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69화>
69. 여기서 너 죽인다.
전생의 인연을 이번 삶에서 다시 본다는 건 꽤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가령 20대의 잘생긴 청년이었던 약선이 지금은 노인네가 됐다거나.
점소이로 심부름이나 하던 임홍이 분타주가 됐다거나.
또 누가 있더라.
그래, 소림의 혜량대사도 봤었지. 정의감에 불타던 약관의 청년.
하여간 그들의 나이 든 모습을 보는 건 꽤 묘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 곽천후도 그랬다.
정확히는 곽천후의 아비인 곽용은 지금껏 만난 이들과 달리 인연이 깊은 편이었다.
첫 만남도 비슷했다.
당시 아직 검신으로 불리기 전.
갓 명성을 높이고 있을 때 찾아와서 다짜고짜 비무를 걸던 놈이었으니까.
‘똑 닮긴 했군.’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그리고 맷집까지도.
퍽, 퍼억, 퍽! 퍽!
“거참. 속 시원하게 잘 패네.”
능허가 키득거렸다.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이던 고수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곽천후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아무 반항도 못 하는데?’
왜 그런가 싶었지만 능허로서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다 싶을 정도로 곽천후는 맞았다.
천무백은 내가중수법을 통해 외부가 아닌 속을 직접 타격하고 있었다. 그건 촉의 관우가 와도 계집애처럼 비명을 내지를 만한 충격이었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모습에 능허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를 다른 사람이 팬 게 그렇게 화가 날 만한 일인가…….’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능허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 곽천후는 작게 경련하며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천무백은 그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곽용 자식 놈아.”
“내 가친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네 이름이 뭔데.”
“곽천후!”
“천후야, 어떠냐.”
곽천후가 이빨이 빠져 듬성듬성한 치아를 보이며 이죽였다.
“뭐가 말이냐. 네놈의 주먹맛 말이냐? 순 맹맹하기 짝이 없어 심심하더구나.”
“그렇기엔 네놈 꼬라지가 가관인데.”
“어디 더 때려 보아라. 싸움은 아직 안 끝났다.”
천무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놈 자식이 맞긴 하네.’
처음엔 그저 멋모르고 투쟁심이니, 정진을 위해 비무행을 펼치는 협객이니 그저 흉내만 내는 놈인가 싶었다.
간혹 강호에 그런 놈들이 종종 눈에 띈다.
실컷 시비 걸고, 싸움 걸어놓고 민폐 끼치면서.
정작 자기 일은 무학의 정진을 위한 투쟁심이니 뭐니 포장하는 놈들.
천무백의 입장에선 걔들은 그냥 건달이다.
그런 천무백의 박한 평가 속에서도 ‘꽤 괜찮은 놈’이란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투신 곽용이었고, 바로 이놈의 아비였다.
“뭐, 근성 있어.”
솔직히 말해 나쁘진 않다.
이런 놈도 한두 놈 있어야 하니까.
투쟁심이니, 뭐니 시답잖은 일로 더 귀찮게 하기 전에 교육이 필요하다.
하여 천무백이 나름 과하게 손을 쓴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전생에 죽어라 맞으면서도 ‘칼침 한 방만 놓겠소!’ 하면서 덤벼들던 놈의 아들이니까.
“흐. 왜 때리다 지쳤냐? 응?”
뭐 그렇다고 한들.
빠악!
천무백은 손날로 곽천후의 뒷목을 세게 후려갈겼다. 곽천후는 비명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어린노무 새끼가 어디서 반말을 찍찍 대.”
구경하던 능허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와.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 거 알죠?”
“누구한테?”
“그거야 당연히 이 어린노무 새끼인 곽천후죠. 콱! 반반하게 생긴 거에 집안 믿고 까부나. 반말 찍찍 내뱉고 말이야. 어? 혀가 반 토막이 났나. 존댓말이란 걸 못 배워먹었나. 응? 이런 놈은 뒈지게 패야 말을 듣는데.”
“능허야.”
“네.”
“나한텐 너도 어린놈 새끼의 범주에 든다.”
“어리니까 잘 타일러야죠. 폭력 대신 말로. 하하!”
“좀 정리하고 수련 좀 봐주마.”
“네? 아니 왜요? 왜? 주군도 바쁜 거 아닙니까? 연무장 하나 날려 버릴 정도로 수련하던데.”
