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6화>
76. 독안사 능허
“거, 혈귀곡 놈들 잡으라고 닦달할 땐 언제고. 왜 이런 싸움에 끼어들었대.”
임홍은 준비된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를 따라온 수하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섬서 무림이 다 온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지. 종남과 화산의 비무전. 사실 둘이 지지고 볶았지만 실제로 부딪치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니냐.”
“저 어릴 때만 해도 화산이 최고였고 종남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화산에 미치지는 못했는데 말이죠.”
“다 옛날이다. 정마대전에서 그 손해를 입고도 오히려 이 정도로 건재함을 자랑하는 화산이 괴물 같은 거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수하의 질문에 임홍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무전의 향방.
솔직히 말해 쉬이 예상되진 않았다.
그러나 임홍은 하오문 섬서분타주다.
적어도 섬서무림의 동향은 빠삭하게 알고 있다. 당연히 섬서 무림인의 무공 수위 역시 아주 잘 알았다.
“원래대로라면 화산의 신승이겠으나…….”
청현진인이 아마 종남의 삼보진인은 이길 테고.
나머지 일대제자 중에서 한 명은 확실히 이기고, 나머지 하나도 반반이다.
매화일검 국보와 종남풍검 전현의 대결이 오리무중이었다.
국보가 이기면 화산이 3대 2로 간신히 신승을 거두리라.
그것이 임홍의 예측이었다.
화산에서는 대놓고 관중들을 받았고, 여기 모인 무림인들도 임홍과 비슷한 예측을 내놨다.
또 도박 좋아하는 중원 사람들답게, 이런 일에 한푼 두푼 내기가 걸렸다.
대체로 화산의 신승과 종남이 이길 확률도 절반은 된다.
이 정도가 일반적인 여론이었다.
다만.
“천룡검협, 저 양반이 있단 말이지.”
변수의 등장.
천룡검협이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모르는 사람은 왜 천룡검협이 끼어들겠냐 하겠지만, 이미 그간의 사정이 다 알려진 이후다.
오히려 사람들은 천무백에게 감탄을 터뜨렸다.
“미친놈 아닙니까?”
“명분으로 보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긴 해.”
“그렇다고 진짜로 소유권 주장하면서, 화산과 종남을 상대로 한판 뜨자는 놈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있잖냐. 천무백…….”
“이야. 진짜. 배포 하나는……!”
수하가 혀를 내둘렀다.
보아하니 연단에 모인 사람 중 대체로 젊은 축은 은근히 천무백을 응원하고 있었다.
정마대전 이후 평화롭기 짝이 없던 강호.
그동안 나타난 후기지수는 너무 뻔했다.
남궁세가 대공자라거나, 화산의 매화일검이라거나, 종남의 종남풍검이나…….
무당의 장 씨나 제갈의 둘째 여식까지.
모두 명문정파에서 나고 자란 정통적인 절차를 밟은 딱 그런 유형 아니던가.
“중경성의 투귀가 좀 남다르지.”
“남만의 야수는 어떻고?”
“그래. 그 친구들은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쪽들도 쟁쟁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건 맞잖아? 가문의 비전을 익히면서 영약으로 밥 먹고 난 놈들이란 말이지.”
그랬다.
지금 강호의 후기지수라면 다 무언가 톡 튀는 게 없었다.
하나 천무백은 달랐다.
표국의 막내아들이라는 특별할 것 없는 집안.
그러나 이어지는 파천황적인 행보.
소림을 구하고 화산과 종남, 두 거대문파를 함정 속에서 구해 냈다.
이것만 해도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인데, 이후 알려진 소식에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하남 봉구현에서 양민들을 괴롭히던 흑도들을 홀로 때려잡은 진짜 협객이고.”
“역병에 걸린 이들을 그냥 두지 못하는 신의라.”
“세상에. 이런 협객이 나타나다니.”
그간 천무백의 행보가 그러했다.
하니 중인들의 시선에서 천무백은 정말 그들이 이야기로만 접했던 협객의 모습 그 자체였다.
더구나 홀로 화산과 종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두 거대 문파를 상대로 싸우는 배포에 사람들은 더 환호했다.
“난 천룡검협이 이길 수 있다고 보오.”
“아니, 이기면 좋겠군.”
“화산과 종남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지만……. 그 협객이 선근경을 원하는 건, 정말 필요할 곳에 써야 하는 것 때문 아니겠소?”
“그래. 그럴 거요. 협객이 제 욕심에 두 문파와 싸울 리는 없지.”
“천룡검협이 이기면 좋겠군!”
젊은 무인들은 그야말로 천무백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했다.
“흠. 야.”
“네, 분타주님.”
조용히 상황을 보던 임홍이 말했다.
“우리 돈 얼마 갖고 왔냐?”
