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0화>
70. 화산입문
“5초.”
“정말 매화일검이랑 붙으러 온 거요.”
“4, 3…….”
“겸사겸사 종남에도 가서 종남풍검이랑도 붙어보고!”
“2……1…….”
“아!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오!”
천무백은 아무 짓도 안 했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숫자를 셌을 뿐이다.
하나 사람의 기세라는 게 있으니, 무형의 압박에 곽천후는 실토했다.
곽천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치욕스러웠다.
그도 사내인지라 압박에 못 이겨 대답한 게 부끄러웠다.
“곽용이의 명령? 그게 뭔데.”
“가친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빠악!
천무백의 손이 벼락같이 곽천후의 뺨을 때렸다.
“새끼야. 존댓말을 하던지, 반말을 하던지 하나만 해. 그리고, 으이? 내가 네 아비랑? 응? 술도 머꼬! 응? 같이 목욕도 하고!”
“…….”
곽천후의 눈빛에 다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복잡했다.
무서운 놈을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미친놈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하기야 제보다 어린놈이 아버지랑 밥 먹고 술 먹었다 하니 숫제 미친놈 보는 기분 일 거다.
하나 천무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래 봤자 제 놈이 어떻게 알겠는가.
혹시 전생에 우리 아버지랑 친하셨소?
이런 생각을 하는 놈이 있겠나.
천무백은 그것보다 곽용의 명령이 궁금했다.
사실 종남풍검과 매화일검에게 비무를 청하러 간다는 건 그저 겸사겸사 가는 길에 행하는 일인 게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다른 목적으로 화산과 종남에 간다는 거?”
“하오문 와서 대놓고 비무하러 간다고 지 행보를 말하는 놈이 그게 목적이겠냐?”
“……!”
곽천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감탄했다는 듯이 천무백을 바라봤다.
‘고작 말 한마디로?’
자화자찬 같지만 곽천후는 중경성에서 가장 이름 높은 후기지수다.
중경성을 넘어 강호 전체에서도 손을 꼽으니, 그만한 인물은 몇 없다.
한마디로 움직임에 제약이 있다.
특히 이번 일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비무행을 하는 것처럼 꾸몄건만.’
하오문에 와서 일부러 비무행을 운운한 것.
그리고 천룡검협에 대한 얘기까지 한건, 개인적인 흥미와 승부욕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일종의 위장책이었다.
한데 그걸 단번에 꿰뚫어 보다니!
‘설마 아버지의 친우중에서 반로환동이라도 한 놈인가?’
듣기로 천룡검협의 나이 십칠 세.
무공 실력?
그거야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나.
자신도 십 대 때 중경성 호기지수들 도장 깨기하고 다녔는데.
영약과 재능, 대단한 무공과 스승만 있다면 문제없다.
진짜 놀라운 건 저 통찰력이다.
십 대 때 저런 통찰력을 보인다고? 쉬이 믿기지 않았다.
“눈알 굴리지 말고. 인마. 얘기나 해 봐. 무슨 명령인데?”
“……말할 수 없다.”
“그래. 땅에 묻혀도 말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
“……화산 장문인과 종남 장문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야. 능허보다 줏대 없는 놈은 오랜만에 보네.”
“내 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 만일 명령이 아니었다면 오늘 죽기 살기로 싸웠을 거다.”
“그러든가. 하여튼, 무슨 도움? 곽용, 아니다. 나 같아도 아버지 이름 함부로 부르면 기분 나쁘겠네. 곽가장주께서 무슨 도움을 구했는데?”
“비검문주시다.”
“어어, 그래. 비검문주.”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다.
괴롭히고 윽박지르고 때리던 사람이 은근 목소리를 낮추며 조금이라도 자상하게 살살 구슬리면 뭔가 울컥하면서도 마음이 풀리는 게 있다.
그래서 그럴까. 곽천후는 저도 모르게 얘기를 풀어놓았다.
곽천후도 겉으로 의연한 척했지만, 어디 가서 맞아 본 적 없는 아직 어린 이십 대의 청년이었다.
