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8화>
78. 야, 니들 형 나오라고 해.
“이 무슨?”
전현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단 일격.
한 번의 공격에 종남의 제자가 무력화되었다.
단순히 쓰러진 게 아니다.
싸움 중에 쓰러지고 바닥을 구르는 건 흔한 일이다.
거기서 다시 일어나서 싸우는 게 바로 무인이다.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검을 잡는 게 강호의 무인이다.
한데 종남은 일어나지 못했다.
배를 부여잡은 채 게거품을 문 제자의 얼굴에 드러난 건 극명한 고통, 또는 좌절이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상처.
죽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겨지지 않을까.
“이노오오오오옴!”
바로 뒤에서 어마어마한 고성이 터졌다.
전현은 그제야 지금 쓰러진 제자가 바로 삼보진인 단후의 제자임을 깨달았다.
“단전을 깨뜨리다니! 이 간악한!”
단후가 당장이라도 뛰쳐 갈 듯 새하얀 수염을 부르르 떨렸다.
그랬다.
단전이 깨진 게 분명했다.
무인에게는 치명적인,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상처.
제자를 끔찍이 여기는 단후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었다. 그의 주위로 기류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바로 앞에 있던 일대제자들의 얼굴이 모두 새하얗게 질렸으니까.
비단 그뿐만 아니다.
다른 관중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아득한 분노가 향한 천무백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하나 천무백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세안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가 규칙을 어겼소? 아니면 진검을 썼소?”
좌중이 침묵에 가라앉았다.
* * *
“걱정 마. 단전은 안 깨뜨렸으니까.”
천무백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인 화산 무인을 바라봤다.
“다만, 고통이 좀 클 거다.”
천무백이라고 악독하겠는가.
종남과 척을 진 것도 없고, 전생의 악연도 없다.
뭐, 굳이 따지면 정마대전 때 숨죽여 있다가 막판에 이길 것 같으니까 숟가락 얹은 거?
‘생각해 보니 그건 좀 기분 나쁘네.’
그래서 그때 종남파 장문인을 뒤지게 패 준 기억이 있긴 하다만…….
더 세차게 패줘야 했지 않았나 싶었다.
뭐 그건 따지고 보면 억지고. 또 지금 비무대에 올라온 놈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아닌가.
천무백이 저 어린 무인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단전을 깨뜨리겠나.
그냥 종남이 지금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심술 좀 부렸다.
굳이 따지면 능허와 싸우면서 같잖은 짓을 한 오광룡을 패 주고 싶었지만.
그건 능허가 대충 했으니까.
내가중수법을 활용해 상대의 단전을 직접 타격했다. 다만 힘을 분산시켰다.
깨지진 않았지만 격한 고통에 당분간 내공운용이 힘들 정도로 내상을 입었다.
겉보기엔 단전이 깨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리라. 단순한 내상이라고.
하지만 심리적인 고통은 단순하지 않으리라.
실제로는 아니라 해도 본인이 느끼기엔 단전을 잃었다고 느낄 정도로 압박감일 테니까.
일종의 경고였다.
마음만 먹으면 단전을 다 깨부술 수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의미.
슬쩍 단후의 반응을 보니, 경고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그쪽도 걱정하지 말고.”
천무백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화산 제자를 향해 검을 겨눴다.
“마저 끝내지?”
“……백공이라고 합니다. 한수 부탁드립니다.”
“응. 그래.”
백공은 깊게 심호흡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명 두려움이 깃들어 있지만 냉정해진 눈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화산이 좀 더 낫군.’
굳이 따지면 그랬다.
무공의 수준 차이를 떠나서, 눈에서 드러나는 인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검을 드는 자세라고 해야 할까.
일전에 본 청현진인이나 매화일검부터, 지금 눈앞의 백공까지.
모두 검을 수양의 하나로써 잡았다.
그랬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욕심은 낼지언정,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무리한 짓을 하진 않는다.
세속적일지언정 세속에 완전히 물들진 않는다.
검문으로서 이름을 떨칠지언정, 도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종남과 화산의 차이겠지.’
