검이다.’
어떤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가장 단순하게 단지 검으로 불려야 한다.
상단전의 내기와 주위의 외기가 자유롭게 어울린다.
“……?”
천무백은 봤다.
전현과 국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는 장면을.
그리고 그 의아함이 점점 파문으로 퍼져나간다.
천무백은 웃었다.
그들의 기운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온전히 받아들인다.
‘이 몸에.’
양손에서 천둔검법이 펼쳐진다. 그것들은 기운을 막아 내지도, 반격하지도 않고.
길이 된다.
주위의 외기와 상대의 양기, 그리고 매화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상단전이 그릇이 된다.
그의 영(靈)이 하나의 그릇이 된다.
세상 만물엔 기(氣)가 있다. 돌이든, 나무든, 한낱 잡초든.
각자가 가진 그릇 안에 기를 품는다.
천무백은 지금 그릇이 되었다.
상단전이 서서히 열려 경천혼공은 극성까지 운공되고, 머릿속에서 수많음 음률이 악기가 연주되듯 흘러나온다.
그 그릇을 통해 저 기운을 담는다.
대양화검의 양기를 담는다.
그리고 청풍십삼검의 매화도 담는다.
“……!”
그 모든 기운이 빨려 들어간다.
조금도 남김없이.
그리고…….
좌수로 빨아들인 대양화검의 양기가 우수로 흘러나온다.
우수로 받아들인 매화가 좌수로 뻗어 나와 화려하게 꽃송이를 피워 낸다.
불길은 타오르다 못해 용암이 되어 흘렀고, 한송이 피어오른 매화는 이내 비무대를 가득 메웠다.
관중들은 모두 넋을 놓았다.
전현의 불길이 용암이 되어 국보를 덮쳤고,
국보의 매화가 화려하게 피어난 매화가 되어 전현을 덮쳤으니.
천둔검법.
여동빈의 천둔검법이, 천무백에 의해 오로지 그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천무백의 천둔검법이었다.
* * *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은 엉망진창으로 부서지고 파괴된 비무대를 바라봤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며 간신히 비무대 양편에 걸친 전현과 국보.
둘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떨리는 시선이 비무대의 정중앙.
고개를 좌에서 우로 꺾으며 칼을 거둬들이는 천무백에게 향했다.
지독한 침묵이 가라앉은 사이.
천무백의 목소리가 파문처럼 퍼졌다.
“선공은 양보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