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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77화 (77/318)

<검신재생 77화>

77. 규칙 위반은 아니잖아?

능허는 비틀거렸다.

유청학의 공격은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물론 능허가 제대로 막거나 피하려 했으면 충분히 이겨 냈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능허는 그러지 않았다.

“썅. 이 새끼야. 흑도가 뭐가 좋다고, 흑도처럼 행동하냐? 어?”

능허는 쓰러진 오광룡을 툭툭 쳤다.

그러자 종남측에서 반발이 터져나왔지만, 능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곽천후와 천무백.

특히 천무백과 눈을 마주친 능허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면 죽인다고 했던 거 같은데…… 설마 죽이겠어?”

털썩!

능허는 그렇게 쓰러졌다.

무리하게 방어를 도외시하고 오광룡을 공격하느라, 유청학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던 터.

지금껏 서 있던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제 일전은 화산 유청학의 승리입니다!”

유청학은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능허를 등에 업었다.

“의약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비단 유청학뿐만 아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무림인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봤다.

오광룡은 흑도나 할 짓을 저질렀다. 사실 그건 살초였다.

진검이었다면 머리통이 꿰뚫렸을 것이다. 목검이라고 다행인 게 아니다. 유청학이 당했다면 뇌에 심각한 충격을 줬을 터. 하면 회복이 제대로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걸 눈치채고 자기 몸을 도외시했단 말인가.”

화산 측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과연……. 천룡검협이 협객이라더니, 같이 다니는 자 역시 협객이로구나.”

천무백이 들었다면 파안대소했을 얘기였지만, 화산파 무인들은 정중하게 합장하며 능허를 의약당으로 옮겼다.

* * *

“……분위기가 좋지 않군요.”

전현은 미간을 좁혔다.

화산과 종남을 응원하던 분위기가 딱 절반씩 비등했다.

하나 방금 첫 번째 경기로 분위기가 확 변했다.

대놓고 쳐다보는 이는 없지만, 흘깃흘깃 향하는 시선에는 다소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별수 있겠느냐. 광룡이가 너무 의욕을 부렸어.”

삼보진인 단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의욕?

종남의 몇몇 제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걸 의욕이라고 포장한다고?

비겁한 짓 아닌가?

그런 제자들의 분위기를 느낀 단후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종리홍의 묵직한 말 한마디가 전해졌다.

“비겁하다고 느껴지더냐?”

“……!”

“하지만…….”

종리홍이 콧방귀를 끼었다.

“흥. 다소 어설프긴 했지만, 광룡이는 개인의 명성이 아니라 문파를 택했다.”

문파를 택했다고?

이게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종리홍의 표정은 그런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적어도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종남은 화산을 이기지 못했다.

정마대전의 피해를 보고도 화산은 화산이었다.

종남은 섬서의 2인자에 불과했다.

하나 40년간 간극은 좁혀졌다.

그 과정을 모두 보고 몸으로 느낀 사람이 바로 종리홍이었다.

그가 느낀 바는 딱 하나였다.

‘화산의 방식으론 화산을 이길 수 없다.’

종남에겐 종남만의 방식이 절실했다. 화산 같은 고루한 방식으로 화산을 뛰어넘는다?

뛰어넘을 수야 있겠지.

다만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문제는 화산이다. 화산은 가만히 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화산은 정마대전 때의 모든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고 다시 날아오를 게 분명하다.

지금이 기회다.

종남이 화산을 넘어설 기회.

선근경은 그 발판이 될 게 틀림없다.

‘단순한 정통성이라고?’

종리홍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그에게 굳이 정통성만 입증하는 고작 도경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절세의 비급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 선근경은 단순한 도경이 아니다.

화산은 전진교의 먼 방계라, 그저 선근경을 모셔 놓고 있다.

‘멍청하게도. 그걸.’

종남은 전진교의 직계다. 화산은 모를 비사가 종남파에게는 전해져 왔다. 당연히 그중에는 선근경에 대한 비사도 있었다. 비단 선근경뿐이랴. 전진 성물들에 대한 비사는 한둘이 아녔으니까.