“어…… 제법 갖고 있습니다.”
“너 형 믿지?”
“예?”
“천무백이 이기는 거에 다 걸어라.”
“……엑?”
“아니, 여기 화음현에 있는 재산 싹 다 걸어.”
“미치셨습니까?”
임홍이 콧방귀를 끼었다.
“이렇게 대놓고 돈 벌 기회가 있는데 가만히 있으랴?”
“아니…….”
그때였다.
“어허. 이거 그럼 나도 천룡검협에게 돈 좀 걸어야겠소.”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임홍이 흠칫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옆에 추레한 차림새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거지?’
순간 임홍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하오문의 분타주가 직접 투자할 정도면, 나도 오랜만에 거지새끼들한테 밥 한번 먹일 수 있겠구먼.”
임홍은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허리춤에 맺어 있는 삼결(三結)을 보고 임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방이었다.
* * *
“이번 비무전은 유례없는 삼파전(三巴戰)인 만큼 앞서 간단한 규칙을 얘기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이는 섬서 무림에서 제법 명성 높은 학노(學老)라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유학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섭선에 마인들 머리통이 여러 번 깨졌다는 흉악한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첫 번째 비무는 각 문파의 일대제자 배분에서 비무하겠습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무기를 들 수 없는 자, 원형의 연무장을 벗어나는 자, 더는 싸울 수 없는 자는 패배입니다. 단지 불살(不殺). 절대로 상대의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세 명 중 단 한 명만이 승리를 가져갑니다.”
학노는 섭선을 펼치더니, 이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일-전(一戰)!”
종남에서는 일대제자 오광룡이, 화산에서는 천무백도 몇 번 마주쳤던 유청학이란 청년이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과연.”
“화산과 종남의 기재들이라더니.”
그에 반해 천무백 측에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능허였다.
능허가 등장하자 주위 분위기가 묘해졌다.
“저자는?”
“천룡검협과 같이 다니는 자라 하던데…….”
“흐음. 나이가 좀 많아 보이오만?”
“일대제자 배분이라 하지 않았소?”
“나이는 많지만, 무공 연원은 짧을 수도 있겠지.”
“보아하니 흑도 같은데?”
“흑도?”
“걷는 자세나 인상을 보시오. 또 자세는 어떻고?”
“허…… 흑도라니.”
“거참.”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데도 능허는 뻔뻔한 얼굴로 자리에 섰다.
세 명이 삼각형 모양으로 섰다.
오광룡과 유청학은 서로를 노려보다 이내 능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뭘 봐, 확! 그냥 마.”
“…….”
“허.”
유청학은 그저 미간을 좁혔을 뿐이었지만 오광룡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온 것이오?”
유청학은 오광룡의 날카로운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 능허는 뭔 개가 짖냐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여긴 화산인데, 넌 종남 새끼가 뭐 하겠다고 기어 들어왔냐?”
“뭐, 뭣이?”
“풉.”
한 방 제대로 먹은 오광룡이 붉어진 얼굴로 검집을 잡았다.
“남은 팔 한쪽도 잘라 주지.”
“이야. 무게중심 맞춰 주려고? 이거 고마워서 어쩌냐. 나도 그럼 네놈 어깨위에 있는 거 잘라 내서 무게중심 맞춰 주마.”
오광룡은 붉어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흑도판을 굴러다닌 능허의 화법을 애송이인 그가 어찌 이기겠는가.
그 모습에 능허는 제법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천무백 그놈이 제 나이 안 맞게 이상한 거지.
‘그래도. 이거 조심해야겠군.’
능허는 오광룡과 유청학을 바라봤다. 둘 다 내뿜는 기도가 평범치 않았다.
천무백을 만나기 전 능허였다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랴.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식으로 회피했을 놈들이다. 진흙탕 싸움으로 가면 이길 자신은 있지만, 그렇다고 싸우고 싶은 놈들은 아니다.
‘보아하니, 두 놈이 동시에 덤빌 거 같은데.’
아마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능허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니 변수가 될 수 있는 능허를 먼저 쓰러뜨리고자 하리라.
시작 전, 오광룡과 유청학의 눈빛이 서로 얽히는 걸 보고 능허는 짐작했다.
‘썅. 요즘 새끼들은 하나같이 어른 공경을 안 해요.’
능허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학노는 여기서 배분만 따지면 대장로급이었지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학노가 한 발짝 물러서며 소리쳤다.
“개-전(開戰)!”
파앗!
외침과 동시에 오광룡이 바닥을 박찼다.
그야말로 가공할 속도로 능허에게 쇄도했다. 좌에서 우로 허리춤을 깔끔하게 베어내는 검격.
능허도 곧장 반응했다.
막지 않고 몸을 살짝 비틀며 검을 흘려보냈다.
