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66화 (66/318)

<검신재생 66화>

66. 천둔검법

여덟 개의 선과 형(形).

천무백의 다리가 어깨너비만큼 벌어졌다. 검을 잡은 자세가 더없이 바르게 퍼졌다.

‘다르다.’

뚱한 얼굴로 서 있던 능허는 주위 기류가 바뀌는 걸 느꼈다.

평소 천무백은 검을 잡을 때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다.

하나 지금은 더 했다.

진지함을 넘어서 무언가 무아지경에 빠진 도인처럼 보였다.

스윽.

상단세를 취했다.

능허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천무백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그러겠는가.

유난히 자연기(氣)가 가득했던 지하광장의 기운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그때.

천무백의 검이 선을 그렸다. 아주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앞에서 뒤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신을 주위로 사방에 선을 그린 뒤, 다시금 돌아와 형(形)이 되었다.

‘완벽하구나.’

능허는 검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에게 검이란 먹고 살려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다.

하나…… 지금 천무백의 모습에서 그는 심장이 울렁이는 걸 느꼈다.

‘본래 여동빈보단 내가 훨씬 앞섰었지.’

천무백의 머릿속에 옛날 기억이 살포시 떠올랐다.

어느 순간 비등해졌다.

바로 여동빈이 어디선가 천둔검법을 익혀온 뒤였다.

‘그만큼 무서운 검법이었다.’

무수한 전생을 거쳐 온 천무백의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검법.

천무백은 몸이 다시금 움직였다.

선에서 형으로, 형에서 다시 선으로.

그 무수한 움직임이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진다.

선에서 선, 선에서 형, 형에서 형, 형에서 선.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여덟 개의 초식으로 피어났다.

누군가 봤다면 고개를 갸웃했으리라.

저게 그 전설의 천둔검법이라고?

어떻게 봐야 저것이 천혜의 절세 비급이겠는가.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검무(劍舞)가 펼쳐졌다.

만일 연화루의 기녀들에게 가르친다면, 제법 인기를 끌 만한 춤이었다.

‘이것이 여동빈이 원형 그대로. 마치 춤을 추는 듯, 신선이 하늘에서 노니는 듯 자유롭게 분방하나 빨려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천무백은 똑똑히 느꼈다.

곁에서 보는 이에겐 한편의 아름다운 검무처럼 보일지라도.

천무백의 검식에 주위의 자연기가 거세게 요동쳤다.

검을 주위로 회오리치듯 강기를 이뤘다.

찌를 땐 강기가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회수할 때는 주위의 자연기가 강기로 모여들었다.

벨 때도, 후려칠 때도, 그리고 막을 때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것이 전부인가?’

천무백의 눈이 바닥을 바라봤다.

맞다. 이게 여동빈의 천둔검법이다. 그가 보고, 그가 경험했던.

하지만 천무백은 이게 전부가 아니리라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그것은 한평생, 아니 수십, 수백에 이르는 전생 동안 오로지 검을 잡은 그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천무백은 멈추지 않고 다시 검을 그었다.

‘어?’

지켜보던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르다.’

방금은 아름다운 검무와 같았다면, 이번엔 달랐다.

‘아니, 똑같은데?’

천무백이 괜히 능허를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다.

능허의 눈썰미는 간혹 천무백도 속으로 감탄을 자아낼 만큼 뛰어났다.

‘시발, 뭐야. 똑같은 데 다르다?’

그랬다.

천무백의 검식은 똑같았다. 일전에 보여 준 검무처럼 똑같이 베고 찔렀다. 후려치고 회수하고 막고, 다시 찔렀다.

똑같은 검식이다.

한데, 달랐다.

‘매섭다. 검무가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매섭고, 무섭다.’

파괴적이고 빨랐다.

직전이 검무처럼, 오히려 검법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달랐다.

빠르게 매섭게 몰아쳤다. 누구나 곁에 갔다간 온몸에 구멍이 송송 뚫리고 찢어질 듯 강렬했다.

천무백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무성적마의 것. 그의 성정대로, 파괴적이고 빠르고, 매섭다.’

천무백은 이어 화산, 청현진인과 국보가 본 그림대로 검식을 펼쳐나갔다.

‘매화. 꽃이 피어오르는군.’

베고, 찌르고.

