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3화>
73. 어디서 끼어들어?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 듯 계속 맴돌았다.
“종남은 전진의 후예이며, 전진의 성물인 선근경은 응당 종남의 소유입니다.”
종남풍검 전현은 화산파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꿋꿋이 소리쳤다.
화산 장로들은 곧장 반론했다.
“가장 먼저 선근경을 발견한 건 화산입니다. 누가 수백 년 된 장보도에서 발견된 물건을, 연원을 따져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단 말입니까?”
“종남은 전진을 이었습니다!”
“하면 종남은 6년 전 장보도에서 구한 초운권의 비급을 본래 주인인 양가장에게 돌려줬습니까?”
“그건……!”
“보십시오. 누가 연원을 따져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답니까? 심지어 전진교는 사라졌습니다. 전진의 후예인 종남에게 돌려주다니요, 어불성설이란 이 말입니다!”
전현은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칼을 찬 채 여기로 온 만큼 종남파에서 이번 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여기서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면 자신은 말만 장로일 뿐이지, 원래대로 일대제자 취급이나 받을 게 분명했다.
정통성.
중원 도맥을 잇는 정통성.
그걸 화산에게 넘겨준다?
‘옛날과는 다르다!’
과거였다면 종남은 확실히 화산보단 격이 떨어졌다.
하나 정마대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화산은 정마대전 때 꽤 치명적인 피해를 보았다. 반면 종남파는 뒤늦게 참전했던 터라 피해가 미미했다.
그 여파로 화산과 종남의 간격은 좁혀졌다.
하여 전현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종남은 선근경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발언에 화산의 다섯 대장로 중 일인, 비성자(飛星者)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무슨 뜻이겠습니까. 대장로.”
“저런 발칙한!”
지켜보던 다른 장로들이 버럭 소리쳤다.
전현은 종남의 장로지만, 실제 나이는 일대제자 급이다.
배분만이 그럴 뿐이다.
반면 비성자는 화산 대장로다.
정상적이라면 무려 두 배분의 차이다.
그런데도 저리 말하다니.
전현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거 그냥 한판 붙자!’
이 의미가 아닌가.
그때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싸워 보겠다는 뜻인가?”
묵직한 한마디.
전현도 장문인 앞에서만큼은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정당한 비무를 통해 소유권을 규정하자는 뜻입니다.”
“비무?”
“그렇습니다.”
“허! 비무라!”
“화산이 그리 만만해 보이나 보오.”
“종남이 대체 언제부터…… 우리 화산에 비무전을 참.”
이어지는 반응에도 전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문인은 그런 전현을 바라보다 이내 말했다.
“일단 물러가시오. 우리도 이야기를 나눠야 할 터인즉.”
“장문인! 설마 저 비무전에 응하겠다는 겁니까?”
비성자가 미간을 좁혔지만, 장문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저 섬서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화산과 종남이 분쟁을 완만히 해결 짓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현이 물러가자 남겨진 장로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비무전을 받아들이다니요?”
“불가합니다!”
“선근경은 우리 소유입니다.”
“비무전을 받아들인다는 것부터가 저들에게 끼어들 틈을 주는 거 아닙니까?”
장문인은 침묵했다.
그 와중에 발언한 건 청현진인이었다.
“여러분.”
비록 대장로에 속하진 않지만, 수호검이란 별호만큼 그의 발언에는 무게감이 실렸다.
“지금 당면한 문제 중에 더 중한 것이 있습니다.”
“……?”
“혈귀곡입니다.”
“크흠…….”
“일전에는 적혈검귀의 장보도, 그리고 이번에는 선근경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혈귀곡입니다. 소림을 습격한 놈들입니다. 그놈들을 추적하지는 못할망정, 지금 또 한번 종남과 분쟁을 겪어야 합니까?”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분쟁을 해결하고, 종남과 협력하여 섬서 정도 무림을 이끌어 혈귀곡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청현진인은 그렇게 주장했으나 장로들의 반응은 탐탁치 않았다.
적어도 혈사문은 끝장났고, 배후로 추정되는 혈귀곡은 아무런 낌새도 없다.
반응을 살핀 청현진인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리고…… 천룡검협도 선근경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흥. 그래 봤자 후기지수 아니요?”
“화산이 천룡검협에게 은혜를 입은 건 알고 있소. 그래도 그 작자가 뭐라고 소유권을 주장한단 말이오?”
“그자의 무학이 도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허. 그러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군. 무림말학이 어찌……!”
청현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기야 이들은 천무백을 직접 겪지 못했다.
일견 이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자신도 천무백을 겪지 않았더라면 쉬이 믿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지금 상황은 좋지 않다.
화산은 애당초 선근경 분쟁에 천무백을 배제하고 있다.
‘천 공자가 왜 선근경을 노린단 말인가?’
청현진인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무백이 선근경을 노리는 이유가 없었다.
‘단지 욕심 때문은 아닐 터인데.’
천무백은 귀총을 발견하고, 사람들을 구해 준 사실을 거론하며 소유권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주장했다.
단순히 이것만 보면 선근경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청현진인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천 공자가 한낱 욕심에 휘말릴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슴에 대의를 품고 있는 사내다.’
남들이 모두 적혈검귀의 비급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달려들 때.
그는 오로지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혈사문과 싸우러 함정인줄 알고 있음에도 들어갔었다.
결국, 사람들을 구하고 혈사문을 멸하지 않았는가?
적혈검귀의 비급에도 혹하지 않던 사람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청현진인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일부러?’
종남과 화산.
둘은 앙숙이다.
누군가 선근경을 소유하게 되면, 분쟁은 계속 될 게 분명했다.
혈귀곡에 대응하여 협력해야 할 정도 무림이 갈등을 빚는 것이다.
하면.