능허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이기까지 한 그는 조금 전 곽천후를 두고 했던 말을 후회했다.
사실 그게 곽천후한테 한 말이겠는가.
천무백 들으라고 한 말이지.
‘염병. 눈치는 나보다 더 좋아요. 응, 흑도에서 나고 자랐으면 눈치만으로도 흑도를 다 접수했겠어.’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눈 운동 좀 했습니다.”
“하여튼 이런 놈 하나 처리 못 하면 좌수검법 뺐어야지.”
“줬다 뺏는 게 어딨습니까? 그리고 능허좌검입니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넌 고수 되면 안 되겠다.”
“왜요? 걱정하지 마십쇼. 내가 고수돼도 응? 정이 있지 설마 주군을 때리겠습니까.”
“진짜 제 주제를 잘 아는 듯하면서도 분수를 모르는 놈이니 신기하구나. 네놈이 고수가 되면 능허좌검으로 역사에 남을 거 아니냐.”
“오! 그거 좋네요. 크으! 한 300년 후, 강호인들이 독안사가 남긴 장보도를 찾아 헤매다 능허좌검을 얻고 전율하는 얘기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천무백이 몸서리를 쳤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이번 삶에서 검극을 보지 못하고 또다시 전생한다면.
그리고 그때는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아니라 능허의 장보도라며 찾아다니게 된다면.
그건 묘한 감흥을 넘어서 불쾌함일 것 같았다.
천무백은 시선을 돌렸다.
“저놈 일단 대충 치료하고 처박아 놔.”
“네? 살아 있습니까?”
“응.”
“죽일까요?”
“나중에 네가 고수돼서 죽여라.”
“젠장. 못 죽이겠군.”
능허가 툴툴대며 실신한 곽천후를 들고 사라졌다.
천무백은 임홍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닿자 임홍은 깜짝 놀랐다.
‘생각하자. 쟤 천룡검협이 아니라 악귀다. 악귀. 까딱하면 처맞는다.’
잔뜩 긴장한 임홍이 차렷 자세로 말했다.
“전 뭘 할까요?”
“……내 수하도 아닌데 왜 그렇소?”
천무백이 외려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과도하게 긴장한 걸 깨달은 임홍이 어설프게 웃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첫 만남부터 강렬했는데.
그렇게 처맞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이후에는 제법 하오문 분타주라고 반존대를 섞어 말해 주긴 하지만.
임홍은 저 시선과 어조에서 똑똑히 알았다.
‘고작 표국의 아들이건만, 정말 애지중지하게 자랐나? 아랫사람에게 말하는 투가 하루 이틀 한 게 아닌데.’
뼛속까지 윗사람 같은 느낌.
간혹은 아예 노인네 같기도 했다. 임홍은 간간이 그렇게 느꼈다. 퉁명스러운 노인네가 혀를 차는 모습이 간혹 비쳤다.
“뭐 여하튼, 딱히 성과가 없소?”
“다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섬서에서 하오문 정보망이 전체적으로 망가져서 복구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임홍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성과가 거의 없었다. 혈사문은 나름 족쳐보면 그 꼬리가 밟혔었는데, 혈사문을 그저 하부조직처럼 다루는 혈귀곡이란 놈들은 꼬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임홍은 이것들이 정말 존재하는 놈인가 의심마저 들었겠는가.
대답에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하기야, 그놈들이 쉽사리 잡힐 것처럼 보이진 않긴 했지.”
천무백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임홍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저, 혈귀곡과는 상관없는 정보입니다만.”
“뭐요?”
“중경성과 안휘성에서 제법 소란이 있나 봅니다.”
“소란?”
“강호인들 싸움인지는 아직 거리가 멀어 제대로 된 정보는 없습니다만, 몇 개 문파가 사라졌다고 하네요.”
“음.”
“혹시 이것들이 혈귀곡과 관련이 있는지는…….”
“그건 좀 더 알아보시오. 하루 지나면 문파의 간판이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사실 이 시대에서 정보력은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한 성만 해도 그 넓이와 인구는 어마어마하며, 존재하는 강호문파가 어디 한둘인가.
사파와 흑도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다.
그런 점에 있어서 다른 성의 간략한 내용이지만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하오문이 괜히 강호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다.
하나 그런 하오문이라고 해도 다른 지방의 정보를 구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터.
천둔검법과 건곤창응보의 수련 성과도 뚜렷하고,
여기서 굳이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천무백은 결정했다.
