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5화>
75. 나도 마찬가지.
“그래서 비무전을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현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비교적 오만한 성정을 떠올리면 지금 전현이 보이는 모습은 확실히 이례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 있느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바로 전현의 스승이자 종남파의 육대장로 중 일인, 풍운검군(風雲劍君) 종리홍이었다.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한 종남의 실세.
가진바 무위는 섬서에서 한 손 안에 든다며 자부하고, 강호 전체를 통틀어봐도 백대고수는 당연히, 오십대 고수도 중인의 평가에 따라 바라볼 수도 있는 고수였다.
종리홍뿐만 아니었다. 바로 곁에는 종남파 장로 중에 가장 수위를 다투는 삼보진인(三寶眞人) 단후도 같이 있었다.
이들이 곧장 화산에 방문한 것이다.
종리홍은 제자, 전현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저들이 순순히 비무전을 받아들인 이유가 뭐겠느냐?”
“네?”
“막말로 저들은 버티면 그만이다. 아무리 종남이 강해졌다고 해도, 화산은 화산이다. 우리가 정면승부를 겨루지 못하는 걸 알고 있지.”
“…….”
종리홍의 말에 전현은 생각에 잠겼다.
하긴, 그랬다.
비무전을 제안하긴 했으나 저들이 쉬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이미 선근경을 확실히 보유한 화산이 아니던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전현이 종리홍을 바라봤다.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전현아.”
“네.”
“저들은 정당성을 얻으려고 비무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당성이요?”
“종남과 겨뤄 실력으로 선근경을 확실하게 차지했다는 걸 강호중원에 알려 더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할 속셈이지.”
“아…….”
“만일 종남이 지고 화산이 이긴 뒤. 훗날 무당과 곤륜이 소유권을 주장해도 화산은 말할 수 있다. 갖고 싶으면 비무를 통해 가져가라고.”
“음!”
“하나 화산이 어디 그리 만만한 놈들이더냐.”
맞다.
화산은 강하다. 비무전을 하자고 대차게 덤벼들 만한 문파는 얼마 없다.
선근경이 절세의 비급이면 모를까.
그저 정통성을 상징하는 도경에 불과하지 않은가.
무당과 곤륜도 충분히 탐을 낼만 하지만, 적어도 종남과 화산파 정도는 아니다. 종남은 자타공인 전진교의 후예이고, 화산도 은근히 전진교의 방계임을 자처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화산은 비무전에서 승리를 무조건 장담한다는 의미입니까?”
“이곳은 화산이다.”
종리홍이 말했다.
“장로급 배분 한명과 일대제자급 배분 네 명이라고 했지. 저들에겐 수호검 청현진인이 있다.”
“……음!”
“배분에 밀려 장로직에 머무르지만, 수호검이란 별호와 명성을 생각하면 그는 이미 오대장로 중 일인이나 다름없다. 장로급이라면 종남에는 너밖에 없지 않으냐?”
“아!”
“그래. 그리고 저쪽 일대제자 중엔 매화일검 국보가 있다.”
그러면 종남의 패배는 명확했다.
장로급 배분에서 전현이 청현진인을 이길 수는 없다.
정상적인 배분이라면 두 사람과 차이는 무려 두 개의 배분이니까.
하면 일대제자급에선?
솔직히 말해 국보는 전현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다.
그러니 국보 홀로 종남의 일대제자 넷을 상대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승자박이었다.
비무전을 통해 당당하게 선근경을 가져갈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종리홍이 자애롭게 웃었다.
“걱정 말거라. 그래서 내가 온 것이니.”
비무전 소식을 접하자마자 종리홍은 화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틀 밤새 경공을 펼치며 어마어마한 거리를 주파했다.
“우리도 최대한 유리하게 판을 짜야 하지 않겠느냐?”
“유리한 판 말입니까……?”
곁에 있던 삼보진인 단후가 끼어들었다.