‘스스로 외부의 적이 되겠다는 뜻인가?’
차라리 본인이 선근경을 가져, 화산과 종남의 갈등을 봉합 짓겠단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 그럴 수 있다.
‘천 공자라면 분명.’
그렇게 행동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청현진인은 불쑥 치미는 감동에 살짝 몸을 떨었다.
스스로 외부의 적이 된다.
종남과 화산으로부터 적개심을 받을지언정, 혈귀곡이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악역이 되겠다.
그 뜻이었다.
숨은 뜻을 파악한 청현진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도 잘 알았다. 선근경이 화산에게 중요함을.
그러나.
그깟 정통성.
‘무슨 소용이랴!’
혈귀곡이란 악독하고 사특한 마인들이 나타났거늘!
물론 종남에게 선근경이 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천무백이라면.
‘믿을 수 있는 진짜 협객이다.’
청현진인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비무전을 하겠다면, 천룡검협과 함께 삼파전(三巴戰)으로 가야 합니다.”
* * *
“당신이 가지면 화산과 종남을 적으로 돌리는 것일 텐데?”
“그게 뭐.”
천무백의 뚱한 대답에 곽천후는 황당했다.
“아니, 화산과 종남이라고. 넌 뭐, 혼자잖아.”
“내가 왜 혼자야?”
“뭐?”
곽천후는 긴장했다.
천룡겁협의 뒤에 거대 문파가 있단 말인가?
“청성표국도 있고, 연화루도 있고 흑심방도 있고. 아휴 든든하다.”
“…….”
곽천후는 이상한 놈을 쳐다보는 시선으로 천무백을 보다 이내 능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능허가 턱을 치켜올렸다.
“뭐, 인마.”
“……하. 같이 다니다 보니 나도 이상해지는 것 같다.”
“천후야.”
“……?”
“날 적으로 돌리면 위험한 건 그쪽이다.”
“뭐?”
“화산과 종남이라고.”
“그치. 암 맞지. 그게 맞죠. 우리 주군을 적으로 돌리면 미친놈들이지. 세상에, 미친놈을 적으로 돌리니까, 미친놈이 맞나.”
능허까지 맞장구치자 곽천후는 더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로 뒤로 물러났다.
그도 일방적인 상식의 사내는 아니었지만, 이 둘은 정말 상식을 벗어나는 놈들이었다.
‘후우. 상황이 이러니 다른 곳을 가야하나.’
차라리 호북의 무당파나 제갈세가를 찾아갈 걸 하고 후회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다시 호북으로 가는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무당파면 몰라도 제갈세가가 과연 도움을 줄지 모르겠다.
자신이 알기론 제갈세가와 아버지 곽용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곽천후가 고민할 무렵.
천무백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비무전?”
“그렇소. 화산과 종남은 비무전을 통해 선근경의 소유권을 결정짓기로 했소. 기간은 한 달 후.”
“나는 빼놓고? 나한테도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찾아온 국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견이 많았지.”
“나를 배제하겠다는 의견이 많았겠군.”
“그렇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조금은 졸렬해 보여도 명문정파에게 정통성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한편으로도 이해했다.
하나 천무백도 쉬이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배제하겠다고 하면, 소협은 가만히 있었겠소?”
“그건 아니지.”
천무백의 말에 국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청현진인에게 들은 얘기와 직접 겪은 천무백을 잘 알았다.
여기서 배제하겠다고 하면, 천무백이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걸.
“하여 이번 비무전에 참여하시오. 장로급 배분의 한 명과 일대제자급 네 명, 총 다섯이오.”
천무백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혼자 참여해도 되나?”
“그래도 되지만…….”
국보는 떨떠름하게 말끝을 흐렸다.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겠단 의미가 아닌가?
“뭐, 그건 중요한 건 아니지. 잘 알겠소.”
천무백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요!”
저 멀리서 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무백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치는 목이 아주 튼튼한가 봐.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다니네.”
“…….”
국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공감했다.
어느새 전현이 휘하 무인들 다섯을 이끌고 천무백이 머무르던 전각에 도달했다.
그는 천무백과 국보를 번갈아 노려봤다.
입을 연 건 전현이 아니었다. 전현의 뒤에 있던 일대제자, 사적유였다.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무공 실력을 가진 꽤 뛰어난 이였다.
“어찌 종남과 화산의 비무전에 저 사람이 끼어든단 말이오?”
“천룡검협도 현장에 있던 사람이고, 선근경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소. 배제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적유가 비웃는 투의 탄식을 내뱉었다.
“허. 그럼 그때 있던 무성적마나 관성검도 소유권을 주장하면 아주 끼어주겠소이다? 역시 화산이오. 아주 공정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구려!”
도를 넘는 듯한 비판에 국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산과 종남의 비무전으로 이끌어 선근경일 빼낼 생각이었건만, 외부인이 끼어들었으니 그리 화낼 만했다.
하나 감히 어디서 화산 본단에서 저런 망발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국보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천무백이 먼저 말했다.
“왜 쫄리나? 내가 종남 애들 두들겨 패고 가져갈까 봐?”
가만히 있던 전현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뭣이?”
“뭐 그렇다는 거지. 설마 그 대단한 종남파가 고작 갓 명성을 얻은 애송이가 두려울까.”
“이놈!”
사적유가 벌게진 눈으로 소리쳤다.
“종남과 화산의 일이다! 어찌 네놈이! 보는 눈과 눈치가 있으면 주제에 맞게 끼어들 곳에 끼어들어라! 흥!”
그때였다.
꽈앙!
전현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조금 전까지 사적유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멀리.
전각 한편의 담장에 사적유가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원래의 자리에 천무백이 오연하게 서 있었다.
천무백이 무덤덤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단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
“어디서 어른들 얘기하는 데 끼어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