“화산으로 가야겠군.”
* * *
“능허야.”
“네.”
“화산으로 가자.”
“집이 안 그립습니까?”
“나온 김에 일은 하고 가야지. 넌 집도 없는데 뭐가 그래?”
“집이야 있죠. 가족이 없죠.”
“가족이 집이지.”
“오.”
“뭐야.”
“주군, 그래도 이제야 좀 자기 나이처럼 보입니다.”
“뭐?”
“가족이 그리운 거 말입니다.”
“그립다곤 안했다만…….”
천무백이 조금 뻘쭘하게 말했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 혈귀곡이고 나발이고간에 표국으로 돌아가 잠깐 쉬고 싶기도 했다.
점박이 놈이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그리웠고.
사실 나쁘진 않다.
일이 안 풀리면 언제고 돌아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여튼 준비해.”
“네. 참. 흑도 놈이 화산에도 가 보고. 신기한 일이네.”
화산파는 소림이 몰락한 이래, 현 무림정파의 거두나 다름없었다.
하오문의 정보력에 비하면 부족할 게 분명하다.
정보 상인인 하오문의 정보력을 어떻게 따라가겠는가.
하나 추진력은 남다르다.
하오문과 달리 화산은 어떤 일이든 도전할 무력이 있었다.
거기에 정도무림에서의 발언력과 서로 안부를 통하며 오가는 정보가 분명 존재했다.
그건 천무백이 잘 알았다.
강호 경력이 어디 일, 이십 년인가.
무림맹주까지 한번 해 봤던 천무백이니, 정도 무림의 생리에는 누구보다 빠삭했다.
정사지간인 하오문이 접근할 수 없는, 정파들만의 은밀한 비선을 화산파는 엿볼 수 있다.
그러니 혈귀곡에 대한 추적은 화산의 조력도 큰 도움이 될 터.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내일 바로 출발하자.”
“예. 알겠습니다. 아, 이 새끼 어떡합니까?”
“어쩌긴, 쟤 깼어.”
“헉!”
능허가 화들짝 놀랐다.
곽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라, 천후야. 아직 비무행 하기엔 이르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
“뭐, 그러던가. 알아서 해라.”
천무백은 어깰 으쓱였다. 그저 전생 인연의 자식놈이었으니, 천무백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나 곽천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공교롭군.”
“뭐가.”
“나도 화산으로 간다.”
“그래서?”
“같이 가지.”
능허가 황당하다는 듯 화답했다.
“주군, 이 새끼 머리 때렸습니까?”
“이 새끼야. 넌 내가 죽인다.”
능허에게 눈을 부라리는 곽천후.
능허는 잠시 찔끔했으나, 천무백을 흘깃 보곤 허리춤에 팔을 올렸다.
“넌 나 못 때려.”
“뭐?”
“나는 주군만 팰 수 있거든.”
“자랑이다. 새끼야.”
“그래 자랑이다. 어린노무 새끼야. 너 몇 살이야?”
“스물셋이다.”
“하이고. 주군, 내가 어지간히 동안인가 봅니다. 주군이나 이 새끼나 다 반말 찍찍대고.”
천무백은 능허의 말을 무시했다.
“넌 좀 닥치고 있어.”
능허가 언제 깐족댔냐는 듯 공손하게 허릴 숙였다.
“예. 주군!”
“천후야.”
“……?”
“왜 같이 가려고?”
“가는 길에 몇 번 싸워 보려고.”
“싸워? 우린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팼는데.”
곽천후는 분하다는 듯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내 나보다 어린놈에게 개처럼 처맞은 건 처음이오. 내 비록 실력에 자만했으나, 그래도 내 또래에 적수가 없었소. 한데 이렇게 되었소. 그래서 좀 같이 다니고 싶소.”
“계속 처맞겠단 의민가?”
“아니……좀 옆에서 비무하고 내 배우겠단 뜻이오.”
“그게 처맞겠단 말이지.”
“하…… 뭐 하튼 그렇게 하지. 같이 가지. 나도 화산에 볼일 있소. 매화일검하고 붙어봐야 하거든.”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야.”
“……?”
“화산에 가는 이유 제대로 말 안 하면, 여기서 너 죽인다. 똑바로 말 안 해?”
천무백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순간 일변한 기세에 곽천후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제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천무백의 말에 곽천후의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