“하여 몇 가지 방도를 생각한 게 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수호검을 상대하고, 네가 매화일검을 상대한다.”
“그 말은 곧…….”
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종남풍검 전현, 귀총에서 일대제자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장로직을 박탈한다.”
“……!”
종리홍이 말을 덧붙였다.
“엄연히 형식적인 일이다. 선근경을 차지하면, 그것에 대한 공로로 다시 장로직을 돌려줄 터이니.”
전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묘수였다.
삼보진인 단후도 만만치 않은 검객이다. 과거 문파간 교류전에서 청현진인과 대등한 싸움을 했던 적이 있는 게 바로 단후였으니까. 물론 그게 적어도 10년전 일이긴 하지만…….
“그럼 저는 반드시 매화일검을 이겨야겠군요.”
“자신 있느냐?”
“두려울 건 없습니다.”
종리홍이 흐뭇하게 웃었다.
“화산도 갑작스러운 장로직 박탈에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 그걸 생각해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종리홍은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한 이다.
그가 버티고 있으면 화산의 반발도 무마할 수 있다.
이리되면 종남도 할 만했다.
다만, 무언가 불안하고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화산의 반발? 종리홍이 무마해 주리라.
수호검 청현진인? 단후라면 적어도 반반의 확률이다. 접전이다.
이기면 좋고, 설령 지더라도 크게 문제없다.
‘내가 매화일검을 잡고, 사적유도 국보만 아니면 능히 일대제자 하나, 둘쯤은 이겨 낼 수 있다.’
그러니 적어도 5전 중 3승은 가능하다. 전현은 자신이 국보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단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확실하다.
한데 이 찜찜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현은 찜찜함의 원인을 찾았다.
‘천룡검협 천무백!’
놀랍게도 이 모든 계획은 천무백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천룡검협 말이냐? 흐음. 그자가 소문대로 그리 대단하더냐?”
“……못해도 저와 매화일검과 같은 정도입니다.”
“음.”
종리홍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면 삼파전으로 겨루면 되겠구나.”
“삼파전 말입니까?”
“그래. 세 명이 동시에 비무를 겨루는 것이다.”
“하면……?”
“한 놈에게 공세가 집중될 수도 있지.”
전현은 순간 멈칫했다.
삼파전의 비무전.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비무전이다.
“화산도 거절치 않을 것이다. 그들도 갑자기 끼어든 외부인을 달갑게 여기진 않을 것이고, 먼저 배제하자는 생각일 테니까.”
종리홍의 말에 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삼파전으로 가면 오히려 상황은 더 유리해질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전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함은 떨어지지 않았다.
* * *
“삼파전?”
소식을 전해 들은 능허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는 뭐. 우리 먼저 다 죽이고 시작하는 거 아닙니까?”
“수를 썼군.”
능허와 곽천후는 미간을 좁혔다.
어찌 됐건 화산이나 종남이나.
둘의 관점에서 천무백 일행은 달갑지 않은 외부 인사다.
그렇다고 무시하기 힘든 게 천무백의 명분이다.
귀총의 최초 발견자, 혈사문을 멸하고 중인들을 구한 은인.
충분히 선근경의 소유권을 주장할 만했으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비무전에 끼워 준 것이니, 화산과 종남은 어떻게든 천무백을 털어내고 싶으리라.
그렇게 나온 게 바로 삼파전이었다.
화산, 종남, 그리고 천무백 일행.
각자 한 명씩 나와 동시에 겨루는 방식.
즉 둘이 협력해 한 명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단 얘기다.
하면 아무래도 외부인인 천무백에게 공세가 집중되지 않겠는가.
천무백은 능허와 달리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는 무덤덤하게 검을 닦거나 조용히 내공을 운공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능허의 검을 봐주고, 때론 곽천후의 검도 봐줬다.
그야말로 천하 태평한 모습이었다.
“이대로 그냥 저들이 내세우는 방식대로 싸울 겁니까?”