종리홍이 선근경을 가져가려고 마음먹은 건, 그 비사를 알고 있고, 그것이 절세의 비급 이상의 가치를 지녔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면 뭐가 문제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선근경을 가져가 정통성을 세워야 한다.”

묵직한 말이 전해지자, 입술을 깨물던 제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감히 대장로에게 반발하는 일대제자라니.

쉬이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제자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겨서 선근경을 가져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섬서 무림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짓이 과연 정도무림입니까?”

“이놈!”

전현이 눈을 치켜떴지만 종리홍이 손을 휘저었다.

일순 기세가 파동치며 그사이를 갈랐다.

단숨에 좌중을 침묵케 하는 힘.

전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종리홍을 올려봤다.

종리홍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의 눈에 가소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평판? 명분? 그딴 게 무슨 소용이냐.”

“……!”

“고작 섬서무림의 평판과 시선이 두렵더냐?”

모두 침묵했다.

종리홍의 눈에는 언뜻 광기처럼 보일 정도로 폭급함이 비쳐졌다.

“우리는 중원에 이름이 자자한 종남이 되어야 한다. 과거 소림이 그랬고, 화산이 그랬고 무당이 그랬듯이. 고작 섬서 무림이 아니라!”

“……!”

도저히 형언하기 힘든 기세가 종리홍에게 흘러나왔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반발했던 일대제자를 바라봤다.

일대제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시선.

어린 시절 종남산에 오르기 전, 마주친 맹수의 눈빛이 저러할까.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평판? 시선? 그딴 건 필요 없다. 우리가 선근경을 차지하여 대내외적으로 정통성을 입증하면, 전진교가 남긴 모든 것의 적법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아…….”

“강해지면 그만이다. 무림은 힘으로 명분이 생기고 힘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는 법. 우리가 섬서무림을 대표하여 우뚝 서면, 지금의 평판과 시선?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강호가 아니던가.

칭송받는 화산도 그 유서 깊은 역사 중에 제법 큰 실수를 한 적도 있다. 같은 정파인에게 누명을 씌운 적도 있다.

하나 지금 화산을 아는 이중에 그런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완전무결한 정도 문파는 없다.

종리홍은 지금의 평판이야 훗날 기억도 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알았다.

그것이 강호니까.

하니 종리홍은 당당하게 말했다.

“무슨 수를 써도 좋다. 우리가 선근경을 차지한다.”

더는 반발이 없었다.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한 종리홍의 말이다.

누가 거스르겠는가.

적어도 종남 안에서는 없다.

하지만.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미친놈이 하나씩 있는 법이다.

* * *

“저 미친놈 새끼.”

갑작스레 미간을 확 좁히는 천무백에게 곽천후의 시선이 꽂혔다.

그의 시선에 담긴 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감정이었다.

천무백이 그 시선을 못 느꼈을 리가 없다.

“뭐.”

“능허 저 양반 열심히 싸웠다. 단순 건달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협객의 기질이 있다. 근데 졌다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건 좀…….”

천무백은 눈을 끔뻑거리며 곽천후를 쳐다보다 이내 탄식을 터뜨렸다.

“내가 그 정도로 능허를 못 살게 구는 놈처럼 보이냐?”

“응? 아닌가? 저번에 못 이기면 죽인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만하니 싸운 놈에게 내가 욕을 할까.”

곽천후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천무백으로서는 자신이 능허를 그렇게 막 대했는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답은.

“지랄. 그 새끼가 나한테 하는 짓 보면 살려 둔 것만으로도 내 안에 부처가 있다.”

“…….”

곽천후의 눈빛이 한층 더 미친놈 보는 것처럼 변했지만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누구한테 한 욕이야?”

“저기 종남 놈들.”

“미친놈들 맞지. 비무전에서 저렇게 비겁한 수를 써?”

“그것뿐만 아니다. 저 새끼들. 아주 당당해.”

“으음?”

“뭐? 이기고 강해지면 잊힐 거라고?”

천무백의 말에 곽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뭔가 계산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며 가늠하더니.

이내 귀신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저 거리에 있는 놈들 목소리가 들렸다고?”

“넌 안 들리냐?”

“아니…….”

“어휴. 같이 있는 놈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니.”

