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68화 (68/318)

<검신재생 68화>

68. 패도 내가 팬다. 쟤는

“후하하하! 이야. 당황했지? 응? 당황한 거 맞지? 그치?”

기습적인 한 수에 교묘한 찌르기.

그걸 막느라 곽천후는 저도 모르게 두 발짝 물러섰다.

싸움에서 물러선다는 건, 곧 밀렸다는 의미다.

명백했다.

곽천후는 능허의 한수에 당했다.

만일 곽천후가 아니라 다른 무인이었다면 차마 막거나 피하기도 전에 몸에 구멍이 뚫렸으리라.

“캬. 이게 능허좌검이다, 이 말씀이다.”

소림에서 먹어온 영약, 거기에 적혈검귀의 좌수검법까지.

천무백에게 늘 두들겨 맞아서 그렇지 능허도 능히 절정고수라 주장할 만한 실력자가 된 셈이었다.

“과연······ 강호는 넓다더니.”

곽천후가 탄식하며 검을 다시 쥐었다.

한데 그의 얼굴에 드러난 건 분노 같은 게 아니었다.

미미한 열기.

오히려 흥분으로 미미하게 떠오른 열기였다.

하물며 눈은 번뜩이며 번들거렸다.

“경시한 거 사과하리다. 내 제대로 하지요!”

곽천후의 기세가 일변하자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이거 비문데, 비무인 거 알고 있지?”

살기였다.

흑도판 몇 년이 뭔가. 수십 년을 구른 능허가 아닌가.

이건 분명 살기였다.

그때 지켜보던 임홍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투귀한테 비무는 생사결이라는 걸 모르다니.”

“뭐? 왜 비무가 생사결이오! 어? 비무란 단어 모르나?”

“하긴. 싸우다 뒈진 놈은 다 죽었으니 소문을 퍼뜨릴 놈도 없었겠군.”

“아니 썅! 이보쇼! 이 새끼야! 그걸 왜 이제 알려줘!”

쩌저저저적!

능허의 입이 꾹 막혔다.

잠깐이라도 한눈 팔았다가는 몸이 절단 날 검격이 쏟아졌다.

“큭!”

능허의 왼손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능허좌검.

그러니까 적혈검귀의 좌수검법은 찌르기에 비중을 크게 둔 검법이었다.

즉 극단적으로 호전적인 검법이었다.

능허의 성정에도 꽤 잘 맞았고, 가르치는 이가 다름 아닌 누구인가?

바로 천무백이다.

불과 직전 전생에서는 검존이라는 어마어마한 기재를 직접 만들어 낸 천무백은 가르치는 데에도 재능이 있었다.

덕택에 능허가 쏟아 내는 검격의 호전성에 지켜보던 임홍도 등골이 싸늘해질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쉽지 않았다.

호전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투귀였고, 능허와는 달리 공격뿐 아니라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부족한 점이 없는 곽천후였다.

쩌정! 쩡!

“과연! 강호는 넓다더니, 이런 고수가 있었구려!”

겉으로 보기엔 서로 공방을 매섭게 나누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나 조금이라도 눈썰미 있는 이라면 능히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당장 곽천후는 감탄과 말을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만, 능허는 몸에 서서히 상처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 말 많은 능허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능허는 초반에는 제법 버텼지만 계속 이어지는 공격에 점점 공간을 내줬다.

퍼억!

투귀는 칼만 잘 쓸 뿐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주먹과 발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꺼억!”

복부에 주먹이 꽂히자 능허는 속에 있는 걸 게워 내며 주춤 물러섰다.

하나 멍청하게 서 있을 순 없었다.

고삐를 잡은 투귀의 검격이 쏟아졌다.

쩌정!

“끕! 거 내가 졌……!”

“아직 충분히 싸울 만해 보이오만!”

능허가 패배를 인정하려는 순간.

곽천후가 검을 내지르며 입을 막았다. 이쯤 되자 능허도 속이 뒤집혔다.

“이 시발놈이! 나 독안사 능허야!”

“그렇지!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처럼 싸워 보자는 것이오!”

곽천후는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능허는 그 얼굴을 맞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발, 미친 새끼가 또 있구나!’

마치 여인과 방사를 치르는 듯이 달아오른 얼굴을 보라.

이거 숫제 미친놈이다.