종남은 구파일방에 이름을 올리고, 빠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에 반해 천무백은 숱한 전생을 살아오며 화산이 구파일방에서 이름이 빠진 적이 없음을 똑똑히 기억했다.
“후배가 선공하겠습니다.”
어, 후배였나?
배분으로 따지면…… 백공이 지금 자신보다 나이가 대여섯은 많은데.
한데 천무백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건 비무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결과는 같았으니까.
빠각!
“……!”
백공은 충분히 매서웠지만, 천무백은 가볍게 공격을 흘려보낸 뒤 목검을 후려쳤다.
“허.”
“내공이 실린 검을 저토록 쉽게…….”
부러진 검을 보며 백공은 침음을 삼키곤 포권을 취했다.
그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니, 고작 일합만에 무너진 패배를 인정하기 힘겨워 보였다.
때문일까. 천무백은 한마디 조언을 던졌다.
“제가 졌습니다. 소협.”
“검로가 너무 일정하오.”
“네?”
“나였으면 검에 힘을 뺏을 것이오. 첫 공격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고 마음먹은 게 실책이오. 사람이 검을 휘둘러야지, 검에 사람이 휘둘리면 되겠소?”
“…….”
백공은 쉬이 이해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이것이 중요한 조언임은 깨달았다.
그는 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종남과 화산의 확연히 다른 대우.
화산파는 일전에 능허가 보여 준 모습과, 지금 천무백의 태도에 감명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제자가 단전이 깨졌다고 확신한 종남파는 당장이라도 천무백을 죽일 것처럼 요동쳤다.
‘경고가 한 명으로는 안 되나.’
그럼 뭐.
“빨리빨리 나오쇼. 한 판 더 붙게.”
먹힐 때까지 해 줘야지.
* * *
“적유야.”
“네. 장로님.”
“침착하라, 그리고 냉정해라.”
“예.”
“놈은 강하다. 절대로 경시하지 마라.”
세 번째 비무전에 나설 종남측 무인은 사적유였다.
일전에 천무백에게 대차게 깨진 그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대제자 중에서 맏이의 역할을 하는 만큼, 사적유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격하게 흥분하진 않았다.
종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도 어찌 됐던 실력이 있어서다. 사적유는 전현 다음으로 일대제자 중에서 가장 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그는 비무장에 오른 채 천무백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네놈 단전도 처참하게 부숴 주마.”
“……어. 그래.”
음, 그래.
근데 나 하단전 없는데. 내 단전 깨려면 머리통을 깨야 하는데. 죽이겠다는 뜻인가.
“이보시오, 선 공자, 그쪽도 선근경을 가져가야 하니, 우리 협력합시다.”
사적유는 대놓고 화산파 무인에게 협력을 제안했다.
화산파 무인은 멈칫했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의가 가득했으나, 여기서 진다면 천무백이 2승, 화산은 1승에 불과하다.
천무백에 대한 화산의 호감은 둘째치고, 우선 승리해야 하지 않은가.
사적유뿐만 아니라 그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매화일검 국보가 올라오지 않는 이상 천무백은 이기지 못한다고.
남은 건 결국 협력뿐이라고.
“일전에서 광룡이가 보여 준 행동은 내 개인적으로 사과하리다. 나는 그런 짓 하지 않겠소. 막말로 우리 둘이 힘 합치고 이놈 잡고 난 후에 결판냅시다. 내 명예를 걸겠소.”
“으음.”
화산 무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은 그 광경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상황 판단은 좋은 놈이구나, 너.”
천무백은 그 광경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협공을 제안하는 전향적인 자세도 꽤 괜찮다.
오히려 여기서 화산보단 낫다.
화산은 명분과 명예를 중시하다 보니 저런 제안도 쉬이 내놓지 못하지 않은가.
한 사람을 두고 둘이 공격한다는 건, 정말 그만큼 자존감을 내팽개치는 행동이니까.
사적유가 진지한 얼굴로 목검을 겨누었다.