저게 들리는 네가 이상한 거야 미친놈아.

곽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수십 장이 뭔가 수십 장이. 완전 대각선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있는 종남이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고?

그것도 저들이 큰 소리로 얘기했겠는가?

소곤대듯이 중얼거렸겠지.

곽천후는 살짝 미심쩍은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하나 이어지는 상황은 생각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산은 오광룡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종남의 반응은….

“규칙을 어긴 적은 없소. 우리가 진검을 썼소?”

“……!”

그 뻔뻔한 반응에 좌중은 탄식을 터뜨렸다.

하나 모두가 종남을 욕한 건 아니었다.

정파인이라고 모두 고루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종남의 당당함을 이해했다.

말만 비무전이지, 애당초 서로 중요한 물건을 두고 다투는 싸움이 아닌가.

오히려 이걸 친선 비무처럼 행동하는 화산파의 행동이 영 아니라는 여론도 분명 존재했다.

“크. 어마어마하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뭐 지들이 그렇다는데, 나도 규칙만 지키면 문제없는 거겠지.”

중얼중얼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천무백을 보고 곽천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야. 내 차례인데?”

“아니. 천후야. 넌 쉬어라.”

“뭐……?”

원래라면 곽천후가 나갈 차례였다.

한데 천무백이 지금 나간다고?

그럴 리가.

곽천후가 본 천무백은 놀랍도록 치밀했다.

마음대로 행동하는가 싶어도, 그 안에는 계획이 있었다.

한데 천무백이 자신이 세운 계획을 깨고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럴 위인이 아닌데?’

그는 천무백의 눈을 쳐다봤다.

‘……뒤집혔다?’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

“이 새끼들이. 나만 팰 수 있는 새끼를 두들겨 패?”

“…….”

“어디 한번, 오늘이 잊히나 보자고.”

곽천후는 침묵했다.

* * *

천무백은 비무대에 올랐다.

넓디넓은 비무대.

패배 조건 중 하나가 이 비무대를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원형의 비무대는 상당히 넓었으니까.

‘그럼 또 뭐가 있더라.’

더는 싸울 수 없는 상태면 패배.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진검이 아니라 목검이리라.

하긴, 천무백은 이해했다.

걸린 게 있는 만큼 진검으로 했다간 누구 하나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화산과 종남은 서로 피를 갚아야 하는 원한을 갖게 된다.

결국, 상대를 죽인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

비무전이 아닌가.

‘능허놈, 잘 버티긴 했어.’

몸이 꽤 진탕됐으리라. 죽진 않지만 제법 요양이 필요할 터.

정말 딱 죽기 직전의 몸상태였다.

천무백의 눈이 무심하게 비무대를 올라오는 이들을 향했다.

종남파와 화산파.

그중 천무백의 시선이 종남에게 향했다.

‘강하면, 지금의 평판도 잊혀진다라…….’

천무백은 종리홍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솔직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리 거대 명문정파여도 교만한 적이 있고, 실수한 적도 있다.

당시 평판에는 치명적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금 정파라고 칭송하지 않는가.

그럴 수 있는 이유?

바로 힘이다.

중원이기 때문에. 여기가 강호이니까.

오히려 그래서.

“잊히지 않을 거다.”

“……뭐?”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천무백의 목소리에 종남파 무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희는 절대로, 나보다 더 강해지지 못할 거거든.”

적어도,

자신이 이 강호에 있는 이상.

콰득!

천무백의 몸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

기세 좋게 모습을 드러내던 종남파 무인이 배를 부여잡고 실신했다.

단 한 번.

단전을 찌르는 날카로운 일점.

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모두가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단전을 향해 쏟아진 정확한 공격.

‘죽이지 않는다는 게 규칙이었지, 죽기 직전으로 만드는 게 규칙 위반은 아니잖아?’

천무백의 입가에 새하얀 미소가 떠올랐다.

강호의 숱한 역사 중, 사라진 역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않는 역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당대의 천하제일 고수.

그 고수의 행적은, 수십, 수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곳. 오늘 화산과 종남, 그리고 천무백의 비무전.

“내가 있었던 곳이니까.”

끊임없이 얘기되고 기억되리라.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잊히지 않는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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