허공에 매화가 피어올랐다. 화려하지 않지만, 한껏 흐드러진 매화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무수한 검식 속에 만들어진 검영(劍影).

그것들이 천무백의 검에 따라 흔들리고, 휩쓸리고, 주위에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건 능허의 것.’

천무백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수많은 매화가 일순 사라졌다. 마치 환영처럼.

그리고 다시금 천둔검법이 흘러져 나온다.

이번에는…….

‘아 이 새끼, 정체성 확실하네.’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독할 정도로 뱀 같구나.’

나쁜 의미는 아니다.

‘교묘하고, 또 사악하도다.’

뱀이 혀를 쉭쉭 내밀면서 경계하고, 약점을 찾으면 쏜살같이 머리를 들이밀어 물어 버린다.

독니로 독을 주입하고, 무력해진 적을 꽁꽁 감싸 질식시킨다.

‘다르다. 모두가 다르다.’

천무백은 가슴 속에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천둔검법이다.

지금 천무백이 펼친 초식은 달라진 게 없다.

그저 그림에 그려진 선과 형을 따라갔을 뿐이다.

하나 모두가 변화무쌍하다.

하나의 초식이 각각의 방식에 따라 펼쳐진다.

같은 초식이지만 각자 살아온 방식과 경험, 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위력도, 모습도 다르다.

그렇다면.

“하면 내 초식은?”

천무백은 원형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모두 지웠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검법을 머릿속에서 일시적으로 지웠다.

방금까지 펼쳐 냈던 모든 것도.

그리고 다시 검을 그렸다.

간결하다.

“음?”

능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대충해?’

일순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간결했다.

초식 사이사이에 숨겨진 화려한 변초, 면면부절, 물 흐르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검무.

그 모든 것이 생략됐다.

그저 베고, 찌르고 간결함이 전부였다.

마치 모든 것들이 한웅큼 사라진 듯한 검초였다.

한데 능허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나도 못 막을 거 같은데.’

간결함이 전부지만, 놀랍게도 그 간결함을 상대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정직함과 간결함으로 무장된 천무백의 검은 일견 보기에는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검초로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그사이에 뛰어들 용기를 낼 사람은 없었다.

천무백의 검은 압축과 실전이다.

생략에 이어 요점만 남긴다.

그건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근육에 새겨진, 뼈에 새겨진, 아니 영(靈)에 새겨진 지독한 움직임.

무겁게 가라앉은 천무백의 시선이 검끝을 향했다.

그에게는 천둔검법마저 군더더기투성이다.

필요 없는 행동은 모두 지워 내고, 쓸모없는 검초는 깡그리 밀어내고.

오로지 필요한 검초만 펼친다.

간결하게 움직이는 검. 그러나 절대로 빨라지지도, 급해지지도, 조급해지지도 않는다.

하나의 검초에 담긴 위력에 자연기가 요동치고, 상단전의 내공이 요동친다.

검 주위로 숱한 기의 회오리가 만들어지고, 검초 하나에 무지막지한 위력이 담긴다.

이것이.

“나의 천둔검법.”

천무백은 서서히 검을 거둬들였다.

“…….”

그저 간결한 검초였건만 눈앞에 일어난 광경은 간결하지 않았다.

정면의 제단은 쩍 벌어져 있었고, 벽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천무백의 검초에서 쏟아져나오는 강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광장의 벽에 금이 가고 무너졌다.

쿠구구궁!

“이런 썅! 왜 광장을 또 무너뜨립니까! 아나, 진짜!”

“…….”

“나갑시다. 나가요!”

능허의 재촉에도 천무백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알겠다. 여동빈아.’

천무백은 이제야 모든 걸 이해했다.

초식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동빈.

그에 반해 천무백은 초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늘 주장했다.

서로 어긋난 의견.

하나 지금에 있어서 여동빈은 초식을 무시했다.

‘여덟 개의 초식이 아니라 그저 선과 형으로 천둔검법을 표현했다. 하여 그걸 보는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냈지.’

놀랍게도 여동빈은 마지막에 있어서 본인의 뜻이 아니라 천무백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게 옳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 아니다.’

그저 남의 생각을 수용했을 뿐이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새끼. 신선 됐다더니 꿈에 나와 조언해 준 거였냐?’