반면 천무백은 강호 경험이 수백 년에 이르는 ‘노괴’였다.
그런 그에게 사람 하나 살살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경성에서 최근 참사가 벌어졌다.”
“자세히.”
“중소문파 다섯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
천무백은 임홍이 꺼냈던 얘기를 떠올렸다.
‘이거군.’
이게 곽가장, 아니 비검문과 무슨 상관이지?
“다섯 중 셋은 비검문의 품 안에 있는 문파였지.”
“그래서 화산에 도움을 구하겠다?”
“아니.”
곽천후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문파간의 분쟁이었으면 아버지가 해결했을 거다. 아버지는 중경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고, 중원을 통틀어도 백대고수에 들어가시는 분이니까.”
“하면, 문파 간의 분쟁이 아니다?”
“여러모로 조사한 결과 심상치 않은 게 드러났다.”
곽천후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미.
천무백은 한 번 더 재촉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굳게 닫은 입술과 눈을 보면 이건 때린다고, 구슬린다고 대답할 종류가 아니었다.
차라리 목에 칼이 들어왔으면 들어왔지 대답하지 않으리라.
아, 물론 진짜로 죽이고자 하면 대답할지도 모르지만.
천무백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때리는 거야 전생의 나름 친우라고 할 만했던 놈의 자식 교육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죽일 수야 있겠는가.
‘어쩔 수 없군.’
천무백은 옆에 조용히 있던 능허에게 말했다.
“내일 간다. 저놈하고 같이.”
“엑? 저 새끼랑 말입니까?”
“새끼 새끼 하지 마라! 이 새끼야!”
“어쭈? 한번 푸닥거리할까?”
“흥? 자신은 있고? 내가 저놈에게 당했다고 우습게 보이느냐!”
“조용.”
“…….”
“…….”
“시끄럽게 굴면 둘 다 입을 뭉개 버리고 가겠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능허야.”
“네.”
“저놈 상대로 실력 좀 기르거라.”
“네?”
“천후야.”
“나보고 저놈이랑 싸우라고? 나는 너와…….”
“다음부턴 안 봐준다. 그럼 너 죽어.”
“……저놈이랑 비무하겠다.”
“그래.”
천무백은 능허의 상대로 곽천후가 알맞다고 판단했다.
물론 실력이야 곽천후가 훨씬 앞서지만, 능허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둘이 붙어 놓으면 곽천후는 몰라도 적어도 능허는 발전이 있으리라.
천무백은 곽천후를 화산까지 데려가면서 대충 무슨 목적인지 정확히 캐낼 생각이다.
‘냄새가 난단 말이지.’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
그 직감이 말했다.
그냥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라고.
만일 혈귀곡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놈들. 비단 섬서하고 하남이 아니라 이거지.’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마차 타고 갑니까?”
“그냥 걸어가리?”
“아니, 경신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공은 땅에서 솟니?”
“음. 그렇군요.”
능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무백은 임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외상 걸어 두시오.”
“아휴, 아닙니다. 협력관계니 마차 정도 구해 주는 건 뭐…….”
임홍이 손사래 쳤다.
그것도 그냥 마차가 아니었다. 제법 가격이 나가는 사두마차였다. 겉은 화려하지 않아도 내부는 꽤 깨끗하고 화려했다.
제법 돈을 쓴 티가 났다.
하나 임홍은 그깟 돈이 아쉽지 않았다.
‘빨리 가라. 빨리.’
천무백과 능허. 이 두 미친놈을 옆에 두고 제대로 잠도 못 잤다.
그들이 간다고 하니 잔치라도 열고 싶은 마음이었다.
“능허야, 마차 몰아라.”
“마차를 구했으면 마부도 같이 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부가 여기 있는데 왜.”
“이야, 우리 주군 장애인 복지가 최곱니다. 외팔이한테 말고삐를 잡으라니요.”
“은근슬쩍 외팔이인거 강조한다?”
“아휴 아닙니다. 눈도 한짝! 팔도 한짝! 이 정도는 되어야 강호에서 인상으로 살아남죠.”