그래, 종남이 소림이나 화산처럼 정파다운 놈들이 아니긴 하지만.
이런 융통성이 이들을 이만큼 만든 거겠지.
나름 괜찮은 놈들…….
“천하의 악적 같으니!”
“어?”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린 제자의 단전을 부수고 무(武)에 대한 꿈을 짓밟다니. 부끄러운 줄 알거라!”
너희는 화산 애 머리통을 깨려고 했잖냐.
“내 반드시 네놈의 단전을 깨부수고 벌벌 기게 해 주마!”
거 참.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덤벼라, 어서. 선공은 양보해 주마.”
“흥. 네놈이 대단한 놈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명문정파의 깊음을 이기지는 못한다. 네놈 단전을 반드시 부숴 주마.”
거, 그거 대가리 깬다는 말이라니까.
“그러면 뭐, 나도 그렇게 해 주지.”
순간 낮게 깔리는 천무백의 음성에 사적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만 비무전을 시작하겠소.”
마침 학노가 끼어들었기에 망정이었지, 사적유는 짧은 순간 움직이지 못했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으니까.
하나 사적유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목검을 겨누었다.
괜히 일대제자 중에서 전현 다음이란 말이 나오는 게 아님을 증명하는 듯.
자세는 일정했고 완벽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애석하게도 천무백에게 자세 좋은 거로 승부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사적유가 곧장 검을 찔러가며 쇄도했다.
“어?”
사적유의 예상은 두 가지였다.
반격하거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한데.
‘몸을 돌려?’
완벽히 뒤돌았다. 자신의 공격은 신경도 안 쓴다는 것처럼.
하나 그때 불쑥 역수로 쥔 천무백의 왼손이 등 뒤로 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반대편에 있던 화산 무인에게 오른손의 목검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따당, 땅!
“……!”
막혔다.
등 뒤를 노리는 공격이 막혔다.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역수로 쥔 채 등 뒤로 불쑥 튀어나온 검이 사적유의 공격을 다 쳐냈다.
동시에 반대편에 있던 화산무인을 향해 검이 휘둘러졌다.
빠악!
“컥!”
첫 번째는 무릎 뒤를 때려 하단을 무너뜨렸다.
뻐억!
둘째로는 흔들리는 사이 손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목검이 저 멀리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찰나였다. 고작 사적유가 단 한 번의 공격을 시도한 짧은 시간.
천무백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와 사적유의 눈과 마주쳤다.
“이제 일대일이다?”
왜일까.
몸이 소름이 확 올라오는 이유가.
저 말 때문에?
아니면 왼쪽, 오른쪽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무수한 검영(劍影)에?
천무백의 쌍수검이 동시에 휘둘러졌다.
막을 수 없다.
하나는 막더라도 하나는 당한다. 두 개 다 막을 수 있지 않다.
아니, 둘 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만이라도 막을 수 있겠는가? 전혀.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빠각, 빠악!
어깨를 때리고, 하단을 후려치고.
사적유가 검을 떨어뜨리듯 크게 흔들리며 무너졌다. 한데 이상하게도 손에서 검이 떨어지질 않는다. 마치 무언가의 힘이, 그러니까 외기가 억지로 검을 손아귀에 머무르게 한 듯한 괴상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리를 처맞았나.’
그게 말이 되는가.
천무백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말 그대로 후려 팼다.
저 멀리서 지켜보던 곽천후가 자신이 처맞던 꼴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이렇게까진 하려고 하진 않았는데.”
온몸에 전해지는 아찔한 충격.
검은 떨어지지 않아 실격패도 안 된다. 그렇다고 실신하지도 않는다. 그 괴현상에 경악한 사적유는 급히 입을 열었다.
“항, 항…… 끄억!”
“닥쳐”
항복이란 단어가 채 나오기도 전에 천무백의 지독한 폭력이 쏟아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끝내 천무백이 단전을 가격하고 사적유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뚝 떨어질 때야.
천무백은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저 멀리.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국보와.
붉어진 얼굴로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전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니들 형 나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