그런 미친놈하고 비무한다고 설쳐 댔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능허는 있는 힘껏 싸웠지만 이미 싸움의 기세는 곽천후에게 넘어갔다.

곽천후의 능허의 공격을 모두 파악했듯이 움직였고, 능허는 반면 그러지 못했다.

온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날 때.

능허가 도저히 막지 못하고 복부에 기나긴 자상이 남을 때.

쩌어어엉!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단도 한 자루가 곽천후의 검을 쳐 냈다.

“……!”

곽천후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날아온 단도에 검이 막혔을뿐더러 손목으로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반탄력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반면 비틀거리던 능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뒤틀리며 웃었다.

“시발놈아, 죽었다고 복창해라. 빨리.”

천무백이 왔다.

* * *

임홍이 마련해 준 연무장에서 꼬박 며칠간 수련을 마친 천무백은 기분이 썩 괜찮았다.

천둔검법을 그만의 방식으로 갈고 닦았으며, 어느 정도 완성했으니까.

단지 검법만 완성한 게 아니다.

일전에 혈사문의 귀면수라가 경악했던 건곤창응보.

과거 마인들 또한 ‘검신은 하늘에서 걸어 다니면서 싸운다!’고 줄곧 얘기했었던 그 보법.

그것의 습득에 어느 정도는 성과를 보였다.

다만 건곤창응보나 천둔검법이나 둘 다 내공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천무백은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해 사용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수련했다.

‘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공을 늘리는 거지만.’

영약을 먹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운공 시간을 비교적 늘려야겠군.’

그러고 보니 근래 바빠서 경천혼공을 제대로 운공하지 못했다.

소림에서부터 귀총, 혈사문까지.

그야말로 바쁜 일정 아니었는가.

그나마 지금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물론 천무백이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오문을 통해 혈귀곡에 대해 알아보고 있고, 화산에서도 청현진인이 도와준다 했으니.’

지금까지의 단서는 구성이란 노인이 섬서로 도망친 것 하나뿐.

그 이후 행적은 묘연하기 짝이 없다.

하물며 혈사문을 때려잡으면서도 혈귀곡과 연관된 것들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닐 테니, 하오문이라면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단서 하나만 잡으면 화산의 장악력을 통해 본격적으로 추적을 시작하면 그만이다.

그때까지 천무백은 얻은 걸 정리하고, 경천혼공에 더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놈이 나타나기 전의 계획이 그랬다.

“이런…….”

곽천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나타난 천무백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단도를 던져 검을 막은 이라면…….

“귀하가 혹시 천룡검협이오?”

“맞다.”

“허어. 하오문이 참 맹랑하군. 바로 뒤에 천룡검협을 두고도 정보를 팔지 않는다더니……. 하면 이 독안사란 사람은 그쪽 인물이겠구려.”

“그것도 맞다.”

곽천후는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능허를 흘깃 바라보곤 포권을 취했다.

“좋은 비무였소, 소협.”

“하.”

능허는 뭐라도 씹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먼저 비무하자고 덤벼들었으니 딱히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죽일 듯이 공격해 놓고 비무였다며 예의를 차리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막말로 능허는 싸움에서 졌으면 죽지 않을진 몰라도, 적어도 팔다리 하나쯤 잘렸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만큼 곽천후의 투쟁심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야.”

“날 부른 것이오?”

“너 중경성 곽가장 인물이냐?”

곽천후의 눈이 동그래졌다.

“곽가장이라고 불리긴 했었지. 지금은 비검파요.”

“그 애송이가 문파를 열었구나.”

곽천후는 멈칫했다.

문파를 연 것은 자신의 아버지다.

한데 천무백은 마치 잘 안다는 듯이 중얼거리지 않는가?

더구나 애송이라고 표현하면서.

“애송이라니. 설마 내 가친을 이른 건가?”

“아비 이름이 곽용 맞냐?”

“…….”

“얼굴이 똑 닮았군. 그놈 어렸을 때 모습 같아.”

“대체 무슨 망설이오!”

“성격도 개 같은 게 똑같단 말이지.”

“소협!”

“뭐 새끼야.”

“더 나와 가친을 욕보였다간 참지 않소.”

“뭐. 어차피 싸우려고 온 거 아니야?”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곽용 그놈 별명이 투신이었나? 참 강호인들 독특해.”