“고마운 줄 알거라.”
“네.”
능허를 마부석에 앉힌 천무백은 곽천후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그럼 다녀오십쇼!”
“분타주.”
“네.”
“이른 시일 내에 정보를 구해 가지고 오길 바라오.”
“…….”
“암진혜검 다음 구결을 받고 싶으면 말이오.”
“하……하 알겠습니다.”
임홍은 혀라도 씹은 사람처럼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은 뒤집혔지만 암진혜검의 이름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 * *
천무백이 일부러 능허를 마부석에 앉히고 곽천후와 마차에 오른 건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화산으로 가는 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며칠 되지도 않는다.
사두마차라면 더 그렇다.
하여 천무백은 가는 동안 곽천후를 구슬려 자세한 내용을 듣고자 했다.
처음 곽천후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의외로 단순했다.
천무백이 몇 번 겨뤄 주며 간단한 가르침을 한두 마디씩 해 줬다.
‘재능은 재능이군. 호부견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한두 마디 던지는 것만으로도 곽천후는 제법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줬다.
능허에게 능허좌검을 전수하느라 답답함을 느꼈던 천무백으로선 꽤 쾌감이었다.
더 대단한 건 가르침을 곧장 비무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는 능력이었다.
괜히 강자와 겨뤄 보겠다며 비무행을 다니는 게 아니었다.
강호인에게 여러 종류가 있다.
생사결에 가까운 싸움을 거쳐나가며 성장하는 무인.
또는 여동빈처럼 개인의 참선을 통해 발전하는 무인.
천무백도 굳이 따지면 전자였고, 눈앞의 곽천후는 완벽한 전자였다.
예전 전생에서도 이런 성향에 대해 비교적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천무백이었다.
천무백이 충분한 호의를 베푸는 걸 느낀 곽천후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결국 어떤 일인지 실토했다.
“딱 다섯 놈이다.”
“다섯?”
“다섯 문파를 멸문시킨 놈이 딱 다섯 명이란 얘기다.”
“흠. 아무리 중소문파라도 멸문이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면……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갔으면 적어도 인당 이십은 상대했다는 건데.”
곽천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인당 백이다.”
천무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명이 하나씩 없앴다는 거야?”
“맞다.”
“중경 무림이 그렇게 약했나?”
“아니다. 중경성엔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없다. 우리 비검문이 실력으론 제일이나, 규모는 작지. 하지만 멸문당한 중소문파들도 그 사이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곳이었다.”
천무백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역시 직감대로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든 문파가 멸문되고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게 강호다.
그래도 한 사람한테 하나씩 멸문당했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도 중경성 한곳에서.
“그래서 그 다섯 명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이야 뭐야?”
“다섯 명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정도 무림의 인물이었고.”
“음?”
“여러모로 거대 문파들과 연을 맺은 사람이다. 하여 아버지께서 조사를 시작했는데, 다섯 명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정파인이 끼어 있다, 그것도 거대 문파와 연을 맺은 사람이.
하면 혼란스러울 만했다.
“그래서 화산파와 종남으로 가는 거군.”
“당장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음?”
“종남파 무인들 아닙니까?”
천무백이 살짝 열린 창밖으로 보이는 무리의 모습에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능허의 말대로 종남파 도복이었다.
“왜 저들이 종남산이 아닌 화산으로 가는 방향에…….”
뭐 갈 수야 있지.
문파간의 교류야 늘 있는 일이니까.
다만 천무백은 종남파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흉흉한 기세였으니까.
마치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듯한 얼굴이었다.
화산과 종남, 둘이 앙숙임은 잘 알려져 있긴 했지만 저런 얼굴로 우르르 화산으로 향한다…….
“능허야.”
“네.”
“속도 좀 높여라. 먼저 화산에 도착해서 무슨 일인지 봐야겠다.”
과연 천무백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천무백이 화산에 도착하자 맞이한 건 청현진인의 반가운 환영 인사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기세로 대치하고 있는 종남과 화산 무인들의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