그때, 우측에 있던 유청학이 하단을 노리고 검을 일직선으로 찔렀다.
“쓰발!”
능허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동시에 이어지는 연속 공격.
더구나 능허는 팔 한쪽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한마디로 공격 하나는 막더라도, 하나는 피해야 한다.
말이 쉽다.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쉽게 끝나겠군.”
“역시, 천룡겁협 말고는 볼 것 없겠어.”
“그냥 천룡검협 혼자 총 다섯 번 싸우기 힘드니 내세운 거 아니겠소?”
“그러게 말이오.”
지켜보던 이들이 김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 이내 그들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까가가강!
“……!”
막는다.
그리고 반격한다.
단순한 표현이었지만 능허는 착실하게 그것을 해냈다. 막았고, 피했고, 반격했다.
비무전이라 당연히 목검이다. 한데 능허가 휘두르는 검에선 진검보다 더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강렬하고 화려한 변초 따위는 없다. 대신 빠르고 날카롭다. 지독할 정도로 호전적이다. 하나하나의 검영(劍影)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미친 듯이 쏟아진다.
“저, 저런!”
“어떻게 저럴 수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능허는 충분히 잘 싸우고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하나……. 천무백은 혀를 쯧 찼다.
‘그래도 선방하군.’
만일 일대 일 비무였다면 능허가 압승했으리라.
하나 양쪽에서 들어오는 매서운 공격을 막고 반격하는 과정에서 능허의 몸이 타박상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내공이 담긴 공격에 당한 타박이다.
몸에 점점 심한 부담을 주고 있으리라.
저걸 끝내려면 능허가 어디든 한쪽을 끝장내야 한다.
그러나 물 흐르듯이 쏟아지는 공격에 그러긴 쉽진 않았다.
천무백의 생각을 반영하듯, 능허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썅.’
능허는 최선을 다했다.
진각을 밟고 검을 쏟아 낸다. 비틀거리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피하지 못하면 몸으로 버텨 낸다.
손목에 전해져오는 충격이 뼈마디를 틀어 버리고 기운이 내부로 침투해도 버텨 낸다.
‘검을 쏟아 낼 땐 몸은 가볍게, 하나 마음은 진중하게.’
천무백이 가르침을 줄 때마다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몸은 가볍게.’
마치 허공을 걸어 다니듯, 가볍게 뛰어오르며.
‘마음은 진중하게.’
이번 검초가 실패해도 흔들림 없이 다음 검초를 준비할 수 있게 마음은 진중하게.
‘하체는 단단하게, 무게중심은 자유롭게.’
흔들리지 않게 하체를 굳건하게 하고.
상대의 공격에 맞춰 한쪽밖에 없는 외팔의 무게중심을 자유롭게 옮기며.
능허는 쏟아지는 공격을 막고, 또 반격하며 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막힌 벽이 꽝! 하고 우르르 무너지는 쾌감이었다.
그때였다.
유청학이 정면을 치고, 왼쪽에서 오광룡이 공격을 점해 온다.
능허는 정면의 유청학에 더 무게중심을 뒀다. 몇 번 부딪쳐본 결과 유청학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특히 이번 공격은 능허의 얼굴이 아연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만일 진검이었다면 도저히 막을 엄두를 못 냈을 정도로 위협적인 공격.
‘이런! 옆에서도 공격…… 어?’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옆에서 들어오던 오광룡의 공격이 유청학의 뒤를 향했다.
‘이놈?’
능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청학은 현재 자신에게 필살의 한 수를 쓰는 중이었다. 한데 오광룡은 그런 유청학의 뒤통수를 친다.
즉 유청학에게 자신이 당하는 사이, 유청학을 동시에 처리하려는 속셈.
오광룡의 눈을 본 능허의 얼굴이 굳어졌다.
“썅. 정파 놈이 어디서 흑도싸움을 따라 해?”
능허의 칼이 빙그르르 돌았다.
“어?”
공격하던 유청학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막지 않아?’
그제야 유청학은 뒤에서 쇄도해 오는 오광룡을 인식했다.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검을 거둬들일 순 없다. 이미 늦었다.
그는 패배를 직감했다. 오광룡은 손도 안대고 능허와 유청학을 동시에 끝내려는 속셈이었다.
콰득!
어딘가 뼈 하나는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파열음.
그러나…….
“응?”
전해지는 충격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목검은 능허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단전에 가하는 직접적인 충격이다.
능허가 비틀거렸다.
유청학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하고 물러섰다.
능허의 일격에 목젖을 얻어맞은 오광룡이 게거품을 물며 쓰러져 있었다.
그 위로 능허가 웃음을 흘렸다.
지독한 독기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나 능허야.”
능허가 웃으며 칼을 바닥에 짚으며 비틀거렸다
“독안사 능허라고. 이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