남의 검도(劍道)를 수용하진 않아도 한 번쯤은 이해해 보라고 하던 그의 말.

‘그래.’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빈이 펼쳤던 천둔검법 원형, 청현진인과 국보의 매화가 담긴 검법, 무성적마의 패도적인 천둔검법, 능허의 뱀 같은 천둔검법까지.

‘각자만의 검도가 다 녹아 있구나.’

그리고 그것들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들 역시 한평생 강호에서의 경험이 담긴 그들만의 검도였으니까.

‘하나, 여동빈아.’

천무백은 웃었다.

‘그래도 나는 나만의 길을 걷겠다.’

천무백은 이 미로를 잊지 않았다.

길이 바뀌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동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것이리라.

‘남의 것을 듣고 수용은 하되, 본인은 길은 잃지 마라.’

그리하면 끝내 미로를 헤쳐 나가듯.

“검극에 도달하리라.”

천무백.

검극을 엿보다.

* * *

“하. 결국, 뭐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능허는 그림에 담긴 선과 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곧 자신만의 천둔검법을 얻게 된다.

그걸 이해한다는 수준이 절대로 녹록치 않았다.

미로에 들어왔던 무림인 중 그림에 담긴 선과 형을 이해한 이는 오직 천무백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능허는 천둔검법의 원형조차 알지 못했다.

언젠가 능허의 수준이 그 모든 걸 이해하는 순간 천둔검법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글쎄. 그건 알려 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능허는 천무백이 펼치는 걸 보고 따라하려 했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초식만 따라 한다고 검법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능허는 된소리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응?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뭐 얻은 게 있어야지.”

“그게 강호 아니겠느냐.”

“네네. 그러시겠죠. 적혈검귀의 진짜 장보도였으면 몰라. 적혈검귀한테 쓸 만한 좌수검법 있다고 사람 유혹한 양반이 누구더라.”

“능허야.”

“뭐요.”

“명색의 연화루 루주란 놈이 귀가 그리도 얇아서 어찌 쓰겠냐.”

“만두피로 쓰죠 뭐.”

“새끼. 잔뜩 삐쳤네.”

“삐치긴 뭘 삐칩니까. 아 물론 주군이시야 그 대단하신 천둔검법을 체득하셨으니 뭐 아쉬울 거 없으시겠죠. 네네. 그러시겠죠.”

“너 몇 살이냐.”

“마흔넷이다. 개자식아. 존댓말 안 해?”

뻐억!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절대로 뒤통수 맞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불편해서였다.

천무백은 그 꽁한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마흔네 살이 아니라 열네 살로 보겠다.”

“내가 좀 젊어 보이긴 하죠.”

“한마디를 안 지네. 능허야, 칼 꺼내.”

“아니, 때렸으면 됐지. 또 얼마나 패려고.”

능허가 툴툴대며 박도를 꺼냈다. 익숙한 행위인 듯 자연스러웠다.

그걸 한번 보던 천무백이 한숨을 내쉬며 다른 걸 쥐여 줬다.

“아니. 왜 죽은 놈 걸 줍니까? 부정 타게?”

천무백이 준 검은 꼬챙이처럼 보이는 바로 귀면수라의 검이었다.

“찌르기엔 이게 좋다. 그 무식한 박도보단.”

“찌르기? 내 기술엔 찌르기 별로 없는데?”

“이젠 배워야지.”

“네?”

천무백은 칼을 뽑았다.

“적혈검귀가 쌍수(雙手)검으로 유명했던 건 아느냐?”

“모릅니다.”

“아는 게 뭐냐.”

“제가 주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반말이나 듣고 맞고 사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정도요.”

“쌍수검을 쓴다는 건 좌수검법에도 유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

천무백이 씩 웃었다.

“이름은 없다. 나중에 네가 짓던지.”

“어? 설마…….”

능허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적혈검귀의 좌수검법을……?”

“그래. 칼 들어.”

“와, 시발. 이름은 뭘로 짓지? 어, 능허좌검? 이거 좋다. 능허좌검으로 해야겠다.”

“…….”

천무백은 자신의 검술에 능허라는 이름이 붙자 기분이 묘해졌다.

“……배우기 전에 좀 맞자.”

“네? 아니 왜요. 능허좌검 괜찮은데?”

“좀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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