“…….”

“그저 산불 맞은 멧돼지처럼 싸우는 걸 투쟁심이니 뭐니 하면서 포장해 주고, 투신이란 별명도 붙여 주고. 너도 마찬가지지?”

천무백은 단숨에 곽천후를 꿰뚫어 보았다.

저런 유형을 아주 잘 알았다.

강호를 주유하다 보면 수도 없이 마주치는 이들.

‘그저 싸움에 미친 놈들. 제가 가진 능력을 한껏 믿고 시비를 거는 새끼들.’

어디 한둘이던가.

그리고는 그것이 강호의 당연한 법도인 듯 정당화한다.

마치 강렬한 투쟁심에 똘똘 뭉쳐 있는 싸움꾼처럼.

주위에선 투쟁심이니, 투신이니, 투귀니. 그걸 포장하며 찬양한다.

사실은 그냥 싸우기 좋아하는 건달 새낀데.

“하. 더는 참을 수 없구나. 어린놈이 어찌 우릴 아버지를 아는 듯이 말하더냐.”

“야.”

“……허?”

“아가리로 칼 쓰냐?”

빠득.

곽천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이보쇼, 능 소협.”

“뭐요.”

“저 양반 천룡검협 맞소?”

“다들 그리 부르니 맞겠지.”

“소림을 구하고 화산과 종남, 그리고 강호동도들을 악독한 사교집단에서 구한 그 천룡검협 말이오.”

“일단은 맞소.”

“그런데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웬 건달이 어린아이 하나 뒤지게 패는 거 같소.”

“우리 주군이 더 어리오.”

“아.”

임홍은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는 잔뜩 긴장했다.

후기지수로 꼽히는 투귀 곽천후와 최근 위명을 떨치는 천룡겁협의 대결.

단순한 비무라고 보기엔 천무백의 도발은 치명적이었고, 투귀는 특유의 투쟁심이 아니라 살기를 폴폴 풍겨대며 덤벼들었다.

물론 임홍은 천무백의 승리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제법 볼만한 싸움이 되지 않겠는가.

눈이 반쯤 뒤집혀 덤비는 곽천후는 일전에 능허와 싸우던 모습보다 더 흉흉했으니까.

다만 지금의 결과는 의외였다.

뻐억!

“크억!”

“와. 막힌 게 다 뚫리네.”

능허가 기껍게 웃었다.

그야말로 곽천후는 천무백에게 뒤지게 맞고 있었다.

흡사 그건 폭력이었다.

빠악!

“우웁!”

천무백은 마치 어딜 때려야 상대가 고통스러운지 아주 잘 아는 듯했다.

분명 처음에는 곽천후는 제법 대등한 싸움을 했다.

‘한 다섯 합까지만?’

오히려 그것도 천무백이 봐준 듯했다.

오히려 알만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단숨에 곽천후의 검을 날려 보내고, 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사실 그냥 폭력이 아니었다.

‘내, 내가중수법!’

곽천후는 혼절할 것 같은 가운데에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냥 때리는 게 아니다.

때릴 때마다 상대의 내공이 내부를 뒤흔들었다.

외부를 쳐서 안을 때린다.

마치 피부를 뚫고 뼈와 내장을 두들겨 패는 듯한 고통이었다.

더 미칠 거 같은 건 기절하지 않았다.

상대가 내가중수법으로 내공을 불어넣으면서, 혼절하지 못하도록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절도 안 시키고 고통을 온전히 느끼게 때리고 있었다.

평생 살면서 이렇게 개처럼 맞은 적이 없던 곽천후는 새삼 자신의 지금 상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가 났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그러졌다.

이제 그만 때려 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다.

자신은 그냥…… 그냥 명성이 하늘을 찌를 거 같은 양반하고 싸워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건 비무도, 싸움도, 생사결도 아니다.

그냥 맞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불쑥 억울한 마음이 들어 외쳤다.

“그, 그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그러자 천무백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엉? 나?”

능허의 얼굴이 순간 감격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저기서 천무백이 자신을 가리킬 줄은 몰랐다.

‘하. 그 양반. 아닌 척하면서 그래도 미운 정 들었다고…….’

지금껏 구박을 받아 온 능허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물론 그것도 잠깐이었다.

천무백의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패도, 내가 팬다. 쟤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