능허가 답답한 기색으로 말하자 천무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뭐? 따로따로 싸우자고 할까?”
“그게 낫죠. 서로 돌아가면서 응? 비무라면 자고로 일대일 대결이 아닙니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다.
“비무는 일 대 일이지.”
서로의 무예를 견식하는 자리.
생사결이 아닌 비무는 일대일이 맞다. 그래야만 서로 무예를 견식하고 나누며 배울 수 있으니까. 본래의 비무가 그런 의미에서 착안한 개념이 아니던가.
“예. 가서 말 좀 해 보십쇼. 저 두 명, 동시에 상대 못 합니다.”
“왜? 좋잖아?”
“네?”
사실 천무백은 오히려 이번 삼파전 방식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서로 번갈아 가며 일대일의 비무전을 치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귀찮잖아.”
거기에 ‘비무’다.
상대를 해할 수 없는 비무.
그러니까.
“재미가 없잖아?”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능허가 말을 잃었다.
“삼파전은 비무가 아니지.”
정당한 비무라면 둘이 협력해 한 명에게 공세를 펼치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삼파전은 그러한 행동을 용인하고 유도한다.
즉, 이건 단순한 비무전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죽을까봐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가 없잖아?”
“……!”
천무백의 무덤덤한 어조.
하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백을 배제하기 위해 종남과 화산에서 쓴 삼파전이란 수법은 역으로…….
‘저들의 목을 조르겠군.’
* * *
‘단순 비무보단 낫겠군.’
천무백은 오히려 삼파전을 환영하는 태도였다.
천무백에게 공세가 집중되는 건 당연할 테고.
하면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원한을 사고자 상대를 굳이 죽일 이유도 없다.
천무백도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화산이야 소림과 달리 속세의 때가 묻었다고 해도, 중요한 일에선 협의(俠義)을 따르는 명문 정파다.
천무백도 굳이 척을지지 않은 이상 정파 무인을 죽여 원한을 사고 싶진 않았다.
종남이면 몰라도 화산은 더더욱.
하나 그래도 죽일까봐 손속에 자비를 두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종남이야 뭐, 딱히 원한도 은혜도 없고 인연도 별로 없지만.
종남풍검 전현이 하는 꼴을 보니, 어느 정도 혼쭐을 좀 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청현진인과 삼보진인이라.’
화산에선 청현진인, 종남에선 삼보진인.
천무백은 그 둘과의 대결을 기대했다.
둘 다 구파일방의 장로다.
가진 무공과 내공은 부족함이 없고 강호 경험도 충분하다.
천무백은 그 둘을 상대로 체득한 천둔검법을 시험하는 데에 만족했다.
좋은 자리가 되리라.
‘뭐, 선근경도 겸사겸사 얻고.’
하오문을 통해 혈귀곡에 대해 파고들고 있으니, 조만간 정보가 나올 터.
거기에 비무전이 끝나면 화산도 혈귀곡 추적에 나설 것이 분명하니 계획대로라면 일이 잘 풀린다.
천무백은 곽천후, 능허와 함께 비무가 열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능허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고, 곽천후는 오히려 얼굴에 열기가 미미하게 떠올랐다.
“제법 사람들이 많네.”
“화산의 모든 제자가 몰려나왔군.”
“종남도 풍운검군이 직접 왔어.”
뿐인가.
화산은 언제든 문을 열어놨고, 방문하는 무림인과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섬서의 유력한 인사들은 소식을 듣고 화산에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화산도 수를 썼군.”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승리를 통해 선근경의 소유권을 확실히 쥐는 것.
결국,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중원 도맥의 정통성을 입증하겠단 얘기다.
‘그만한 자신감이겠지.’
그건 종남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도 이번 비무전에 관객들이 몰려드는 걸 환영했다.
그들도 화산과 같은 입장이었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정당하게 선근경을 쟁취하는 목적.
그들도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